다시 불붙는 우리-민주당 통합론
최근 정계 개편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으레 선거를 앞두고 정당 또는 정치세력들간의 이합집산이 나타나곤 했다. 따라서 합당설, 신당설이 나오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선거가 멀었는데도 정치판의 새판짜기가 논의되는 것은 이례적이다.
불씨는 예전부터 있었지만 합당설이 물위로 떠오른 것은 4·30 재·보궐선거 때문이다. 4·30 재·보선에서 우리당은 완패했다. 6곳의 국회의원 재선거와 7곳의 기초단체장, 10곳의 광역의원 보궐선거 등 정당 공천이 이뤄진 23곳 선거 가운데 우리당은 단 한 곳에서도 이기지 못했다. 우리당이 왜 이런 자충수를 두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재·보선 패배 이후의 우리당 행보이다. 개혁을 포기한 듯한 떳떳치 못한 자세 때문에 재·보선에서 패배했다면 우리당은 개혁을 더 열심히 추진하는 쪽으로 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당 내부에서는 개혁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고 있지 않다. 민주당과의 합당 논의만 나오고 있을 뿐이다. 합당 대상인 민주당이 거세게 반발하는데도 합당 논의는 수그러들지 않는다.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셈이다.
더욱 문제인 것은 왜 민주당과 합당해야 하는지 명분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민주당과 갈라선 것 때문에 4·30 재·보선에서 졌는가. 그렇지 않다. 민주당과 갈라선 우리당은 지난해 4·15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고, 갈라선 것도 이미 1년이 훨씬 넘었다. 그렇다면 합당으로 우리당이 얻을 이익이 있는가. 없다. 4·30 재·보선에서도 민주당은 지역적 지지기반인 호남지역에서 기초단체장 1곳, 광역의원 1곳에서만 이겼을 뿐이다. 국회운영이 힘들어졌는가. 그런 것도 아니다. 우리당이 단 한곳도 이기지 못했고, 여대야소가 여소야대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146석의 원내 제1당이다. 한나라당은 5곳에서 승리했지만 그래봐야 125석으로 우리당보다 20석 이상이 적다. 다른 야당들과 손잡지 않는다면 한나라당이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당 ‘민주당과 합당을 추진할 시기됐다’
여권발 '통합론'이 4.30 재보선에서 참패한 이후 부쩍 민주당과의 합당설이 새롭게 불붙을 조짐이다. 열린우리당 문희상 의장, 정세균 원내대표, 염동연 의원 등 주로 ‘민생·실용’ 진영에서 제기되던 합당론의 저변이 개혁세력까지 넓어지고 있다. 이같은 흐름은 중부권 신당과 민주당의 연대론, 한나라당의 외연확대론, 보수대연합론 등 각종 정계개편의 시발점이자 꼭지점이란 점에서 ‘연쇄반응’이 예상된다.
문희상 의장은 2일 관훈클럽이 주최한 토론회에 참석해 "민주당과의 통합을 거론할 시기가 됐다"면서 "진지하게 검토할 것을 희망한다"고 말했다.
문 의장은 과반의석 확보 실패에 따른 여당의 대응방안과 관련 "정책공조든 연합이든 합당이든 문호는 열려 있다"면서 "대의명분과 투명한 절차가 확보된다면 언제든지 누구와도 연대할 수 있다"고 밝혔다.
문 의장은 "사안별로 한나라당·민주노동당·민주당과 연대하겠다"고 덧붙이면서도 유력한 협력 파트너로 민주당을 지목했다. 그는 "대의명분에서 민주당과의 합당은 당연하다"며 "출생이 같기 때문에 가능성이 제일 높다"고 설명했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도 (두 당이 분리되어) 안타까움을 많이 느끼고 있다"며 "하지만 헤어지는 것보다 재결합이 더 어렵다"고 말했다.
특히 문 의장은 '민주당 대선빚'과 관련해 "합당되면 자동 해결되는 것 아니냐"며 "같이 대통령을 만든 당에서 달라는데 못 줄 이유는 없다"고 말해 합당론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쳤다.
문희상 의장에 이어 정세균 원내대표도 민주당과의 합당 필요성을 제기하고 나서 주목된다.
정 원내대표는 6일 낮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기자들과 오찬간담회를 갖고 "우리당과 민주당은 같은 형제나 마찬가지"라며 "민주당과 합당은 해야 한다"고 밝혔다.
비록 정 원내대표는 "불과 얼마 전에 (민주당이) 전당대회를 통해 합당반대 결의를 했었는데, 그렇게 빨리 될 수 있겠느냐"며 민주당과의 합당이 중·장기적 과제라고 부연했지만, 문 의장에 이어 당 지도부가 연이어 민주당과의 합당 필요성을 제기함에 따라 당내 반발이 예상된다.
정 원내대표는 합당에 반대하고 있는 한화갑 민주당 대표에 대해 "이제는 집착의 정치를 버려야할 시대"라며 "드라이빙 시트(운전석)에 앉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도록 해서는 안된다"고 압박하기도 했다.
천정배 의원은 12일 광주지역 언론인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우리당과 민주당 대다수가 합당을 원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천 의원은 “우리당의 대다수가 찬성하고 개혁파 일부만이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을 뿐이다”며 “민주당에서도 한화갑 대표 외엔 상당수가 통합을 원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천 의원은 민주당을 탈당, 중간지대에 머물고 있는 설훈 전 의원 ‘범여권 통합론’을 제기하면서다. 천 의원은 “원칙적으로 (합당론에) 찬성한다”면서 “당내에서 합당설만 나오면 강성 반대론자가 있지만 극소수라고 본다”고 말했다. 4.30 재·보선후 불거진 “민주당과의 합당을 추진할 시기가 됐다”며 “우리당과 민주당은 같은 형제나 마찬가지”등 합당론의 연장선이지만 당내 구도에서 개혁성향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물론 겨냥점은 다소 다르다. 천 의원은 “민주·개혁세력이 총집결해야 한다는 오랜 문제의식을 이야기한 것이고 민주당하고 힘을 합쳐야 그런 것이 되는 게 아니냐는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명분에 보다 강조점을 둔 것이자 당원 등 당의 저변 확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의미다. 재·보선 직후 불거진 합당론이 선거구도 차원에서의 ‘꼼수’로 비쳐지는데 대한 경계로 풀이된다.
설 전 의원은 한 인터뷰에서 “심정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하는 계층이 여당을 외면하는 현실에서 계속되는 민주당과 우리당의 반목이 이들의 정치무관심을 부추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여권 인사들의 이같은 통합론은 크게 두 가지 정도의 원인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심각한 수위에 이른 호남 정서를 전한 것이고, 그 결과 호남과 현 정부가 분리될 경우 일어날 심각한 ‘분열’에 대한 경계다. 물론 일각의 재·보선 패배로 복잡해진 당내 국면을 통합론으로 돌파하자는 의도도 배제할 수는 없어 보인다.
◆민주당 "우리당은 탈영병·반란군"... "먼저 원대복귀하라"
민주당의 표정은 여전히 차갑다. 유종필 대변인은 “민주당이 보기에 우리당은 합당 대상이 아니다. 반란군 탈영자”라며 “원할 경우 원대복귀하라. 그렇지 않으면 원대복귀도 할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유 대변인은 13일 국회 브리핑에서 “그 사람들(우리당)은 당을 깨고 나갈 때도 집요했는데 이제 필요하니까 합당을 주장하는 것도 아주 집요하다”며 “상대가 지칠 때까지 괴롭히고자 하는 것 같은데 민주당도 이제 단련이 돼서 지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천 의원은 ‘우리당 대다수가 합당에 찬성하고 개혁파 일부만이 반대하고 있다. 민주당에서도 한화갑 대표 외에는 상당수가 통합을 원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민주당과 민주당원들의 뜻을 왜곡하고 모독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민주당 입장에서 우리당은 반란군이고 탈영자일 뿐 합당 대상이 아니다”며 “(합당을) 원할 경우 탈영자의 원대복귀하고 원하지 않으면 원대복귀도 필요 없다”고 비꼬았다.
그는 이어 “분당 때 노무현 대통령과 우리당 사람들은 민주당을 깨고 짓밟으면서도 자신들은 지역주의가 아닌 전국 정당을 하겠다는 과시를 했다”며 “자기들이 파고 들어가고 싶은 영남 쪽에 대고 그런 표시를 하기 위해 희생물로 민주당을 선택해서 깨고 짓밟은 것”이라고 분개했다.
그는 또 “민주당을 한나라당과 같은 반열로 격하시키는 양비론적 비판을 하면서 자기들은 지역주의 및 부패와 절연한 새로운 전국정당을 만들겠다고 했다”며 “그것이 깨지자 이제는 자신들의 논리를 스스로 뒤집고 민주당과의 합당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화갑 대표가 지난 2일 중부권 신당측 연대론에 대해 “정당은 어떤 경우든 국민을 위해 생각이 같다면 정책연합을 할 수 있다”고 슬쩍 신당쪽으로 눈을 돌리는 듯한 모양새도 그런 맥락으로 해석된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일본이 과거 정권 교체할 때 연립여당의 한 축이 된 세력이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먼저 내걸고 그것을 충족시키는 쪽과 연립여당을 구성했다”며 “합당도 그런 관점에서 해야 한다”고 말했다.
◆통합은 가능한가.... 통합시기는?
우리당 의원들은 통합에 적극적이다. 양형일(광주동) 의원은 “광주 민심은 양당이 합쳐야 되고, 합쳐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팽배해 있다”며 “지금은 두 당이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연결해 차기정권을 창출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급선무”라고 말했다. 유선호(장흥-영암) 의원도 “합당이 필요하다. 두 당은 정체성이나 태생적 차별성이 크지 않다”고 말했다. 이같은 언급은 우리당내에서의 민주당과의 통합론이 호남지역 정서를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통합시기와 관련해 우리당내에서 오는 10월 재보선전과 내년 5월 지방선거전 등의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통합이 이뤄지기까지는 난제가 적지 않다. 월드리서치 김상범 연구부장은 “민주당 지도부가 (통합에) 문을 닫고 있는 상황에서 여당 지도부가 내부 반발을 어떻게 정리하는지에 따라 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이낙연(함평-영광) 의원도 “양당 내부에 통합에 반대하는 세력이 엄존한다. 많은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비상한 정치력이 양당 지도부에 있는지 의문이 든다”며 “적어도 내년 봄 지방선거까지는 통합이 어려울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우리당 천정배 전 원내대표는 “지방선거까지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2007년 대선까지는 어떤 식으로든지 양당이 힘을 합쳐야 된다”고 통합 당위론만 강조했다.
저작권자 © 시사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