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이계 잠룡들이 최근 ‘숨고르기’에 들어간 모습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도권 등에서 친이계가 대거 탈락, 낙천자들이 “친이계 학살”, “보복공천”이라며 집단 반발 조짐을 보이면서 이재오·정운찬·김문수·정몽준 등 친이계 대선후보들의 행보에 관심이 쏠렸었다. 특히 ‘박朴·비朴’계의 분당까지 거론되면서, 이들 잠룡들의 역할론이 대두되기도 했다. 하지만 공천 탈락한 ‘반박·비박계’ 탈당의 도화선이 될 것이라 예측됐던 김무성 의원이 “탈당하지 않고 백의종군 하겠다”고 밝힌 후 상황이 급변했다. 탈당이 예고됐던 비박계의 안상수·진수희·이사철의원 등이 총선 불출마 선언하며, ‘반박·비박 연대론’이 사실상 힘을 잃은 모습이다. 이에 따라 친이계 잠룡들도 당분간 ‘4월 총선’전까지는 호흡 조절할 것으로 전망된다. 또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패할 경우,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책임론’을 내세우며 칼을 빼들 것이란 관측이다.
수도권 등에서 친이계 인사들이 대거 탈락하자, 친이계가 술렁거렸다.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캠프 역할을 했던 안국포럼 출신의 권택기, 백성운, 강승규 의원 등이 공천에서 탈락했고,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 등 MB측근들도 탈락의 아픔을 맛봤다.
신당 창당설 나돌았지만
또 이재오 의원의 측근인 진수희 의원과 정몽준 전 대표의 측근인 전여옥 의원을 비롯해 안상수 전 한나라당 대표, 이사철, 허천, 이윤성 의원 등 비박계 의원들도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이런 상황에서 친이계 좌장격인 이재오 의원이 지난 8일 공천 결과에 반발해 기자회견을 열고 “당은 지금이라도 언론의 지적대로 감정적·보복적 공천을 하지 말고 투명하고 공정한 공천 작업을 해 주길 바란다”며 “현재 진행되고 있는 당의 공천이 가까이는 4월 선거와 멀리는 12월 선거에 악영향을 미칠까 우려된다”고 밝혔다.
여기에 진수희 의원이 지난 9일 SBS라디오 ‘서두원의 시사초점’에 출연, 친이계 집단 탈당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그런 움직임이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다”고 전했다.
이에 이들 친이계 및 비박계 인사들이 모여 18대 총선 때의 친박연대와 같은 새로운 정당을 만들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또 친이계 일각에서 국민생각 등과의 연대, 무소속 연대 등의 다양한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실제로 전여옥 의원은 지난 9일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국민생각에 입당하기도 했다.
“잠룡을 잡아라”
하지만 18대 총선 때의 친박계 돌풍 때와 같은 파괴력을 가진 여권 내 잠룡의 영입이 문제라는 분석이 나왔다. 18대 총선 당시의 친박연대의 돌풍에는 ‘박근혜’라는 대선주자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친이계 및 비박계 집단 탈당과 신당 창당을 위해서는 유력한 대선주자를 영입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점이 친이계의 고민이었다.
이 때문에 주목받은 인물이 정운찬 전 총리다. 여권 내 대권 잠룡 중의 한명이 정 전 총리가 친이계 낙천자와 국민생각 및 자유선진당 등과 함께 ‘비박연대’를 통해 총선을 치르는 방안을 추진할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정 전 총리는 “총선에 출마할 생각도, 박세일 국민생각 대표가 추진 중인 ‘비박연대’에도 참가할 생각이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같이 정 전 총리가 ‘비박연대 불참’에 대해 확실히 선을 그으면서, 친이계의 신당 창당 등 정치적 행보에도 제동이 걸렸다.
그렇다고 다른 여권 내 잠룡들을 영입하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여권 내 다른 잠룡들인 이재오·김문수·정몽준 등도 새누리당을 탈당할 명분이 약하고, 정치적 여건도 여의치 않은 모습이다.
그러면서도 이번 공천문제에 대해서는 박 위원장과 분명하게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실제 이재오 의원은 지난 8일 기자회견에서 공천 반납에 대해 “당을 사랑한다”고 했고, 친이계 집단행동 가능성에 대해선 “공정하고 투명한 공천을 하면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문수 경지도지사는 JTBC 시사토크쇼 ‘신예리&강찬호의 직격토크’에 출연 “박 비대위원장의 공천은 ‘먹통공천’”이라며 “이명박 대통령이 소통이 안된다고 하지만 박 위원장이 오히려 더 소통이 안된다”고 박 위원장을 겨냥해 비난을 강도를 높였다.
정몽준 전 대표도 지난 8일 트위터에 남긴 글에서 “4년 전 자갈밭에서 당선돼 지역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뛴 사람의 목을 자를 때는 최소한 설명이라도 해줘야 한다”며 “‘닥치고 나가라’ 식인데 그러면서도 ‘낙천자도 당의 중요한 자산’이라니 위선의 극치”라고 비판했다.
이어 “친이계에는 엄격하고 친박계에는 관대하다”면서 “그러면서도 계파를 고려하지 않았다니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다”고 일갈했다.
잠룡들, 숨고르기
이처럼 공천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이 의원이나 김 지사 정 전 대표 모두, 현 여권 내 역학구도에서 활동의 폭이 넓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선거가 코앞에 다가온 마당에 “우파 분열”의 책임까지 들어가며 새누리당을 탈당하기에는 정치적 무리수가 따른다는 분석인 것이다.
이와 함께 최근 이 대통령과 박 위원장의 관계도 친이계 잠룡들의 활동의 폭을 좁히고 있다는 시각이다. 정치적으로 예민한 시기이던 지난 9일 이 대통령과 정 전 총리가 오찬 회동을 가졌고, 이후 정 전 총리가 ‘비박 연대 합류’를 거절했다. 이에 정치권에서는 “이 대통령이 정 전 총리의 비박연대 합류를 만류한 것 아니냐”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이 대통령이 박 위원장에 대해 우호적인 발언을 해 주목을 끌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토론회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우리나라의 아주 유능한 정치인 중 한 사람임을 국민들이 다 아는 데 여기에서 더 언급하게 되면 선거법상 별로 도움이 안될 것 같다”고 말했다.
또 “한계론은 정치적 수사일 것으로 보고, 아마 여론을 봐서 대세론이란 말을 했지 않느냐 생각한다”며 “(박 위원장은) 유망한 정치인이다. 우리나라에 그만한 정치인 몇 사람 없다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위원장도 ‘MB 정부와의 차별화’를 꾀하면서도, 이 대통령의 탈당문제에 대해서는 ‘불가’입장을 보이고 있다. 박 위원장은 방송기자클럽 초청토론회에서 “역대 정권 말기마다 대통령 탈당을 반복했는데 그것으로 해답이 됐느냐.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정치권 관계자는 “이 대통령이나 박 위원장이 ‘총선승리’라는 공통의 명제 때문에 당분간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할 것”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친이계 잠룡들이 나서서 박 위원장을 대대적으로 공격하긴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친이계 잠룡들도 총선에서 야당이 제기할 ‘정권심판론’에 자유로울 수 없다”며 “일단 친이계 잠룡들이 당분간 ‘불비불명(큰일을 하기 위해 조용히 때를 기다림)’ 할 것”이라고 덧붙었다.
총선 패배한다면
그렇다면 친이계 잠룡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일 시기는 언제일까. 정치권에서는 이들이 ‘4월 총선’이후 본격으로 활동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정치권 관계자는 “박 위원장이 진두지휘할 이번 총선에서는 친이계 잠룡들이 별로 할 일이 없다”이라며 “또 총선 전망이 여권에 유리한 것만은 아닌 만큼, 총선에서 친이계 잠룡들이 발을 담그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이번 총선에서 여권이 패할 경우 박 위원장이 가장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이에 ‘총선 패배=박근혜 한계론’ 등식이 성립된 이후, 친이계 잠룡들이 ‘큰 일’을 도모할 것이란 전망이다.
새누리당이 총선에서 패배하면, 친이계 등에서는 대선후보로 정운찬 전 총리, 김문수 경기도지사, 정몽준 의원 등을 내세울 가능성이 있다. 이럴 경우, 향후 여권 내 대선후보 경쟁 판도도 출렁거릴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다.
한편, 정 전 총리나 김 지사는 최근 ‘대선출마’에 대해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 전 총리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대선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는데 수수방관만 할 수 없다”며 “국가를 위해 일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며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지사도 JTBC 시사토크쇼 ‘신예리&강찬호의 직격토크’ 에서 자신이 대통령감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렇게 생각한다”고 답하며 “(올해 중 도지사직 사퇴 가능성에 대해서는)그런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조민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