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회복위원회 찾는 하우스푸어 많아져
초대형 태풍 ‘볼라벤’이 한반도를 강타하고 지나간 만큼 29일 오후 서울 남대문로 신용회복위원회 서울중앙지부를 찾은 사람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점심도 건너뛴 채 대기표를 들고 있는 30여명의 방문객 가운데 서유철(가명 57) 씨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번듯한 대기업에서 매달 400만원 이상 월급을 받던 고소득 직장인이었다.
주위에서 나름 엘리트로 통하던 그도 다달이 불어나는 빚에 시달리다 겨우 찾은 곳이 바로 신용회복위원회(이하 신복위).
부동산버블이 절정으로 치닫던 지난 2007년 무리하게 주택담보대출 2억원을 끼고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아파트를 산 것이 화근이었다.
내 집 마련의 꿈을 잡기 위해 부동산거품의 끝자락인 ‘상투’를 붙잡았던 것이다.
금융위기 이후 집값은 우수수 떨어진 반면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2년 전부터는 3년 거치기간이 끝나 원금까지 갚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매달 200만원에 이르는 원리금 상환에 두 자녀 양육비와 생활비를 빼면 살림은 적자투성이다.
결국 얼마 전 집을 눈물의 경매로 ‘땡처리’하고도 3000만원의 빚이 남은 서 씨는 할 수 없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신복위의 문을 두드렸다.
서 씨는 “신용불량자는 딴 세계 사람들의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며 자포자기한 모습을 지었다.
신복위 관계자는 “빚에 쪼들린 아파트 대출자들이 사금융권 대출까지 받으면서 경매만큼은 어떡하든 막아보려 한다"며 "하지만 한계상황에 이르러서는 결국 아파트를 포기한다”고 말했다.
서 씨처럼 채무 감면 등 빚 조정을 받기 위해 신복위를 찾은 사람은 올 상반기에만 4만 5505명에 달한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629명 늘었다.
그 가운데 사전채무조정제도(프리워크아웃)를 신청하는 다중채무자 중 월소득 300만원 이상 고소득 계층은 407명으로 전년(213명) 대비 90% 이상 증가했다.
프리워크아웃은 연체 30일 이상인 경우로 채무 불이행자로 전락하기 전 채무관계를 조정하는 제도다.
신복위의 또 다른 관계자는 "과거에는 사업실패나 실직한 고소득계층이 신청을 했지만 최근에는 채무부담을 이기지 못한 하우스푸어(빚 상환에 허덕이는 주택대출자)가 문을 두드리고 있다"고 밝혔다.
하우스푸어들이 쪽박을 차는 과정은 의외로 단순하다.
(1)부동산 '대마불사' 시대에 대출을 받아 집을 샀는데→(2)집값이 폭락하면서 대출금을 갚기가 어려워졌고→(3)집을 헐값에 내놓아도 안 팔리니→(4)할 수없이 은행에 집을 떠넘겼는데→(5)경매시장마저 얼어붙으면서 낙찰이 안 되거나 되더라도 낙찰가가 형편없다는 사이클이다.
결국 집을 내놓아도 은행 및 기타 금융권의 빚을 갚을 길이 없으니 최후 수단으로 빚을 줄여달라며 신복위를 찾는 것이다.
깡통 아파트 속출
은행빚을 갚지 못한 대출자들이 급증하면서 올 들어 경매물량은 넘쳐난다.
통상 아파트 대출금 원금을 석 달만 연체하면 경매절차를 밟게 된다.
부동산경매정보업체 지지옥션에 따르면 금융권의 법원 경매 청구 금액은 지난 3월 기준 2,025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 2008년 이후 최고 수치인 것으로 조사됐다.
지지옥션 관계자는 "경매개시결정 이후 최초 경매가 진행되기까지 통상 5~6개월 이상 시차가 존재한다"며 "부동산 침체가 최악의 상황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올 하반기 경매 물건이 더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문제는 경매시장조차 더 떨어질 때까지 두고 보자는 ‘눈치작전’이 판을 치면서 낙찰이 쉽게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29일 오후 2시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211호 경매법정.
총 64건의 경매절차가 예고된 법정내부는 140여개의 모든 좌석이 빈틈없이 메워졌지만 정작 입찰봉투를 제출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경매업체 관계자는 "입찰 목적으로 법정을 찾은 사람은 140명 가운데 50~60명 정도"라고 점쳤다.
입찰이 끝나자 곧바로 개찰이 시작됐다. 여기서 해당 물건의 최고가를 적은 응찰자는 1순위로 낙찰자격을 얻게 된다.
개찰 결과 총 64건 중 19건의 주인이 정해져 낙찰률은 29.6%를 기록했다.
지지옥션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8월 15일까지 서울 지역 아파트(주상복합 포함) 1건당 평균 응찰자 수는 4.7명으로 2001년 조사 이후 12년 만에 가장 낮았다.
낙찰가율도 동반 하락했다. 2007년 평균 92%에 달했던 낙찰가율은 금융위기 전후로 82%까지 떨어진 데 이어 올 들어서는 70%까지 내려앉았다.
지지옥션은 금융기관이 법원 경매를 통해 담보물인 아파트를 처분하고도 대출금을 회수 못한 금액이 지난 7월 한 달에만 623억7000만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채권 미회수 금액 규모는 작년 1월 이후 최고 수준이다.
경매에 넘겨도, 즉 빚잔치를 벌여도, 대출금을 다 못 갚는 ‘깡통 아파트’가 속출하고 있다는 얘기다.
에듀푸어는 더 괴로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우스푸어로도 모자라 이제는 에듀푸어(사교육발 빈곤층)까지 등장하며 가뜩이나 무거운 중산층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서울 대치동에 사는 임정식(가명 47) 씨는 중소기업 이사로서 매달 통장에 450만원 정도의 월급이 찍힌다.
하지만 임 씨는 현재 두 자녀 사교육비로만 월 150만원 가량을 지출하고 있다.
중학교 3학년인 큰 딸은 영어와 수학 등 기본 과목만을 학원에서 수강하는데도 80만원이 든다. 초등학교 6학년인 둘째 딸도 영어, 수학에 논술학원을 다니면서 70만원을 납부한다.
임 씨는 “명문대를 보내고 싶은 욕심에 애들이 원하는 대로 학원을 보낸다”며 “사교육 때문에 빚이 더 늘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살림이 적자거나 빚이 있는데도 평균치 이상으로 교육비를 써대는 '에듀푸어'가 전국적으로 82만4000가구에 이른다. 자녀가 유치원 이상 재학 중인 가구 9곳 중 1곳 꼴이다.
특히 저소득층일수록 자녀교육을 위해 집을 잡히고 대출을 받는 경우가 많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소득 하위 20% 가구의 전체 담보대출 가운데 교육비 목적 대출의 비중은 2.0%로 조사됐다.
소득 상위 20%가구(0.8%)보다 2.5배나 많고 전체 평균(1.2%)보다도 높은 수치다.
지난해 전체 담보대출의 약 90%가 주택담보대출인 점을 감안할 때, 자녀 교육비 마련을 위해 집을 맡기고 돈을 끌어 쓰는 저소득층이 불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사교육비는 가파르게 치솟고 있다.
지난 6월 초등학생 학원비는 4.7%, 중학생 학원비는 5.3%, 고등학생 학원비는 5,0%씩 껑충 뛰었다.
같은 기간 2.2%를 기록한 소비자물가 상승률보다 배 이상 높은 수준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우리나라 '에듀푸어 가장‘의 평균적인 모습을 대졸 이상 학력의 40대 중산층이라고 추정했다.
하우스푸어와 에듀푸어 양쪽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된 상황에서, 노후대비는 언감생심인 채 빈곤층의 나락으로 추락하는 40대 중산층이 대한민국 아버지들의 자화상인 셈이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은 45%로 OECD 평균치(13.3%)를 훨씬 웃돈다.
전세금대출은 지속될 전망
용인시의 자택을 전세로 주고 대치동으로 이사 온 소위 '대전살이(대치동 전세)'를 하고 있는 박성권 씨는 전세금 차액 때문에 이미 2억원을 대출받은 상태다.
내년에 또 대치동 전세값이 올라갈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 속에 박 씨는 추가로 1억원의 주택대출을 신청할지에 대해 갈등하고 있다.
올해 전세금 대출 증가폭은 역대 최대치를 기록하며 전세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전세시장의 수급 불균형과 주택가격 하락 등으로 전세금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29일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7월 말 전세자금 대출액은 22조5천억원으로 지난해 말보다 2조3천억원(10.2%) 증가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전세 수요가 많아진 측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전세가격 상승이 주요원인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국민은행이 집계한 ‘주택 전세 가격 종합지수(기준치 100)’는 올해 7월 106.9로 역대 최고 수준이었다.
송파구 A공인중개사무소는 “소형아파트 전세는 한두 달 새 15~20% 뛰었다”며 “인상 폭을 놓고 주인과 밀고 당기기를 하느라 세입자가 무척 힘들어한다”고 전했다.
현재 은행권의 전세자금대출 금리는 최고 연 6% 가까이 된다. 5천만원을 더 빌리면 연간 300만원의 이자부담이 추가되는 셈이다.
박원갑 국민은행 부동산수석팀장은 “최근 업계에선 ‘렌트푸어(Rent Poorㆍ전세자금대출원리금 상환에 벅찬 무주택 세입자)’란 신조어마저 돌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은행이자가 예전 같지 않아 전세보다는 월세를 선호하거나 매매하려는 경향이 짙다보니 전세금이 계속 치닫고 있다.
박원갑 팀장은 “전세가격 상승이 매매 활성화로 이어진다는 통설은 이제 적용되지 않는다”며 “경기침체가 지속되는 한 전세자금 대출도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