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율이 70%를 넘으면 “옷을 벗고 사진 찍겠다”, “춤 추겠다”, “삭발 하겠다” 등 이색 공약들이 난무하는 사회가 우리 대한민국이다. 하지만 각종 굵직한 선거가 끝날 때마다 투표율 저조 현상이 문제가 되고 있다. 실제로 투표를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으면 대다수가 “찍고 싶은 사람이 없어서” 라고 말을 한다. 우리나라 절반의 사람들이 이러한 이유로 소중한 한 표를 포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아무도 찍지 않을 수 있는 한 표를 부여해 주는 건 어떨까?
“당선된 후보의 지지율보다 기권율이 높다면 그 정치인을 국민의 대표라고 부르기는 힘들 것”
“NOTA, ‘이 중에는 (답이) 없다’는 뜻으로 ‘지지할 후보없음’이라는 유권자의 기권 의사표시”
우리나라의 선거는 투표율이 얼마나 되든 상관없이 단 1표만 많아도 당선이 되는 상대평가이고 그 과정이 아무리 진흙탕일지라도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이 승자가 된다. 우리는 선거에서 오랜 기간 동안 최악의 후보가 당선되는 상황이 보기 싫어 마지못해 다른 후보를 선택하거나 투표에 관심을 끊은 채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거 때마다 정부는 ‘투표율이 저조하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해석만 쏟아낼 뿐 유권자의 ‘기권 의사’에 대해서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투표의 본질은 무엇인가? 투표를 통해 국민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의견을 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결과 대표자가 국민 전체가 원하는 바를 정책에 반영하면 비로소 민주주의 정신이 찬란하게 빛나게 된다. 하지만 소수의 표로 당선 된 후보는 정당성을 얻기 어렵다. 만약 당선된 후보의 지지율보다 기권율이 높다면 그 정치인을 국민의 대표라고 부르기는 힘들 것이다.
과거 프랑스 혁명당시 투표권을 가지지 못했던 대다수의 가난한 시민들이 ‘한 표를 찍을 권리’를 요구했다면, 지금의 유권자들은 ‘찍지 않고 기권할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 원하지 않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을 권리는 원하는 사람을 뽑는 것만큼 중요하다. 자질과 경험과 도덕성을 두루 갖춘 후보가 많아 누구를 선택할지 고민스럽다면 다행이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먼저 뽑지 않을 수 있는 권리를 국민에게 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유권자의 제3의 길, NOTA
일부 외국에서 실시하고 있는 ‘NOTA(None Of The Above)’라는 선거제도를 도입하면 유권자가 선택할 수 있는 제3의 길이 생긴다. 선거용어인 NOTA(None Of The Above)를 직역하면 ‘이 중에는 (답이) 없다’는 뜻으로 ‘지지할 후보 없음’이라는 의사표시다.
투표용지에 나온 후보자 중 아무도 뽑을 사람이 없음을 의미하는 NOTA는 기권란으로서 투표용지의 맨 아랫자리를 차지한다. 그곳에 ‘위의 있는 사람 중 아무도 없음’이라는 유권자들의 기권의사를 표시하면 된다.
이런 제도가 정치냉소주의를 불러올 수 있다는 비판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투표를 안 할 권리’도 있는데 ‘모두 다 거부할 권리’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적극적 거부권인 NOTA를 도입하게 되면 정치권 전체에 ‘국민의 뜻은 이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투표권 포기가 아닌 기권투표를 통해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것이다. 현재 스페인, 우크라이나, 스위스, 미국의 네바다 주 등 여러 곳에서는 이미 이 제도를 도입해 실시하고 있다.
미국은 NOTA 입법화를 위한 온라인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으며 녹색당과 월스트리트 저널도 이에 동조하고 있다. 만약 ‘지지할 후보 없음'의 득표가 1위를 차지하거나 반수를 넘겼을 경우 그 선거 전체를 무효로 돌리고 재선거를 하면 된다. 그리고 이때 출마했던 후보들은 재선거에 출마할 수 없도록 제한한다. 이미 유권자에 의해 거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완전히 새로운 후보들로 재선거를 치를 수 있게 된다.
텃밭에서의 오만 부리지 못할 터
NOTA 제도는 국민들에게 ‘각 정당에서 공천한 후보와 무소속 후보가 모두 못마땅하다’는 의사를 표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즉, ‘텃밭엔 막대기만 꽂아도 된다’는 식의 선거 악습이 사라질 수 있게 하고 정당과 정치인들은 기권표를 의식하여 좋은 정책을 실시하며 자격 있는 후보자를 내세우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2006년 5.31 지방선거 때의 일이다. 영남의 한나라당, 호남의 민주당 일부 후보자에 대해 주민들의 불만이 많았다. 악덕기업이나 고리대금업 등으로 부를 쌓은 자들이 공천을 따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지역 국회의원과의 어두운 뒷거래가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그렇다면 영남에서 민주당 후보를, 호남에서 한나라당 후보를 선택하면 되지 않느냐고? 이성적으로는 그렇지만 아직 지역감정이 뿌리 깊이 남아 있어 그게 쉽지 않다. 내가 지지하는 정당은 있지만 그 정당의 후보는 정말 싫고, 그렇다고 내가 싫어하는 정당의 후보를 뽑을 수도 없을 때 NOTA는 유용한 제도다. 지방선거에서 영남 또는 호남의 한두 곳에서라도 NOTA의 득표가 많아 재선거를 하게 됐다 치자. 공천에 간여했던 지역 국회의원이나 당 지도부에 비판의 화살이 쏟아질 것이고, 당의 이미지도 큰 상처를 입게 된다.
NOTA 제도를 도입하는 것만으로도 '텃밭'이라며 주민을 볼모 삼아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오만은 부리지 못할 것이다. 지방선거나 재ㆍ보선의 낮은 투표율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이기도 하다. 이런 NOTA의 입법화에 반대하는 것은 지역 유권자를 볼모로 삼고 공천 전횡과 야합을 일삼는 정당들뿐이리라.
NOTA 도입의 실효성
하지만 NOTA제도는 보완해야 할 몇 가지 문제가 있다. 그 중 하나가 ‘과연 유권자들이 기권란에 기표를 하자고 투표소까지 올 것인가?’라는 문제다.
또한 ‘지지할 후보 없음’이 가장 많은 득표를 보였을 때 향후 대응 방안이다. 재선거를 할 시 막대한 양의 예산이 필요하고 그 돈은 국민들의 세금으로 메워질 게 뻔하다. 물론 NOTA 때문에 재선거를 치른 경우는 극히 드물다. 1976년부터 실시한 네바다 주의 경우 NOTA의 평균득표율은 7.7%에 불과했다. 러시아는 이 제도를 시행하다가 실효성이 없다며 2006년에 폐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NOTA는 한국에서는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 같다. 정당의 지역성이 강한 데다 공천 과정이 비민주적이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인 스웨덴은 아무도 감수하지 않는 주당 80시간 이상의 노동을 맡아 전용차도 비서도 없이 오직 봉사의 정신으로 일하는 직업이 국회의원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국회의원들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될 순 없겠지만 NOTA를 도입한다면 그들의 특권의식도 조금씩 완화되지 않을까? ‘그들 중 하나를 뽑을 권리’와 더불어 ‘그들 중 한명도 뽑지 않을 권리’를 준다면 정치인들은 소중한 한 표를 잃지 않기 위해 국민들의 목소리를 더 가까이서 들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서 많은 방법들이 동원되지만 선거를 통한 자유롭고 적극적인 정치적 의사의 표현을 보장하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을 것이다. 비록 이번 선거에서는 NOTA의 도입이 실현되지는 못하겠지만, 앞으로 국민들의 정치적 의견 반영이 선거제도개선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장휘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