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의 도 넘은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가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서류 및 금리 조작 은 물론 고객 돈 횡령, 개인정보 유출, 수수료 빼돌리기, 학력차별 대출 같은 범죄행위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고 있다. 금융권 종사자들이 신뢰를 팽개치고 제 잇속만 챙기려고 한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갈수록 금융권의 모럴 해저드가 심각하다.
횡령·개인정보 유출 등 금융권 비리 처벌 강화해야
“금융권 영업행태 문제 키워, 근본 개선 시급”목소리
신한은행 지점장은 1000억원대(잔액 450억원)의 금융사기를 도운 대가로 10억원을 챙겼다가 금융당국에 적발됐다. 금융감독원은 신한은행 부문 검사 결과 이러한 사실을 적발하고 해당 지점장을 포함한 직원 5명에 대해 면직ㆍ견책 상당 등의 징계를 내렸다.
내부감찰 시스템, 구멍
금감원에 따르면 신한은행 H지점장, A 씨는 지난해 3월부터 올해 4월까지 한 거래업체가 지점장 명의로 위조한 1000억원대 지급보증서 8매를 다른 업체에 전달하는 금융사기에 가담한 대가로 14차례에 걸쳐 9억7900만원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을 신한은행은 내부감찰 당시 제대로 발견·조치하지 못해 화를 키웠다. 대형 금융사고인데도 내부 감찰에서 적발하지 못한 것이다.
또 신한은행 직원 18명은 고객들이 납부한 신용평가 수수료, 중도금 상환 수수료 등을 수백차례에 걸쳐 수억원 빼돌린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사업자등록증 등을 위조, 다른 은행에 통장을 개설한 뒤 고객들로부터 수수료를 입금 받는 수법을 사용했다. 이들은 모두 면직 처리됐다.
우리은행 간부는 고객 돈 31억여원을 횡령한 혐의로 경찰에 구속됐다. 하나은행 직원은 2009년 회사 공금 1800억원을 횡령한 건설사 직원의 범행을 도운 혐의로 쇠고랑을 찼다. 신한은행은 개인신용대출 때 고졸자에게 더 높은 금리를 매겨 차별했다. 국민은행은 아파트 중도금 집단대출 서류를 조작했다가 적발됐다. 삼성카드 직원은 지난해 80여만건의 고객 정보를 유출했다. 직원 개인 비리로 치부하기에는 이미 선을 넘었다.
은행권은 횡령 사고 외에도 고객에게 유·무형의 피해를 준 사례가 많다. 산업은행은 고객의 펀드투자금을 예금에 넣어놓고 이 돈을 다시 신탁해 4억5천만원의 수익을 냈지만, 고객에게는 예금 이자 2억4천만원만 지급했다. 광주은행은 신규 고객 839명의 거래 비밀번호를 은행 직원이 직접 입력해주기도 했다.
시중 은행 뿐 아니라 저축은행, 신협, 단위 농협 등 전 금융권의 도덕적 해이가 극에 달했다. 횡령을 숨기려고 내부 전산을 조작하는가 하면 불법대출을 일으키는 사례도 많았다. 징계 대상자를 승진시키고 표창하는 어이없는 일도 있었다. 금융감독원이 올해 들어 최근까지 적발한 ‘금융권 모럴해저드’가 가장 심각한 곳은 신협ㆍ농협ㆍ수협 등 상호금융회사다.
금융권 직원들 잇딴 비리
금감원에 따르면 광주광역시 우산신협은 직원 가족 등 특수관계인에게 11억원을 빌려주고, 대출 상환이 연체되자 7천만원의 대출을 일으켜 이자를 메웠다. 불법대출이 적발됐을 때는 징계를 피하려고 "본점 공사를 맡게 해주겠다"고 속여 건설업자에게 4천만원을 빌려주고서 다시 받아 불법대출을 갚는 데 썼다. 이런 사실을 은폐하려고 대출 이자를 내부 전산에서 삭제했다. 우산신협은 5차례나 징계 받은 직원 3명을 9차례나 승진시키고 3차례 자체 표창과 특별 승급 혜택도 제공했다. 전라북도 남원산림조합에서는 직원이 점포 시재금 1천만원을 빼돌려 향응과 개인 투자에 사용해 적발됐다. 임ㆍ직원의 임야 구매에 2천만원을 불법 대출하는 일도 있었다.
금감원 관계자는 “금융회사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불법과 비리가 태연하게 저질러졌다”고 개탄했다. 모신협은 직원에게 지급하기로 이사회에서 의결한 특별상여금을 도로 뺏은 뒤 임기가 만료되는 이사장과 임원 등 10명에게 사례금으로 나눠줬다. 또 모농협은 건설사에 12억원을 빌려주는 대가로 건설사 대표의 신용카드를 넘겨받아 쓴 것으로 나타났다.
보험권에서는 보험 설계사가 고객의 보험료를 가로채는 일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올 들어 메트라이프, 교보생명, 알리안츠생명, 미래에셋생명, 삼성생명, ING생명, 대한생명의 설계사 12명이 최고 수억원에 이르는 보험료를 유용한 사실이 드러나 등록을 취소당했다.
손해보험사에서는 삼성화재, 현대해상, 한화손보, 동부화재, 메리츠화재, 악사손보 등이 수백만원에서 수억원에 이르는 자동차사고 피해자의 보험금을 주지 않았다가 적발됐다.
이 같은 모럴 해저드 만연은 근본적으로 금융권의 윤리 부재와 탐욕이 원인이다. 땅 짚고 헤엄치기 식 예대마진으로 돈을 벌려는 금융권의 영업행태가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직원들이 무리한 실적 달성에 쫓겨 실적과 경쟁에 급급하다 보니 고객 돈을 빼돌리거나 고객의 서명 위조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우리 금융산업의 낙후성 극복과 수익구조의 선진화를 위한 금융시스템 혁신이 시급하다.
한편 금융권에서 올해 8월 말까지 비리로 인해 징계를 받은 임직원은 무려 447명으로 임원 95명, 직원 352명인 것으로 조사됐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5년간 징계를 받은 임직원 469명과 비슷한 수치이며, 지난해 같은 기간 222명과 비교해선 2배가 넘는다. 범죄 규모가 커지고 대담해지면서 금융 비리 피해액은 4년 만에 무려 3배나 급증해 수천억 원에 달한다.
금감원 관계자는 “앞으로 금융권의 비리가 더 이상 만연하지 않게 검사를 강화하고 여러 가지 내부조사도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하도록 지도하고 있다”며 “이러한 대책이 미봉책에 그치지 않도록 계속 이행실태를 점검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휘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