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업계 세계 1위를 자랑하는 현대중공업이 조선업 불황으로 자금난에 빠졌다. 이에 현대중공업이 타개책으로 회사채를 발행하는 등 다각적인 강구책을 모색하고 있는 가운데 현대상선 지분 매각설을 두고 재계의 추측이 분분하다. 그러나 정작 현대중공업은 현대상선 지분 매각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반응을 보이는데, 일각에서는 범 현대가 화합 차원에서 현대그룹에게 매각할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조선업계 최강자이지만 최근 유럽발 위기로 자금난
“조선업 불황 장기화에 대비해 자금조달 시급”지적
일각, “화합 차원에서 현대그룹에 매각할 가능성”
현대중,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 고려해본 적 없어”
세계적인 경기악화와 심각한 유럽 재정 위기로 유럽시장의 의존도가 가장 높은 업종인 조선업에 험한 파고가 밀려왔다. 국내의 대표적인 수출 산업인 조선업은 수출 의존도가 85%에 이른다. 세계 조선시장은 2008년 말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건조량이 수주량을 지속적으로 초과하여 수주잔량 감소가 지속되고 있다.
조선업 위기
현재 세계 조선업은 국내 업체들이 이끌고 있다. 최근 세계적 선박검사기관인 로이드선급협회의 리차드 새들러 CEO는 “한국이 전 세계 조선업을 이끌고 있다”며 “그만큼 한국 조선업계는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는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술력이 좋아도 발주자체가 급감하면 방법이 없다. 조선업계 강자인 현대중공업마저도 조선업 불황으로 재정위기에 부딪혀 난항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이에 현대중공업의 현대상선 지분에 대한 매각설이 솔솔 퍼지며 현대상선 지분 23.66%의 향방에 재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현대중공업이 선박 건조자금 확보를 위해 현대상선 지분을 매각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중공업은 올 상반기 2조원 가량을 조달한 데 이어 연내 1조원 가량의 자금을 추가로 조달할 계획이다. 그러나 조선업황이 워낙 침체된 까닭에 추가적인 자금 확보가 쉽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중공업은 지난 2월 5000억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한 데 이어 7월에는 7000억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하고, 7464억원 규모의 현대차 보유지분 1.45%를 매각했다. 이렇게 회사채 발행 및 비업무용 자산매각을 통해 약 1조9400억원의 현금이 마련됐는데도 현대중공업은 추가 현금 확보를 위해 다각적인 방법을 모색해야만 하는 실정이다.
선박건조비용 확보 필요
올해 현대중공업의 조선ㆍ해양부문 수주액은 상당한 부진을 겪고 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2.5%나 감소한 56억달러에 그쳤다. 이에 따라 2분기 경영실적도 영업이익 3585억원, 당기순이익 1341억원을 기록해 지난해 2분기보다 각각 65.2%, 82.97% 급감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DART)에 공시된 현대중공업은 올해 7월까지의 조선부문 영업실적이 43억달러로 지난해 동기 85억달러에 비해 49.19% 줄어들었다. 해양부문 수주도 지난해 동기 32억이었으나 올해는 12억달러로 61.48% 줄어들었다. 조선업의 불황이 장기화됨에 따라 현대중공업의 실적 역시 부진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더욱이 이 같은 실적부진은 내년 상반기까지 지속될 것으로 예상돼 선제적 위기대응을 위해서라도 추가 자금확보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현대중공업이 헤비테일 방식으로 선박을 수주해 선박건조비용 부담이 늘어나 극심한 현금부족에 시달릴 수밖에 없게 된 것으로 보인다.
헤비테일 방식이란 선박을 발주한 해운사가 선박대금을 공정 단계에 따라 균등분할 지급하는 것이 관행임에도 불구하고 선박을 인도받을 때 대금을 한꺼번에 지불하는 것을 말한다. 헤비테일 방식으로 선박을 수주하면 선수금을 받지 않고 선박을 건조해야 하므로 조선사가 자금난에 부딪히게 된다.
자금 확보는
실제로 지난해 현대중공업의 수주가 증가했던 드릴십 등 해양설비는 선수금이 인도시점에 집중되는 헤비테일 방식이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업계의 관계자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까지도 현대중공업의 조선ㆍ해양부문 수주액 중 상당부분이 헤비테일 방식으로 이뤄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며 “1조9000억원의 현금을 이미 확보한 상태라 할지라도 추가로 1조원 가량의 자금이 더 필요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리고는 덧붙여서 “특히 해양설비 등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선박을 납기에 맞춰 건조하기 위해서는 추가 자금조달이 시급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재계 일각에서는 기존에 현대차 지분을 매각하면서까지 자금을 조달한 것을 보면 현재 보유중인 현대상선 지분의 매각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보지 않고 있다. 지난 2006년 현대중공업은 현대상선 지분을 16.35%(2342만4037주) 인수했고, 현대삼호중공업도 7.31%(1047만9174)를 인수해 현재 보유중이다.
지난 8월31일 종가(2만7400원) 기준으로 봤을 때 현대중공업이 보유한 현대상선 지분의 가치는 약 9289억원이므로 이를 매각하면 추가 건조자금 1조원을 확보할 수 있다. 현대중공업 입장에서는 자금 확보를 위해 현대상선 지분을 파는 것이 재무건전성 측면에서 볼 때 가장 바람직하다. 보유 지분 매각은 비부채성 자금 조달인 까닭에 그룹내 자금 유동화에 회사채 발행보다는 그 효과가 훨씬 크다.
지분 매각설 강력 부인
하지만 현대중공업의 현대상선 지분 매각도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우선 증시 상황이 좋지 않아 마땅한 인수자가 없기도 하지만 현대상선의 대주주인 현대그룹이 현대중공업의 현대상선 지분을 매입하지 않을 경우, 다른 인수자와 경영권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때 현대상선 지분 보유가 현대그룹 경영권 분쟁을 일으켰던 적이 있다.
그러나 자금력 등 여러 가지 측면을 고려해봤을 때 현재 현대상선 지분을 인수할 수 있는 곳은 현대그룹밖에 없다는 것이 재계의 진단이다. 현대그룹은 현대건설 인수경쟁 때 축적한 상당한 자금이 있다.
증권가 일각에서는 "현대중공업 측은 현대상선 지분 매각에 대해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는 듯하다”면서도 “현대그룹과의 현대상선 주식의 딜이 성사될 가능성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는 관측이 나온다. 어차피 현대중공업은 자금이 필요한 상황인 만큼 범 현대가 화합차원에서 조달방식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관측에도 무게감이 실리고 있다.
그러나 현대중공업은 아직까진 현대상선 지분 매각설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일축하고 있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최근 불거지고 있는 현대상선 지분 매각설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라며 “내부검토나 이와 관련된 논의를 해본 적도 없고, 고려해본 적도 없다”고 선을 그었다
현대家의 경영권 다툼
현대는 계열사가 여러 갈래로 나뉘기 전에는 대한민국 1등 재벌기업이었다. 그러나 정주영 명예회장이 별세한 후 지난 2000년 현대그룹은 속칭 ‘왕자의 난’을 겪으며 현대그룹과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 등으로 계열이 분리되어 각자 독자노선을 걸어왔다.
현대그룹은 고(故) 정몽헌 회장이, 현대차그룹은 정몽구 회장이, 현대중공업은 정몽준 새누리당 전 대표가 각각 경영을 맡았는데, 정몽준 의원은 정치판에 뛰어들면서 현대중공업의 최대주주로만 이름을 올린 채 경영에서 물러났다.
이후 현대의 경영권을 물려받은 정몽헌 회장의 사망으로 뒤를 이은 부인 현정은 회장이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승계하지만 한 때 ‘시숙의 난’ 등으로 경영권을 위협받은 바 있다.
지금은 현 회장이 이끌게 된 현대그룹은 소수의 계열사들로만 이루어져 규모가 상당히 작아진 상태에서도 현대상선ㆍ현대아산ㆍ현대증권ㆍ현대로지엠ㆍ현대엘리베이터ㆍ현대유엔아이 등의 계열사를 갖고 있다.
현대아산을 통해 선대가 추진하던 대북관광사업을 지속했지만 최근 북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손실로 이어지고 있으며, 현재 남아있는 계열사 중 주력이었던 현대상선마저도 영업 손실이 늘고 있다고 전해진다.
현대家 화해 분위기
과거 현대가 사이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경영권 분쟁을 생각한다면 현대중공업이 현대상선의 지분을 매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정 전 대쵸는 현 회장과 일명 ‘시동생의 난’으로 일컬어지는 경영권 다툼을 한 바 있고, 정몽구 회장과 현 회장은 지난해 현대건설 인수를 두고 치열한 혈전을 벌이기도 했다.
따라서 현대중공업이 현대그룹의 현 회장에게 현대상선의 지분을 매각하기란 어려울 것이라는 시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중공업의 현대상선 지분 매각설이 끊임없이 나도는 이유는 세월이 흐르면서 갈등이 점점 희석되어 현대 오너일가 사이에서 화해의 분위기가 일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건설 인수 때 벌어진 현대그룹과 현대차그룹의 소송을 일부 취하하고, 현 회장의 큰딸인 정지이 전무의 결혼식에 참여해 축하해주는 등 현대가의 집안으로서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현 회장은 정몽구 회장의 부인인 고 이정화 여사의 기일에 참석함으로써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따라서 현대가의 화합을 위한 대승적 결단의 차원에서라도 현대중공업이 현대그룹에게 현대상선 지분을 매각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 재계의 시각이다.
장휘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