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사기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금감원에 따르면 신한은행 전 H지점장 박씨(47세)는 지난해 3월부터 올해 4월까지 유류유통 도매상 지씨(43세)의 지급보증서 위조 행각에 가담했다. 지점장 박씨는 지점장실에서 사기 조직단들이 만들어 온 위조지급보증서를 건네 받았다.
이렇게 50억 원이나 100억 원 단위로 8차례 위조한 보증서의 총액은 1000억 원이 넘는다. 박씨는 본인의 이름으로 승인한 위조지급보증서를 다른 업체에 넘겨 주었다. 전 지점장 박씨는 지씨의 거래처인 농협의 자회사인 N사에게 위조지급보증서를 직접 전달, 이것을 담보로 지씨는 430억 원어치의 유류를 공급받게 된다.
지급보증서는 은행이 특정 금액에 대해 지급을 보증하는 증서로 금융기관 대출이나 기업 간 거래 시 담보로 쓸 수 있다. 한마디로 1000억 원짜리 신한은행 지급보증서를 발급받은 지씨가 거래처에게 대금을 지급하지 않을 경우 신한은행에서 대신 지불해 주겠다는 약속이다.
신한은행, 금융사기 방관
전 지점장 박씨는 위조지급보증서 발급 대가로 지씨로부터 14차례에 걸쳐 9억8000만원을 받았다. 문제는 신한은행은 내부감찰을 2차례나 실시했으면서 이런 사실을 1년 넘게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자체 내부 감찰 시 박씨의 계좌로 수상한 돈 수억 원이 오간 정황을 파악했지만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 뒤늦게 착수한 조사에서도 “친인척 투자금을 대신 관리해 준 것”이라는 박씨의 말만 믿고 무혐의로 감사를 마쳤다.
박씨는 은행 감찰부서가 종결 처리한 이후에도 위조 지급보증서 650억 원 어치가 건네지는 데 다시 개입해 1억여 원을 자신과 아내의 계좌로 더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거래처 N사는 위조 사실을 몰랐나?
이번 사건과 관련 농협 자회사인 주유사업체 N사의 임원 조씨(46세)가 내부자로 지목 돼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조씨(46)는 지급보증서가 가짜인 것을 알고도 유류 430억 원치를 공급해 2억 6천만 원을 받아 챙긴 혐의다.
N사 관계자는 “그분은 돈을 받은 적이 없는데 누군가의 거짓진술로 인해 피해를 받고 있다”며 “재판과정에서 혐의가 벗겨질 것을 믿는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이어 N사의 관계자는 “신한은행 지점장실에서 받은 보증서인 만큼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았겠냐”며 “보증서는 물론 등기부등본에도 신한은행 지점장이라고 명시돼 있었다”고 피해자임을 강조했다. N사는 수백억원대의 이번 신한은행 관련 내부 횡령배임 혐의로 상장폐기의 위기에 놓여있다.
결국 진실은 법정에서 가려질 것이다.
모두 피해자라 주장
박씨의 사기 행각은 위조지급보증서를 받은 거래처 N사에서 신한은행에 진위 여부를 재확인하면서 드러났다. 금감원 관계자는 “은행에서 지급보증서가 발급된 사실이 없다고 금감원에 알려와 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지점장 박씨가 위조한 증서를 두고 ‘우리증서가 아닌 위조증서’라고 표현하며 신한은행 측의 잘못이 아닌 지점장 개인이 범한 사건이라고 선을 그었다.
신한은행에 따르면 지급보증서를 발급할 때 창구 심사 후 책임자 결제, 지점장의 최종결제 등 3단계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러나 박 전 지점장이 건네준 위조지급보증서는 인감도장이나 양식 등이 신한은행이 사용하는 것과 다르게 위조된 것이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본사의 정식 보증서가 아니다”며 발을 뺐다. 그렇다면 신한은행 측은 이번 사건에 대한 책임이 없냐고 되묻자 “그것은 판결 결과를 기다려 봐야 알 것 같다”며 말을 아꼈다. 이어 “보증서에 명시된 금액은 1000억이지만 1년 만기시점의 기준이고 실제로 피해금액은 450억 원이다”고 덧붙였다.
금감원 관계자는 “신한은행 내부통제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박 지점장이 개인적으로 외부에서 위조해 만든 양식과 인감도장을 사용했다는 점을 감안해 제재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금감원은 신한은행 내부통제 과정에 문제가 있었는지 판결을 두고 고심하는 눈치다.
한편 전 지점장 박씨는 본인도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그는 “은행 실적의 압박에 쫓기던 때라 재정이 탄탄하다는 지씨의 말에 속아 보증서를 발급해 주는 지경까지 갔다”며 “연관된 조직폭력배들의 회유와 협박이 이어지자 하는 수 없이 계속 사기행위에 가담했다”고 말했다. 현재 박씨는 1심재판에서 15년을 구형받았고 어떻게 결정이 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법조계 전문가는 “재판부가 박씨에게 15년을 구형한 것은 그가 금융사건에 의도적으로 관련했을 소지를 인정한 것”이라며 사건의 정황상 박씨가 주도한 일이 맞음을 시사했다.
모럴 해저드 극치
은행 지점장의 사인에 수천억 원을 움직일 수 있는 권력을 실어주는 금융지배구조현실덕에, 금융권은 나날이 내부직원의 비리로 얼룩지고 있다. 올해 도덕적 해이에 연루돼 징계 받은 금융권 임직원은 8월 기준으로 모두 447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기준(222명)의 2배를 넘어섰다. 비리 금액은 2010년 2천736억 원으로 2006년(874억 원) 보다 3배 이상 늘었다.
특히 이들은 횡령사실을 알고도 쉬쉬하는, 10억이 지점장의 통장에 들어와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등 모럴 해저드의 극치에 달하고 있다. 신뢰를 핵심 가치로 삼아야 할 금융권 지점장이 앞장서 수억 원을 횡령하는 도덕성 불감증 시대의 피해자는 고객들이다. 재판부의 솜방망이식 처벌이 아닌 전방위적 판결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