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촌리 고분군서 '부절'(符節) 추정 대롱옥
수촌리 고분군서 '부절'(符節) 추정 대롱옥
  • 전명희
  • 승인 2005.06.16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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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수록된 고구려 건국신화를 구성하는 이야기 중 하나로 건국시조 고주몽(高朱蒙)의 큰아들인 유리(琉璃)가 아버지를 찾아가서 아들임을 확인하는 기이한 사연이 소개돼 있다. 이에 의하면 유리는 7모서리 주춧돌 아래서 발견한 '단검 1단'(斷劒一段), 즉, 부러진 칼 한쪽을 들고서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을 찾아가니, 주몽이 지니고 있던 나머지 칼 한쪽과 맞추어 보고서 들어맞음을 알고는 마침내 아들로 인정받게 된다. 이와 아주 유사한 사례가 같은 삼국사기 설씨녀(薛氏女) 열전에서도 발견된다. 이에 의하면 율리(栗里)라는 곳에 사는 그녀는 사량부(沙梁部)라는 곳에 사는 소년 정혼자 가실(嘉實)을 6년만에 다시 만난다. 수자리 간 지 6년만에 다시 나타난 가실. 그의 몰골이 형편이 없어 설씨녀는 처음에는 가실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런 그들이 서로를 확인하기 위해 '파경'(破鏡)을 꺼내 들었다. 헤어질 때 두 조각으로 쪼개 각각 나눠 가진 거울은 결합됐다.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제후들을 분봉(分封)하면서 '단서철권'(丹書鐵券)을 제후왕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약칭 철권(鐵券)이라 하는 이 물건은 요즘으로 치면 훈장이나 임명장 정도가 되는데 항상 세트였다. 하나는 황실에 보관하고 나머지 하나는 제후가 갖는다. 명칭으로 보아 재료가 철(鐵)이었을 같지만 실제는 옥(玉)이 가장 애용됐다. 쪼갠 칼이나 거울, 세트로 제작된 철권이 모두 부절(符節)이다. 여기서 절(節)은 마디라는 뜻이니 끼워 맞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부(符)란 부합(符合)한다는 뜻이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제1장은 "해동(海東)에 여섯 용이 나시어[飛]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 고성(古聖)과 동부(同符)하시니"인데 여기서 말하는 동부(同符)가 바로 부절이다. 즉, 두 조각으로 깨서 나눠 가진 칼이나 거울, 혹은 세트로 제작한 철권처럼 아귀가 딱 들어맞는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부절로 생각되는 유물이 최근 충남역사문화원(원장 정덕기)이 조사를 완료한 공주 수촌리 고분군에서 확인됐다. 같은 공주 지역 무령왕릉 보다 빠른 5세기 중후반 무렵 축조됐다고 생각되는 수촌리 고분군 중 같은 횡혈식 석실분인 제4호와 5호분에서 각각 조각 형태로 출토된 유리 제(制) 대롱옥(관옥<管玉>)이 그것. 발굴 당시 책임조사연구원이었으며 현재 수촌리 유적 발굴보고서를 준비 중인 문화원 이훈 연구부장은 "이 대롱옥 두 점은 원래 하나였으나 두 개로 부르뜨린 다음에 각각 4-5호분 시신 머리쪽에 부장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이렇게 하나로 결합된 관옥은 전체 길이 5.4㎝에 지름 1.2㎝ 가량이었다. 이 한 점은 중간쯤인 2.7㎝ 가량 되는 지점에서 절단이 나 있었다. 하나의 관옥 조각을 나눠 기진 두 무덤 피장자는 부부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 근거로 이훈 부장은 "4호분에서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외에 남성 무덤에서만 대체로 출토되는 환두대도(環頭大刀)가 확인된 반면 5호분에서는 이런 유물들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장식용 구슬이 집중 출토됐다"는 점을 중시한다. 즉, 4호분이 남편이며 5호분이 그 부인일 가능성이 아주 큰 셈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궁금증은 남는다. 부부가 동시에 사망했다면 그 시점에 관옥을 쪼개 각기 다른 봉분을 만들면서 하나씩 넣어줬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현재까지 연구성과로는 두 무덤은 축조시기가 다르다. 즉, 5호분이 나중에 만들어졌다. 이런 추정이 타당하다면 이들 '부부'는 이미 생전에 변치 않는 사람을 약속하는 의미로 관옥을 쪼개 가지고 있었거나, 아니면, 남편이 먼저 죽는 그 시점에 부인이 장례를 치르면서 관옥을 쪼개 하나는 자기가 갖고 다른 하나는 남편의 시신과 함께 부장했을 것이다. 이런 부절의 전통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원류는 고대 중국에 있다. 중국적인 문화전통이 이미 수촌리 무덤에 짙게 투영됐다는 증거는 다름 아닌 이곳에서 중국제 도자기가 여러 점 출토된 점에서도 간접 확인된다. 이번에 드러난 관옥이 부절임이 확실하다면, 이 수촌리 고분군이 축조되던 그 시점에 한성(漢城. 서울)에 중심을 둔 백제는 일종의 봉건제적 지방통치를 실시하고 있었음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다. 백제가 공주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제후를 임명했건, 아니면 별도의 관리를 중앙에서 파견했건 상관없이, 이곳을 위임통치하는 관리는 왕에게서 그 위임을 상징하는 부절(符節)을 틀림없이 지니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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