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표시 못하는 아이들이 겪는 고통의 책임은 누구?
강남의 구립 유아원에 조리사로 근무하는 박모씨는(41) 잦은 이직을 했다. 주변 사람들은 한 직장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는 박모씨에게 “붙임성을 기르라”고 조언했지만 그의 속사정을 들으니 반전이 숨어있었다. 박모씨는 “유아원 조리사로 아이들을 위해 양심적으로 일하는 게 내 바람이었지만 유아원장의 갖은 횡포를 지켜보며 참고 다니는데 지쳤다”고 털어놨다. 온갖 비양심적인 일을 저지르는 인면수심한 원장과, 직원이라는 이유로 발맞춰 일해야 한다는 게 힘들다는 것이다.
박모씨는 작년 2월 이직 후 올 4월 또 이직을 한 상태다. 이직 이유는 두 번다 같다. 그는 “(전 직장의 원장을 가리키며)본인도 자식이 있으면서 아이들을 상대로 돈 얼마 그거 벌겠다고 눈 가리고 아웅식의 장사를 하는 걸 보면 속이 끓는다”며 말문을 열였다.
조리사로 근무 하며 아이들의 점심 급식과 오전, 오후 간식을 챙겨 주는 게 박모씨의 일이다. 올 초 박모씨가 일했던 N유아원의 경우 돈 맛 들인 짠돌이 원장 때문에 모든 직원들이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정부에서 보육지원금을 지원하기 때문에 사실상 유아원 사업으로 들어오는 돈이 많지 않아도 충분히 흑자다. 게다가 전에 일했던 곳의 경우 ‘구립 우수 유아원 표창장’도 받았을 만큼 구역 근방에서 평판이 좋았다. 원장도 직원들에게는 큰 잔소리 없이 잘해 주었다. 하지만 유독 유아들에게 지급하는 물품을 비롯해 심지어 아이들이 먹는 식품을 가지고도 장난을 쳤다”
N유아원의 원장은 오전 간식시간에 나가는 샌드위치를 만들 때 식빵은 유통기간이 지난 것도 버리지 말고 사용하게 강요했고, 내용물로 들어가는 햄의 경우 브랜드 이름조차 적혀있지 않은 제품을 사와 사용케 해, 박씨는 조리사로서 제대로 된 위생관리를 전혀 실행할 수 없었다고 한다.
“원장이 식재료들을 도대체 어디서 구입해 오는지 모든 직원들이 궁금해 했다. 식약청이나 구청의 감사가 뜰 때만 규정에 맞는 재료를 구비해 두고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드는 시늉만 했다. 케첩 같은 경우는 업소에서 쓰는 싸구려 통조림 케첩을 원장이 구입해 오면 O사 브랜드 케첩통에 옮겨 담아 사용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원장은 “기본적으로 음식을 할 때는 조리 설명서에 적혀 있는 대로 하지 말고 무조건 식재료 양을 적게 쓰고, 들어가는 가짓수도 줄여서 만들어라”고 지시했다. 이런 음식을 먹고도 “아줌마 잘 먹었습니다”라고 해맑게 웃으며 꾸벅 인사하는 아이들을 보며 박모씨는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20년 동안 유치원을 운영해 온 배테랑 원장은 비품 구입 시 이중장부를 작성해 영수증 처리를 하는 등 회계쪽 일까지도 본인이 직접 맡아 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원장의 경영방침에 대해“인간으로 할 짓이 아니다”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에 대한 복리후생은 좋은 편이라 겉으로 드러나는 큰 문제는 없었다고 한다.
학부모들이 원장의 이중성을 눈치 챈 적은 없냐고 묻자 “원장이 학부모들에게 학벌과 온화한 겉모습으로 믿을을 준거 같다. 아이 부모들 사이에서 음식 맛이 이상하다는 지적이 몇 번 있었지만 ‘싱겁게 먹어야 아이들 건강에 좋다’는 원장의 핑계에 깊게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N유치원은 외부와의 마찰이 생겨 문제가 불거질 때만 임시방편으로 운영방침을 개선하는 듯 행동하며 충돌을 피해왔다고 한다.
정부의 감시체제 하에 있는 국립 유아원·유치원조차 상황이 이런데, 사립은 어떠할까?
육아정책연구소가 349개 유치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급식 영양사가 없는 유치원이 전체의 30.4%로, 조리사를 두지 않는 유치원은 10%로 밝혀졌다. 조리사를 두지 않을 경우는 대부분 원장이 맡아 급식을 책임지는 것인데 과연 본인의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으로 얼마나 좋은 음식을 먹일지 의문이 든다. 실제로 국립유치원의 경우 급식 관리 책임자가 원장인 경우가 47%였는데, 사립유치원에선 원장이 급식 관리를 책임지는 비율이 83%에나 달했다.
유치원 운영위원회 첫단추…갈길 멀다
지난 9월부터 유치원에도 초ㆍ중ㆍ고교처럼 학부모와 교사가 참여하는 운영위원회가 설치됐다. 지자체들은 국·공립, 사립 유치원들을 대상으로 유치원 운영위원회 연수를 시작했고 교직원과 학부모 사이에서의 참여도 높은 수준이다.
국공립유치원은 운영 전반에 대해 운영위의 심의를 받고, 사립유치원은 자문을 받게 된다. 유치원운영위원회는 학부모위원과 교원위원으로 구성되며, 학부모위원 선출은 선거공고 때 후보자 등록을 하고 학부모 투표 결과에 따라 위원으로 선출한다. 자칫 자치단체의 입김이 들어갈 수도 있는 지역위원을 배제한 것이 학교운영위원회와 다른 점이다.
유치원운영위원회가 설치된 유치원의 학부모와 교사들은 유치원의 예ㆍ결산, 학부모 부담 경비, 방과 후 과정 등 총 11가지 주요 운영사항과 관련해 피드백을 주고받을 수 있다. 유치원에 자녀를 보내는 학부모들의 걱정사항을 직접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교육과학기술부(이하 교과부)는 “운영위원회는 유치원 운영에 대한 학부모의 공식적 참여통로로서 민주성·합리성·투명성을 제고하고, 유치원의 자율성과 책무성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교육계도 유치원 운영과 관련된 사항을 원장이 단독으로 결정했던 과거와는 달리 앞으로는 학부모와 교사도 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특히 운영위원회 구성은 유치원 운영에 있어 투명성 확보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7살 자녀를 둔 윤정희 씨는 “유치원에 건의사항이나 의문이 생겨도 학부모 입장에서 의견을 피력하는 건 쉽지 않았다”며 “혹시나 괜한 지적을 해 아이에게 피해가 갈까 고민했었는데, 부모들이 심의·자문 할 수 있는 운영위원회가 생겼다니 무척 반갑다”고 말했다.
서대문구에 위치한 명지유치원의 경우는 유치원운영위원회의 조례가 제정되기 전부터 자율적으로 위원회 운영을 해왔다. 명지유치원의 박정선 원장은 “우리 유치원은 조례 이전부터 유치원 경영에 학부모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운영위원회 문화를 정립해 왔다”며 “ 지난 9월 운영위원회는 일 년에 최소 4번 정기적인 토론회 절차를 밟도록 지정했지만 우리는 몇 년 전부터 한 달에 한번정도 꾸준히 실행해 왔다”고 말했다.
박 원장은 “운영위원회의 가장 큰 목적은 ‘소통’이다. 때로는 학부모들이 이해가 부족해 오해를 하고 그로인한 건의사항이 많아져 중심잡기가 쉽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어떤 소통의 장애가 생기더라도 아이들 기준으로 생각해야 하는 건 변함없는 전제조건이고, 학부모와 교사가 아이들의 입장에 서서 같은 눈높이로 상황을 바라보면 해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박 원장은 “운영위윈회는 집단의 이익을 대변자로서가 아니라 유치원의 발전과 아이들의 안녕을 위해 유치원 운영 전체를 보는 안목과 균형 감각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육아교육관련 전문가는 “유치원 규칙 개정, 예·결산, 교육과정 운영, 학부모 경비 부담, 급식, 통학버스 운영 등의 중요 사항 결정에 관해서는 원장에게 단독결정권을 주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며 어떤 집단이라든지 1인 체계는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학부모와 교사들의 정기적인 참여와 관심이 있어야 유아교육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운영위원회가 제몫을 하기 위해서는 선출된 학부모의 책임감과 도덕성이 요구되는 바다. 운영주체의 의도에 따라 자칫 유치원의 잘못된 관행이 제도로 굳어질 수도 있고, 운영 과정에서 비리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점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유아원·유치원생들은 아직은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로, 이 보살핌을 통해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필요한 자양분을 섭취하며 자연스럽게 성장하게 된다.
따라서 유아들 스스로 그들이 생활하는 보육 시설을 살아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교직원과 학부모들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공간을 설계해야 한다. 유아원·유치원이 안전한 돈벌이 수단의 장이 아닌 개성 있고 다양한 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자아를 꽃 피워 꿈이라는 열매를 맺게 하는 마당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