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구원투수 김무성, ‘보수대연합’으로 박근혜 대통령 만든다
새누리당 구원투수 김무성, ‘보수대연합’으로 박근혜 대통령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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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대연합’이란 ‘빅텐트’ 이뤄낸 1등 공신

 

만약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가장 1등 공신으로 꼽힐 만한 사람은 누구일까? 아마도 단연 김무성 새누리당 중앙선거대책위 총괄선대본부장을 꼽는 것에 이견을 달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선거일을 일주일 남짓 남겨놓은 현재 김영삼-이회창-이인제-한화갑 김경재를 포함한 동교동계 등의 박근혜 지지를 이끌어 내며 ‘보수대연합’이란 ‘빅텐트’를 이뤄낸 주인공이 바로 김무성이기 때문이다.

 

부친 김용주 덕에 김영삼과 ‘인연’

김무성의 정치시작 이야기를 이끌어내려면 그의 부친 얘기부터 꺼내야 한다. 김무성의 부친은 (주)전방의 창업주 김용주다.

김용주는 1960년 민주당 원내총무를 맡았던 인물이다. 당시 민주당 원내 부총무인 김영삼은 김용주와 친분관계를 맺었고, 이런 인연으로 인해 김무성이 상도동에서 정치를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김무성의 부친인 김용주는 늘 김영삼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용주는 “내가 기업도 운영해 봤고, 정치도 해봤지만 김영삼처럼 정직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며 “앞으로 큰  일을 할 사람”이라고 김영삼 예찬론을 펼치는 데 인색함이 없었다.

부산출신에 김영삼 경남중 후배로 한양대 경영학과를 나온 김무성은 막연히 정치에 대한 꿈을 꾸고 있었는데 드디어 정치를 시작할 기회가 생겼다.

1978년 김무성은 포항에서 둘째 형이 경영하던 동해제강 공장장으로 있었다. 그해 신민당 포항 영일 지구당 개편대회가 있을 때 김무성은 위원장직에 도전하게 된다. 전직위원장은 이철승계의 조규창이었다. 김무성은 이때 상도동에 ‘SOS'를 쳐서 지지를 확인받았다.

김영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김무성의 당선이 눈앞에 와 있었으나, 당시 김영삼은 박정희의 눈엣가시였다. 정보부는 경선준비과정 중 김무성이 당원에게 정종 1병을 돌린 것을 트집 잡아 압력을 가했다.

김무성은 결국 중도에 포기했고 정계진출의 꿈은 좌절됐다.

그리고 박정희의 죽음 이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김무성은 정치를 접고 (주)삼동산업을 운영했다. 하지만 김무성은 자신의 꿈이었던 ‘정치’를 버릴 수 없었다.

김무성은 김덕룡을 통해 김영삼과 만나게 해달라는 메시지를 넣었다.

당시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로 정보부의 미행과 도청이 이뤄지자 김덕룡을 만나기 위해서 김무성은 접선을 해야만 할 정도였다.

김무성은 우여곡절 끝에 85년 어느 날 서울 퍼시픽 호텔에서 김영삼을 만나기로 했다. 이때 김덕룡이 “그냥 나오면 경찰에 끌려가 김영삼을 만나지 못할 수 있다”며 미행을 따돌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김무성은 김무성이 지시한 대로 버스를 타고 나오다 몇 정거장을 더 지나가 내린 뒤 다시 버스를 타고 거꾸로 와서 미행자를 따돌렸다.

미행자를 따돌리고 어렵사리 김영삼을 만난 김무성은 “민주화투쟁에 동참하고 싶다”고 했지만, 김영삼으로부터 “용기는 가상하나 자네는 기업을 운영하니 노출이 되지 않는 선에서 도와 달라”는 답변을 얻었다.
김무성의 부친 또한 김무성이 정치를 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부친인 김용주는 “김영삼은 믿을 만한 사람이지만 지금은 날개를 펼 수 있는 시기가 아니다”고 제지했다.

하지만 부친의 눈을 피해 김무성은 막후에서 상도동의 재정적 지원자로 나섰다. 민추협 건물을 구할 때 김무성이 사무실 임대료의 절반을 부담했던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일화이다.

그리고 부친이 1985년 2월 12대 총선 때 작고하자, 자신이 운영하던 회사를 동업자에게 맡긴 후 김무성은 85년 4월 상도동 진영에 합류한다.

85년 상도동 입문 후 내무부 차관 거쳐 4선 거물로 성장

상도동에 합류한 김무성은 이후 1992년 김영삼이 대통령에 오르기까지 숱한 사선을 넘나들며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 선봉에 섰다.

이런 까닭으로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김무성은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청와대 사정비서관을 거쳐 내무부 차관에 중용됐다. 그야말로 문민정부의 실세이자 상도동계의 핵심인사가 된 것이다.

김무성의 지역구는 부산이다. 그는 부산에서 YS의 병풍아래 4선의 중진으로 성장하며, 민주계(YS계)의 좌장이란 소리를 들었다.

이런 그가 지난 2005년 박근혜 당 대표시절 사무총장을 맡으며 ‘박근혜’와 인연을 맺어왔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YS가 이명박 후보를 지원할 것을 권유하자, 김무성은 “내가 박근혜 캠프에서 나가면 배신자 소리를 듣게 되는데, YS 수하가 어디 가서 배신자 소리를 들으면 좋겠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김영삼은 웃으면서 “가서 박근혜를 힘껏 도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친박계의 좌장이란 소리를 들었지만, 세종시 문제로 박근혜와 틀어졌다.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공천을 관장한 박근혜가 김무성에게 공천을 주지 않을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김무성도 “공천에 연연하지 않고 내 갈 길을 가겠다”며 박근혜를 겨냥했다.

때마침 정치계의 선배이자 상도동계에서 동거동락했던 김덕룡이 신당창당을 서둘렀다. 김무성은 김덕룡과 YS의 차남인 김현철과 연쇄 접촉을 갖고 신당창당을 합의했다.

기자회견 날인 3월 12일 하루 전날까지도 김무성의 탈당과 더불어 신당 행(行)은 기정사실처럼 돼 버렸다.
하지만 김무성은 기자회견장에 나와 불출마 선언과 함께 당 잔류를 선언했다. 그 이유는 우파의 정권재창출이었다. 보수분열을 막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보수가 분열하면 정권이 넘어갈 것은 뻔하다”며 “나 하나 살고자 당을 떠날 수는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김무성은 ‘백의종군’하며 새누리당 4월 총선 승리를 도왔다. 그러자 김무성이 박근혜 후보 캠프에서 중용될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김무성은 “나는 아무런 직책을 맡지 않겠다”며 미국으로 떠나 버렸다.

김무성이 없는 새누리당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정수장학회’, ‘인혁당’논란 등으로 인해 박근혜 지지율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그림자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나락으로 치닫기 시작한 것이다.

김무성, 보수대연합 이끌어…

이때 구원투수로 김무성이 등장했다. 그는 선대본부장에 임명되자 ‘보수대연합’을 외치며, 우파인사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인제 선진통일당 대표가 박근혜 지지를 선언하며 새누리당과 합당했다. 이후 김경재 한광옥 등이 새누리당에 입당하며 동교동계 인사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김무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상도동을 노크했다. 그리고 마침내 김영삼의 지지도 받아냈다. 상도동계 모임인 민주동지회가 12월 3일 박근혜 지지를 선언했다.

그리고 김종필 한화갑 등도 연이어 박근혜 지지를 선언했고, 박세일 국민생각 전 대표도 박근혜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보수대연합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새누리당은 우파의 집권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실천으로 옮긴 인사는 거의 없다. 그러나 김무성은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든 안 되든, 보수대연합을 이뤄낸 1등 공신이다.

그가 4월 총선을 앞두고 불출마를 선언하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던 인사들도 김무성의 순수성을 인정해야 할 듯싶다.

김무성은 과감히 자신의 기득권을 던지는 모습을 보여줬고, 우파를 한 곳으로 모아 박근혜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에 대한 평가를 역사가 어떻게 내릴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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