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은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혹독한 유신시절 박정희와 박근혜는 아버지와 딸이 아니라 파트너로서 이 나라를 얼음제국으로 만들었다. 이번 선거는 민주세력이 이겨야 한다"고 글을 올렸다. 사실상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고 나선 것.
김현철의 문재인 지지로, 이번 대선을 앞두고 상도동계-이회창-이인제-한광옥 김경재 등 동교동계 인사들의 박근혜 지지를 이끌어내며 보수대연합이란 빅텐트를 만들었던 새누리당은 당황했다.
보수대연합 무너뜨리기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김덕룡 최기선 문정수 심완구 등 옛 상도동계 인사들도 문재인 지지를 선언했다.
이들의 선언으로 인해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듯했던 대선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박근혜와 문재인은 이제 다시 박빙 상태로 돌아갔다.
대선판을 박빙으로 돌려세운 김현철의 정치역정을 돌아본다.
선거에 여론조사 기법 도입
김현철은 1959년생이다. 우리나이로 쉰 네 살이다. 하지만 김현철의 정치이력은 길다면 길 수 있다.
김현철은 처음부터 정치할 생각이 없었다. 미국에서 MBA를 취득하고 취직하기 위해 국내에 들어와 여러 곳에 원서를 냈다. 하지만 야당총재의 아들이 쉽게 취직자리를 얻기란 힘들었다. 당시는 전두환 정권시절이다. 이 같은 이유로 취직길이 막혔다.
김현철은 궁여지책으로 입사원서 부친 성명란에 할아버지 함자와 아버지 함자 하나씩을 따서 ‘김홍삼’이라고 기재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후 쌍용증권에 공채로 입사했지만 1987년 대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선거전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김현철의 아버지인 김영삼이 통일민주당 후보로 대선전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1987년이 김 부소장의 정치시작인 셈이다.
그러나 13대 대선에서 야권이 분열되면서 승자는 노태우에게 돌아갔다.
김현철은 대선이 끝난 후 패인을 분석했다. 그는 여론조사를 통한 과학적인 선거에서 졌고, 홍보전에서 패했다고 생각해 중앙조사연구소를 설립했다.
여론조사 기법을 선거에 도입한 선구자가 김현철인 셈이다.
당시만 해도 김영삼과 상도동계 인사들은 여론조사 등 과학적인 선거전략의 중요성을 몰랐다.
김현철의 중앙조사연구소가 이듬해 총선에서 평민당이 제1야당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그 예상이 맞아떨어지자 과학적인 선거전략이 대두됐다.
이때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가 있다.
당시 통계프로그램은 ‘SPSS'가 전부였던 시절이다. 하지만 김현철과 중앙조사연구소는 좀 더 정확한 예측을 위해 새로운 통계프로그램을 사용했다.
좀 더 정확한 결과를 예측하기 위한 통계프로그램을 찾던 중 E여대의 김 모 교수가 5.3인치 디스켓을 통해 한국으로 가져온 통계프로그램이 모집단을 정확히 집어낸다는 소문을 듣고 김현철은 무작정 찾아갔다.
중앙조사연구소는 김현철이 가져온 ‘GPSS'라는 프로그램을 가져와 여론조사를 하기 시작했고, 정확도가 상당히 높아 상도동으로부터 신뢰를 받기 시작했다.
김현철은 이에 대해 “GPSS는 다른 것과 비교해보면 오차를 줄이는 장점이 있다. 이 때문에 정확한 조사가 가능했던 것 같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의 1등 공신
그러면서 김현철은 중앙조사연구소를 통해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고,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1등 공신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는 늘 음지에만 있었다. 양지로 나올 기회를 여러 번 찾다 포기했다.
솔직히 김현철은 원내에 진입할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19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부친인 김영삼으로부터 적극적인 출마를 권유받았다. 하지만 ‘아직 준비가 안됐다’고 김현철이 고사하는 바람에 불발로 그쳤다.
1992년 14대 총선 때는 김영삼이 대선에 출마하게 되자, 아버지의 지역구인 부산 서구가 공석이 됐다. 김현철은 부산 서구에 애착을 가졌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민정계인 곽정출 의원에게 돌아갔다.
1996년 김영삼 정부시절, 15대 총선이 다가오자 김현철은 ‘하고 싶은 이야기, 듣고 싶은 이야기’란 책을 출판하며 출마의지를 다졌다.
당시 신한국당은 경남 거제가 지역구인 김봉조 의원을 경남지사로 보내고 그 자리에 김 부소장을 앉히는 전략을 짰다. 하지만 김 의원의 거부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김현철은 “13대 총선 때 아버지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하려고 했다. 그런데 지역구가 부산 사하다. 그곳은 서석재 의원의 지역구다. 차마 갈 수가 없었다. 그때가 아버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적극 권유했던 때다”고 밝혔다.
세간에는 김영삼이 김현철의 정치입문을 돕고 있다고 말하지만, 김현철의 말처럼 ‘김영삼이 김현철의 정치행보를 돕는다’는 말은 잘못 알려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도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은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다. 이명박 후보가 당선된 후 18대 총선이 치러졌다.
2008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상도동계 인사인 노병구 전 민주동지회장은 김영삼을 만났다.
만난 자리에서 “이번 총선에서 김현철을 포함해 우리 민주계 인사들이 모두 공천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김영삼은 “솔직히 나이 오십이 된 아들을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어 지켜보는 거지, 난 현철이가 정치 안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정도다.
김현철도 “내가 정치에 입문하는 과정에서 아버님이 적극적으로 신경을 쓴다든지 하는 건 없다. 솔직히 그것 때문에 서운한 점도 많았다”고 잘라 말했다.
불출마로 원내진입 꿈 접어
아무튼 김영삼이 대통령직을 퇴임한 이후에도 김현철은 17대, 18대, 19대 총선출마를 노크했다. 하지만 출마조차 못했다.
그 이면에는 한보사태가 있다. 1997년 한보사태가 터지자 한보 배후로 야당은 김현철을 지목했고, 여론재판을 받아 김현철은 마녀사냥식으로 구속됐다.
검찰조사결과 김현철과 한보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마녀사냥식 재판이 진행됐다. 김현철을 구속시키기 위해 ‘조세포탈죄’라는 죄명까지 만들어 구속시켰다.
당시 변호를 맡았던 여상규 변호사는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김현철을 변호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변호사로서 기소장만 봐도 이 사건은 명백히 무죄라 확신한다. 표적수사고 짜 맞추기 수사의 전형이다. 법리해석을 잘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고 주장했다.
김현철도 당시를 회상하며 “검찰조사를 받으러가기 전 아버님이 전화로 ‘난 아무 힘이 없다. 잘 다녀오라’고 말했고 내가 갔다 와서 인사드리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검찰이 죄를 찾지 못하자 대선잔금을 가지고 조세포탈 혐의를 씌웠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국민은 그를 한보사태의 배후자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이런 기억들로 인해 그는 음지에서만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김현철은 배수의 진을 쳤다. 자신 앞에 씌워진 모진 실타래를 풀기 위해 총선출마를 선언한 것.
김현철은 새누리당에게 공천을 받기 위한 경선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공천을 관장한 박근혜는 김현철에게 경선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공천에서 배제된 김현철은 상도동계 대표인사인 김덕룡 김무성 등과 함께 신당창당을 서둘렀다. 그러나 김무성의 당 잔류선언으로 그는 또다시 불출마를 선언하며 원내진입의 꿈을 접어야 했다.
‘문재인 지지’ 선언으로 ‘與’흔들
그리고 김현철은 18대 대선을 앞두고 사실상 민주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 김현철의 문재인 지지로 인해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만들어 놓은 ‘보수대연합’이 흩뜨러지기 시작했다.
상도동계 인사인 김덕룡도 지난 12월 10일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며, “김영삼이 박근혜를 지지한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일”이라며 직격탄을 날렸다.
김덕룡 김현철이 문재인 지지를 선언하자, 문정수 전 부산시장, 심완구 전 울산시장, 최기선 전 인천시장 등 상도동계 인사들의 문재인 지지선언이 잇따랐다.
여기에 보수인사로 평가받는 정운찬 이수성도 직간접적으로 문재인 지지를 선언했다.
선거를 앞두고 보수대연합이 깨지는 듯한 인상을 주면서 박근혜와 문재인 간 대선 판이 흔들리고 있다.
김현철의 30여 년 간의 정치행보가 성공을 거둘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