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 바우슈와 한국
피나 바우슈와 한국
  • 전명희
  • 승인 2005.06.23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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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발레의 혁명아'로 불리는 모리스 베자르는 일본문화에 심취했다. 일본의 전통예능인 가부키(歌舞伎)를 소재로 한 발레를 만들면서 아예 제목을 '가부키'라 붙였고, 일본군대의 부활을 외치며 할복자살한 극우파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일대기를 그린 '미스터 M'이란 작품은 일본색이 너무 짙은 나머지 유럽 공연에서는 일부 관객이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기도 했다. 베자르에 이어 현대발레의 최고봉에 오른 인물로 평가되는 이리 킬리안(네덜란드 단스테아터 고문) 역시 일본의 전설을 소재로 '가구야히메'라는, 아주 빼어난 작품을 만들었다. 얼마 전부터는 일본 무용축제의 예술자문 역을 맡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이름난 세계적 예술가 가운데 일본을 좋아하는 이가 한둘이 아니다. 국제 문화예술계에서 영향력이 큰 이들의 작품과 언행을 통해 일본문화의 이미지는 엄청난 상승효과를 누리고 있다. 이처럼 영향력있는 예술가들을 끌어들이려면 우선 그 나라 문화에 깊은 매력이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정부나 문화계의 의식적인 노력이 매우 필요하다. 그리고 일본은 그런 일을 아주 잘하는 사람들이다. 무용계만 보더라도 베자르와 킬리안을 비롯해 장-클로드 갈로타나 수전 버지 같은 중진ㆍ원로급 안무가들을 불러다 장기간 체류시키면서 일본 무용가들을 가르치고 작품도 만들게 한다. 이렇게 해서 자국의 예술 수준을 높이는 동시에 국제진출의 길을 마련한다. 이들의 국제적 위치나 인맥에 편승하는 것이다. 물론 이들에게는 칙사대접을 마다하지 않는다. 수시로 초청해 일본을 둘러보게 하고 무슨 공로상이니 훈장같은 것도 잘 준다. 이들이 외국에서 공연할 때에도 관심과 성원을 보낸다. 국제사회에서 유럽이나 미국에 비해 여러 모로 열세인 아시아 국가들로서는 적극 활용해봄직한 이런 전략은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과거 미국의 대작곡가 앨런 호바네스의 음반을 냈고, 세계적인 작곡가 펜데레츠키와 잔카를로 메노티에게 작품을 의뢰했지만 후속조처 부재나 작품 자체의 미흡 등으로 인해 별 성과가 없었다. 음악은 그래도 나은 편으로, 무용계에서는 극소수 인사들이 개인적 인맥으로 친한파를 확보하고 있는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에 결실을 본 피나 바우슈의 한국 소재 신작 '러프컷'은 매우 희망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작품 속에도 음악, 동작, 장면 등에 한국적인 요소들이 충분히 용해돼 있는 것은 물론(베자르의 '미스터 M'처럼 지나치지 않게) 하나의 작품으로서도 피나의 근작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두드러져 보인다. 오는 10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행사의 일환으로 이 작품을 공연하려던 계획은 일정상 불가능으로 판정돼 무척 아쉽지만, 내년 파리와 도쿄 등지에서 공연이 예정돼 있다. 제작후원사인 LG로서도 아깝지 않은 투자다. 이 작품이 전세계를 돌면서 공연될 때마다 LG라는 이름이 함께할 테니 말이다. 일각에서는 피나 바우슈라는 유명 안무가의 신작 탄생에 소재와 비용을 제공했을 뿐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그렇게 속좁게 볼 필요는 없다. 프랑스인들은 "영감이 고갈되면 아프리카나 아시아로 간다"는 농담을 자주 하는데, 어차피 예술가에게 무엇인가는 영감의 원천이 돼주는 것이다. 동양 여성의 일방적 희생을 부각시켰다고 비판받는 푸치니의 '나비부인'이나 뮤지컬 '미스 사이공'처럼 오리엔탈리즘이 문제되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이것도 윈-윈 전략인 것이다. 더구나 피나의 한국 소재 창작은 그다지 짧지 않은 세월 간헐적으로 한국의 사람과 산하와 풍물이 그의 마음에 스며들면서 익어온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가 기자회견에서 한국을 소재로 했을 뿐 '한국에 관한' 작품은 아니라고 누차 강조했지만, 그럼에도 정작 작품을 보면(21일 오후 5시 일반공개에 앞선 관계자 초대공연) 한국을 이해시키는 데 도움이 될만한 요소도 제법 많다. 원숙한 그의 안무력이 작품도 살리고 한국의 이미지도 살린 셈이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우리 편'을 많이 만드는 일, 그리고 그들이 만든 작품이 더 많은 곳에서 올려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는 것이다. 정부도 이런 면에선 전략이 있어야 한다. 적어도 우리 문화에 매료된 외국 예술가들이 자기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라도 한국에 관한 작품을 만들겠다고 줄을 설 때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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