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속의 요정 "김성녀"
벽속의 요정 "김성녀"
  • 전명희
  • 승인 2005.06.24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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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린듯한 김성녀의 연기
이념이라는 굴레 때문에 40년간 벽 속에 숨어 살아야 했던 아버지, 그 아버지를 요정으로 여겼던 딸, 40년간 남편의 존재를 다른 사람이 알까 마음 졸이며 가정을 꾸려야 했던 어머니. 연극 ‘벽 속의 요정’(극본 배삼식·연출 손진책)의 얼개를 그려보자면 이렇다. 처음 내용을 대했을 때는 ‘이게 요즘 같은 세상에도 통할 법한 내용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배우 김성녀가 혼자서 주요 인물은 물론이고 주변 인물까지 30여 역할을 해낸다고 했을 때는 ‘과연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섯살배기 어린애부터 60세 넘은 노인, 꽃다운 처녀부터 유들유들한 중년 남성까지 각양각색의 인물을 배우 한 명이 구현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한 인물에 몰입했다 곧바로 빠져나와 또 다른 인물이 되는 것, 앞으로 볼 때는 이 사람이었다가 뒤돌아서면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은 연기 인생 30년의 김성녀에게도 녹록지 않은 작업일 듯싶었다. 그러나 걱정은 기우였다. ‘벽 속의 요정’은 잔잔한 재미와 저릿한 감동을 안겼다. 극은 무거운 메시지에 압도당하지도, 가벼운 웃음에 날아가지도 않았다. 김성녀가 객석 뒤쪽에서 걸어나와 관객과 귀신에게 말을 걸며 시작한 연극은 한 편의 옛날 이야기처럼 흘러갔다. 일본 원작(후쿠다 요시유키)의 그림자를 완전히 없애고 우리네 이야기로 탈바꿈했다. 무대는 단출했다. 뒤편에 스크린이 설치됐고, 양 옆에는 반닫이가 놓여 있다. 스크린에는 때로 푸른 하늘이나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고, 그림자극이 연출되기도 했다. 반닫이는 소품을 담는 데 쓰였다. 단출한 무대가 마치 꽉 찬 듯 느껴지게 만든 이는 김성녀였다. 그는 맑은 어린아이의 목소리에서 낮은 남성의 목소리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극 중간중간 그가 부르는 우리 민요, 러시아 민요, 성악곡은 관객의 호흡을 쥐었다 놓았다. 30년간 연극과 뮤지컬, 마당극을 오가며 쌓은 배우의 역량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무대였다. 김성녀는 웃음과 울음의 경계, 인물과 인물 사이에서 적절히 줄을 탔다. 유쾌하게 흐르던 극은 후반으로 갈수록 눈물을 자아낸다. 아버지를 붙들고 어머니가 ‘살아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을 부를 때, 아버지가 손수 짠 베로 지은 웨딩드레스를 차려 입은 딸의 모습, 딸이 아이를 뉘어놓고 아버지에게 배운 러시아 민요 ‘스테카라친’을 부를 때 객석은 조용해졌다. 7월 24일까지 서울 우림청담시어터에서 공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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