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제 보복정치
이인제 보복정치
  • 민철
  • 승인 2005.06.27 11: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치적 족쇄 풀린 이인제, 노 정권의 정적죽이기였다 주장
“한라나당으로부터 이회창 후보의 지원유세를 해주는 대가로 2억5천만원을 받았다” 이인제 의원을 벼랑 끝까지 몰아세웠던 김윤수씨(당시 공보특보)의 진술은 결국 법원에서 결정적 증언으로 채택되지 못했다. 지난 16대 대선 직전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다가 21일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자민련 이인제 의원이 무죄 판결을 받은 것. 이 의원은 지난해 2월 2억5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구속됐다 보석으로 풀려나 1심에서는 징역8개월, 집행유해 2년 추징금 2억5천만원을 선고받는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간의 실제적인 정치활동은 위축되어 왔었다. 특히 법원의 무죄판결이 나오자 이 의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란 제목의 대국민 성명을 발표, 노무현 대통령을 겨냥 “노 정권은 정적인 저를 죽이기 위해 온갖 거짓말을 동원했다”며 칼을 세웠다. 또한 자민련 당사에서 22일 열린 ‘이인제 의원 무죄판결 환영회’에서 이 의원은 인사말을 통해 “총선을 불과 2개월도 남지 않은 시점에 ‘총선에서 이인제를 죽이겠다’는 독기어린 권력의 의지 때문” 이라며 이번 사건이 ‘정적 죽이기’ 였음을 주장해 전면전을 선언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에서는 반응을 보이고 있지 않지만 이번 무죄 판결로 자신을 옥죄던 족쇄에서 풀려남에 따라 앞으로 이 의원의 행보에 따라 ‘정적’의 싸움이 적잖은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보여 정치권 안팎으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재판부, 김윤수 씨 진술 신빙성 의심 서울고법 형사5부(이홍권 부장판사)는 21일 지난 2002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 2억5000만원을 받은 혐의(정치자금법 위반)로 기소된 자민련 이인제 의원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2억5000만원을 선고했던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의 핵심은 유일한 증거 인 김윤수(이 의원 전 공보특보)의 진술의 신빙성에 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에 재판부는 김씨의 증언이 객관적 정황과, 사실 여부 등에 일관성이 있느냐를 핵심으로 다뤘다고 전했다. 이날 재판부의 결론은 김씨의 허위 진술 가능성에 무게를 실고, “피고인에게 금품을 전달했다는 김 씨가 ‘돈 상자’를 전달한 경위나 시점에 대해 불명확한 진술을 하고 있다”며 “한나라당으로부터 받은 5억원 중 일부를 가로챘다고 인정한 김씨가 더 중한 처벌을 받을 것을 우려해 허위 진술했을 가능성도 높은 만큼 피고인의 유죄를 입증할 증거가 못 된다”고 밝히면서 이 의원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러한 판결을 내리게 된 것에 대해 재판부는 “김씨는 예금 출처 및 용처에 대해 명확한 진술을 못하고 있고, 현장검증에서 이 의원에게 돈을 전달할 당시의 주차장소 등 여러 군데 뒤바뀐 진술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사건은 2004년 총선을 한 달여 앞둔 상황에서 한나라당의 대선자금 수사과정을 통해 나타나게 되었다. 당시 한나라당 김영일 전 의원이 김 씨를 통해 이 의원에게 당시 이회창 후보의 대선지원을 부탁하고 5억을 전달했다는 검찰의 진술로 인해 이 의원의 시련은 시작됐다. 그 후 검찰은 김 씨에 대해 조사를 벌였고, 한나라당로부터 받은 5억 중, 2억 5천만원은 김씨가 개인적으로 사용하고 나머지 금액은 이 의원에게 전달했다고 진술함에 따라 이 의원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 되었다. 당시 검찰의 발표로 이 의원 지지자들은 ‘노 대통령의 정적 죽이기’라며 반발하며 지구당사 앞에서 격렬한 항의 시위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그 뒤 이인제 의원은 검찰에 연행되어 구속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난 후 재판을 받아왔다. 이 의원은 이날 무죄판결을 받은 뒤 함께 법정에 온 지지자들에 둘러싸여 “총선에서 나의 결백을 믿어준 지지자들, 정의로운 판결을 내려준 사법부 등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는 소외를 밝히고, “다시 원점에서 출발하겠다는 마음으로, 한알의 밀알이 되겠다는 각오로 뜻 맞는 분들과 힘을 모아 다시 일어서겠다”고 비장한 각오를 내비쳤다. 이에 앞서 항소심이 열린 이날 서울고법 재판장에는 재판에 앞서 일찍부터 이 의원의 지역구인 논산·금산·계룡지역 주민 200여명과 자민련 당직자들이 나와 판결을 기다렸다. 여기에는 김학원 대표를 비롯 김낙성 원내총무, 김한선 사무총장, 이규양 대변인, 허세욱 대표비서실장과 무소속 정진석 의원, 이 의원의 부인 김은숙 씨, 김 대표의 부인 차명숙 씨등이 지지자들과 함께 이를 지켜보며 가슴을 졸였다. ◆ 이인제, “검찰의 신성한 칼을 이용하는 정권이 문제” 이 의원이 재판부의 무죄판결 받은 다음날인 22일 자민련 당사에서는 ‘이인제 의원 무죄판결 환영회’가 열렸다. 이날 환영회에 참석한 이인제 의원, 자민련 김학원 대표, 김낙성 원내총무는 “대한민국 국민 만세”라며 만세삼창을 외치는 등 당원들은 밝은 표정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당사를 가득 메웠다. 이 의원은 “나 자신이 누명을 쓰고 고통당한 것은 감내할 수 있다”면서 “그러나 가장 기본적 가치가 흔들리고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심경을 밝히고 새로운 출발을 알렸다. 특히 이 의원은 노 대통령을 겨냥한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이 의원은 환영회 인사말을 통해 “총선을 불과 2개월도 남지 않은 시점에 ‘총선에서 이인제를 죽이겠다’는 독기어린 권력의 의지때문” 이라며 이번 사건이 ‘정적 죽이기’였음을 강하게 주장했다. 이어 “사건이 터진 당시 누구를 소환하거나, (자신에게는) 한마디 듣지도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터뜨려진 일”이라고 억울함을 호소한 뒤 “누명은 쓰기는 쉬워도 벗기는 어렵다”는 말로 그간의 심경을 밝혔다. 이 의원은 또 “보좌관이라는 사람의 진술을 믿을 수 없어 무죄가 결정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며 “그 사람은 자신이 자금을 전부 사용했다고 진실을 계속 주장해왔으며, 그 진술이 다 드러남에 따라 무죄가 선고된 것”이라며 검찰 조사에 문제를 제기했다. 특히 그는 노 정권을 겨냥해 “검찰이 증거 은폐를 위해 별 짓을 다했다”며 “검찰의 신성한 칼을 이용하는 정권이 문제”라며 공세를 폈다. “(이 의원)자신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건에 대해 무죄를 증명해야하는 힘든 일이었다”며 그간 힘들었던 심경을 털어놓았다. 또한 자민련 주요 당직자들은 이번 재판결과에 대해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며 입을 모았다. 김학원 대표는 환영사에서 “어렵고 고통스러운 투쟁속에 승리를 거둔 날”이라고 평가하고, “정권이 이인제 의원을 박해하고, 자민련을 고사시키려는 시도에도 굴하지 않고 버텨온 만큼 새출발을 다짐하자”고 주장했다. 김낙성 원내총무는 “민주화 되었다는 대한민국의 노 정권하에서 이런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은 국제적 수치로까지 여겨지지만, 그래도 무죄판결이 나와 다행스러운 일”이라며 “충청권 정치세력이 대화합, 단합하는 계기로 삼아 충청권이 정치권의 태풍의 눈으로 부상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환영회’에는 자민련 김 대표을 비롯 주요 당직자와 자민련 수도권 지구당 위원장, 충청권 지방의원 등 많은 인사가 참석해 향후 이 의원의 행보에 대한 정치권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음을 반증했다. ◆ 이 의원, 노 대통령은 왜? 이 의원과 노 대통령은 그간 정치역정 면에서 각기 다른 길을 걸어왔다. 두 사람은 1987년 대선을 전후해 YS캠프에 들어가게 된다. 둘 다 법조계 출신이며 나이는 노 대통령이 두 살 많다. 이들은 지난 88년 13대 총선에서 통일민주당 공천으로 나란히 당선됐고, 민주화 및 노동운동이 한창이던 당시 여론의 관심이 집중됐던 국회 노동위에서 함께 활동했다. 그러나 이 같은 외형적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이념과 노선,스타일은 대조적이었다. 서울법대 출신으로 중도보수적 성향을 보였던 이 의원은 제도권 내에서 점진적 개혁을 도모하는 데 역점을 둔 반면 부산상고 출신인 노 대통령은 주로 파업현장을 찾아다니며 노동자 입장을 대변했다. 이때부터 둘 사이가 서먹해졌다고 한다. 상임위 활동과 관련해서도 노 대통령은 밤을 새워 자료를 찾는 모범생 스타일인 반면 이 의원은 타고난 순발력으로 정확히 핵심을 짚어내는 능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어 두 사람은 5공청문회에서 스타로 떠올랐다. 그러나 당시 온건했던 이 의원과 달리 노대통령은 전두환 전대통령의 증언석에 명패를 집어 던지는 과격성을 보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결정적으로 갈라서게 된 계기는 90년 민정·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때로 이 의원은 합당대열에 합류한 반면 노 대통령은 거부한 것으로 추후 정통성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후 두 사람의 정치운명도 극명하게 갈렸다. 이 의원은 YS 정부때인 93년 노동부장관,95년 초대 민선경기지사에 이어 97년 국민신당을 창당해 대선에 출마했다. 반면 노후보는 DJ가 이끄는 통합민주당에 들어가 92년 14대 총선,95년 부산시장 선거에서 잇따라 낙선이란 고배를 마셔야 했으며 95년 국민회의 창당에 합류하지 않고 민주당에 남은 그는 96년 15대 총선에서도 다시 낙선했다. 그러던 두 사람은 98년 국민회의에서 다시 만나게 되고 당시 노 대통령은 97년 대선 직전 국민회의에 입당했고 이 의원 98년 국민신당을 이끌고 합류했다.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 시작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이 의원은 대세론을 앞세워 높은 지지율을 보였고 노 대통령은 경선이 시작되자마자 바람을 일으키며 이 의원의 대세론을 무너뜨렸다. 이로 인해 이 두 사람의 진로는 판이하게 갈렸고, 2002년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둘은 ‘정적’으로서 승부를 펼쳐야 했다. 이 의원은 23일 대전 MBC 라디오 <시대공감>과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정치적 족쇄가 풀려 자유롭게 진로를 모색을 하고 있다”며 "자민련 안팎의 분열양태를 극복하기 위해 뜻을 같이 하는 분들과 공동의 목표를 향해 다함께 손잡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하겠다"고 정치적 행보의 시작을 거듭 강조했다. 또 중부권 신당에 대해서는 “세상이 바뀌고 있고 이에 따라 정계의 지각변동이 있을 것”이라며 “(신당추진 세력과) 만나서 토론해 작은 차이로 분열하기보다 대동단결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해 정치적 판도 변화에 이 의원이 ‘중심축’로서의 역할자로 수행할 것임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이 의원은 “신당에 참여하고 있는 무소속 정진석 의원이 재판정에 와주고 심대평 충남도지사가 축하전화 를 해왔다”며 “심 지사 또한 큰 차원에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믿고 있다”고 이를 뒷받침했다. 이 의원은 특히 행정도시건설특별법에 대해 “노 정권이 수도를 옮기겠다더니 고작 임기내 몇 조원 풀어 땅 사는데 전력하려 하고 있다”며 “행정도시는 충청권을 살리기 위해 나온 발상이 아니다”고 혹평했다. 이어 “당장 행정도시 예정지를 매입하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대덕연구단지와 청주 국제공항을 연결하는 첨단과학기술 프로젝트를 개발하는 등 새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해 노 대통령과의 또다른 마찰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의원 보좌관은 최근 이 의원의 정치적 행보 발언에 대해 “아직 대법원 판결이 남아있다”며 “이 의원께서 한마디 한 것을 가지고 언론에서 너무 과대해석 한 것 같다”라고 일각의 시각을 일축했다 한편 “정적 죽이기가 입증됐다”면서 이 의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노 대통령에 대해 전면전을 선언했지만 일단 청와대 측은 이에 대해 아직 별다른 반응은 보이고 있지 않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