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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 ‘화양연화’ 등 탐미적인 영상으로 사랑의 상처를 다루어온 왕자웨이, 미묘한 인간관계를 냉철한 시선과 참신한 언어로 변주했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의 스티븐 소더버그 , 스릴러 구조에 관음주의적 욕망과 당대의 문화상을 반영해낸 ‘욕망’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이들 세계 영화계의 거장 3인이 하나의 영화로 모였다. 이들은 ‘사랑’이라는 흔하면서도 쉽지 않은 소재를 가지고 30여분 분량씩을 만들어 옴니버스 장편 ‘에로스’를 엮어냈다.
왕자웨이가 연출한 ‘그녀의 손길’은 ‘아비정전’과 ‘화양연화’ ‘2046’ 등 전작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시대적 배경이나 화면을 이루는 의상과 배경 스타일이 흡사하다.
재단사 견습생인 샤오 장(창첸)은 고급 콜걸 화(궁리)의 치수를 재기 위해 그녀의 집을 찾아간다. 화는 어떻게 여자를 만져본 적도 없이 옷을 만들겠느냐고 묻고는,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한 첫 ‘손길’을 샤오 장에게 남긴다. 그 뒤로 샤오 장은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점차 나락의 길로 들어가는 화와 능숙한 재단사가 되는 샤오 장. 장은 화가 입을 옷들을 만들며 자신만의 사랑을 키워 나간다. 이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영화의 내용이다. 영화 속에서 시간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건너뛰지만, 왕자웨이 감독은 떨어지는 빗방울의 찰나까지 잡아내면서 그들의 감정을 한없이 느리게 붙잡아둔다.
소더버그의 단편 ‘꿈 속의 여인’엔 감독 특유의 유머가 묻어 있다. 영화의 배경은 1950년대 뉴욕. 광고회사 직원 닉(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은 매일 밤 같은 내용의 에로틱한 꿈을 꾼다. 알몸의 여자가 나타나 야릇한 몸짓을 보이는 것. 답답한 닉은 의사(앨런 아킨)를 찾고 의사는 그를 침대에 눕힌 채 꿈 속 상황을 하나씩 끄집어내게 한다. 그러나 의사는 창 밖에만 시선을 꽂은 채 딴일에만 몰두한다. 소더버그는 이 치료 아닌 치료 과정의 코미디를 흑백의 화면으로 보여준다. 이 장면이 끝난 뒤 컬러의 이야기가 다시 이어지는데, 그게 감독이 보여주고자 하는 진짜 반전의 경험이다.
이탈리아의 거장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위험한 관계’에서 감독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들은 주제 ‘에로스’와 그가 후기에 천착해 왔던 ‘소외’의 사이 어디쯤에 있는 듯하다.
여름의 끝자락. 권태기의 부부 크리스토퍼(크리스토퍼 부흐홀츠)와 클로에(레지나 넴니)는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리스토퍼는 우연히 식당에서 만난 한 여인과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게 된다. 시간이 흐르고, 낯선 여자와 크리스토퍼의 부인 클로에는 해변에서 나체로 다시 만난다. 안토니오니는 마치 그와 그녀들 사이의 불통을 그녀들 사이의 소통으로 마무리하려는 것처럼, 벌거벗고 춤추며 마주하는 두 여자의 만남으로 영화를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