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전선이 지난해 12월 유상증자를 마무리 지었다. 3000억원대 중반이라는 당초 예상에는 못 미쳤지만, 2989억원의 자금을 확보함으로써 비교적 성공을 거뒀다는 평이다. 앞서 대한전선은 무상감자를 실시하고 유상증자를 단행하기로 해 주목을 받았다. 대한전선의 이러한 결정에 일각에서는 “돈 없는 오너의 경영권 확보를 위한 눈물겨운 사투”라는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그동안 대한전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경영권 사수위해 만든 지배구조 ‘돌고 돌아가도 괜찮아’
세무조사 후 부동산에 부과받은 법인세 “안 내는 걸로”
대한전선은 지난해 7월 27일 무상감자와 유상증자 공시를 냈다. 무상감자 이후 유상증자를 단행한다는 소식에 업계는 발칵 뒤집혔다. 두 조합이 이례적이기 때문.
“복잡하다, 복잡해”
대한전선이 이러한 결정을 하게 된 데는 악화된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 유상증자를 하고 싶었지만, 낮은 주가는 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주가가 최소한 액면가 이상이어야 유상증자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대한전선의 주당 액면가는 2500원이었고, 공시 이후 주가는 30일 2260원, 31일 1925원으로 하향곡선을 탔다.
그래서 대한전선은 무상감자를 통해 자본금을 줄이고 주식가치를 높이기로 했다. 공시에 따르면, 대한전선은 7:1로 감자를 실시했다. 이는 7주를 1주로 취급하겠다는 것으로, 주주의 입장으로서는 한 주당 주식가치는 높아지지만 1주를 위해 6주를 빼앗기기 때문에 마냥 좋은 일이 아니다. 물론, 줄어드는 자본금만큼 결손금을 메울 수 있어 재무구조 개선이라는 효과를 가져 오기도 한다.
이후 예고대로 유상증자가 실시됐다. 주주들은 자신의 주식이 희석되는 데 대해 불만을 토로했지만, 결과적으로 유상증자는 성공적이었다. 주주배정 후 실권주 일반공모방식으로 진행된 유상증자는 구주주 73%, 실권율 26.97%(경쟁률 0.9679대1)을 기록했고, 이로 인해 대한전선은 2989억원을 확보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설윤석 대한전선 사장의 경영권 확보를 위한 눈물겨운 사투가 나타났다. 앞서 말했듯이 유상증자를 하게 되면 주식이 희석되기 때문에 최대주주도 변경될 수 있다. 설 사장이 최대주주로서 경영권을 유지하려면, 새로 발행된 주식을 사야 했다. 당시 경영권 유지를 위해 구주주들이 필요했던 돈은 약 800억원. 그러나 설 사장이 조달하기엔 벅찬 금액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설 사장은 대한광통신과 큐씨피6호프로젝트(PEF)를 통해 간접 경영권을 확보하는 그림을 그렸다. 설 사장→대한전선→대한광통신의 지배구조를 설 사장→큐씨피6호프로젝트(PEF)→대한광통신→대한전선으로 바꾸는 작업을 한 것이다.

먼저 설 사장은 대청기업과 함께 큐씨피6호프로젝트(PEF)에 보유지분 42.61%를 매각했다. 큐씨피6호프로젝트(PEF)가 대한광통신의 최대주주가 된 것. 이후 대한광통신은 대한전선의 유상증자에 참여해 최대주주 자격을 얻게 됐고, 큐씨피6호프로젝트(PEF)→대한광통신→대한전선의 연결고리가 만들어졌다. 여기까지만보면 대한전선에 대한 설 사장의 경영권은 사라진다.
이에 설 사장은 큐씨피6호프로젝트(PEF)에 290억원을 출자해 큐씨피6호프로젝트(PEF)→대한광통신→대한전선 구조의 상위에 앉는 그림도 그린다. 큐씨피6호프로젝트(PEF)가 사모펀드의 특성 상 단순 재무적 투자자(FI)에 불과하고, 설 사장이 최대투자자이기 때문에 경영권에 변화가 없는 구조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한 발짝 더 나아가 설 사장은 3년 뒤 대한광통신 지분을 되살 수 있다는 내용의 콜옵션과 우선매수권이라는 조건도 걸었다. 복잡한 지배구조 확립에 이어 이중 장치까지 걸어놓음으로써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사수하려고 한 절박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믿었건만, 뒷통수를
설 사장이 이렇게까지 해야 됐던 것은 전문경영인 체제의 실패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전선은 2004년 고 설원량 회장의 사망 이후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됐다. 23살의 어린 아들 설 사장(당시 학생신분)이 회사를 이끌기에는 무리가 따랐던 것. 이에 대한전선의 살림은 임종욱 전 부회장이 꾸리게 된다.
하지만 전문경영인 체제는 안정 대신 균열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사업다각화를 추진하면서 재무구조 악화가 시작됐기 때문. 임 전 부회장이 진두지휘할 당시 대한전선은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며, M&A 시장에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한전선은 2002년 쌍방울 인수를 시작으로, 2006년에는 한국렌탈, 2007년에는 건설업체인 영조주택과 명지건설을 안았다. 또 세계 전선업체 선두주자 이탈리아 프리즈미안 지분 9.9%를 확보하기 위해 5000억원을 쏟아 부은 데 이어 2008년에는 남광토건, 온세텔레콤 등을 사들였다. 이를 위해 투자한 돈만 총 1조 5000억원 이상.
그러나 사업다각화가 무리하게 추진됐다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빚을 져가면서 진행해 재무구조가 급격히 악화된 것이다. 여기에 글로벌 경제위기까지 겹치면서 대한전선은 암흑기를 걷게 됐다. 믿고 회사를 맡겼던 인물, 임 부회장의 횡령은 충격을 가중시켰다.
임 부회장은 회사자금 50억원을 횡령하고, 회사에 280억원 가량의 손실을 입힌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아 법정 구속됐다. 검찰조사 결과 임 전 부회장은 회사자금을 개인적인 용도에 쓰고, 지인들의 사업을 도와주기 위해 회사에 보증을 서게 하는 등 회사에 막대한 손실을 끼친 것으로 드러났다.
임 전 부회장은 차명으로 소유한 회사의 투자금 회수가 어렵게 되자 대한전선 계열사 자금을 끌어다 보전해준 혐의를 받았고, 지인 유모씨가 운영하는 회사의 170억원에 달하는 대출을 대한전선 계열사가 지급보증하게 시킨 혐의도 받았다.
이 외에도 인수과정에서 대주주인 저축은행 등으로부터 600억원 이상의 부당대출을 받도록 하는 등의 혐의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대주주에 대한 대출을 금지하는 상호저축은행법을 위반한 것. 임 전 부회장의 법정구속으로 인해 대한전선은 주가가 12% 하락하는 등 악재에 연달아 휩싸이게 됐다.
팔고, 팔고, 또 팔고
악화된 재무구조를 안정적으로 돌리기 위해 대한전선은 우선 불렸던 몸집을 차례로 줄여나가기로 했다. 이에 하나은행과 재무구조개선약정을 맺고, 2조5000억원 수준의 차입금을 7000억원대로 줄이기로 한다. 대한전선의 매각사는 다음과 같다.
대한전선은 2008년 서울 사옥을 950억원에 팔아 유동성을 확보한 뒤, 2009년에는 대한ST 지분 260만4000주를 포스코에 매각해 700~800억원 수준의 자금을 확보했다. 대한전선은 이후에도 한국렌탈, 트라이브렌즈를 차례로 매각해 1215억원의 자금을 확보했고, 노벨리스코리아의 지분도 매각해 1396억원을 추가 확보하게 된다.
또한 이탈리아 전선업체 프리즈미안에 투자한 금융상품 일부도 매각해 2000억원을 확보했으며, 오너일가가 아끼는 것으로 알려진 무주리조트도 부영주택에 매각했다. 무주리조트의 매각으로 대한전선이 얻은 자금은 1360억원이었다. 최근에는 서울 강남지역의 빌딩과 신약개발 사업 및 미국의 크라운 바이오사이언스 지분 5.57%도 매각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부동산과 계열사 등을 정리해가며 재무안정화를 꾀한 것도 몇 년째. 그 과정에서 대한전선을 둘러싼 잡음도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대한전선은 부동산 매각상황을 공시하지 않아 불성실공시법인에 지정됐고, 거래소로부터 800만원을 부과 받았다. 서울 남부터미널과 시흥동 용지의 매각이 지연되고 있다는 것을 공시하지 않은 것이다. 대한전선이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앞서 대한전선은 2003년에도 타 법인에 100억원을 빌려준 것을 공시하지 않았고, 2009년에도 해외 자회사 증자에 참여해 300억원대 지분을 확보하게 된 사실을 공시하지 않아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된 바 있다.
이런 가운데 대한전선이 세무조사 이후 상당한 법인세를 부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세무조사의 배경을 두고 일각에서는 대한전선이 부동산 및 계열사를 끊임없이 정리하자 그 집행과정에 의문을 품고, 이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기 위해 실시한 세무조사가 아니냐는 추측을 내놨다.
그러나 대한전선 관계자는 “정기 세무조사는 어느 기업이든 받는 것”이라며 “부동산 건에 관련해서는 재심의 및 재조사를 통해 납부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고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대한전선이 무상감자 후 유상증자라는 파격적인 선택을 한 데에는 끊임없이 부동산 및 계열사를 팔았지만 재무상태안정화를 이루기는 부족했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최후의 선택이었던 셈. 최근 대한전선은 연초부터 해외시장의 대규모 수주 성공 등 낭보를 연달아 전해왔다. 다양한 자구노력에 힘입어 대한전선이 재도약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박미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