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 부회장 이사직 사퇴, 잠시 동안의 ‘몸 피하기’일 뿐
재벌 총수는 등기이사 아니어도 계속 경영 참여 가능해
신세계 그룹이 창립 이후 최대 위기에 몰렸다. 베이커리(제빵) 계열사 부당지원 혐의로 검찰에 소환됐고 국정감사와 청문회에 출석하지 않아 정식 재판에도 회부됐으며 이마트의 노조설립 방해와 이를 위한 직원 사찰 의혹으로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 또 인천터미널 부지 매매건과 관련해 인천시와 복잡한 소송전에도 휘말려있다. 위기에 몰린 신세계그룹의 정용진 부회장은 등기이사직을 내려놓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정 부회장의 사임을 두고 오너로써의 권한은 모두 누리면서 책임은 피해가려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흔들흔들’, 위기에 몰린 신세계그룹
신세계그룹의 첫 번째 위기는 베이커리 계열사에 대한 부당지원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는 것이다. 신세계와 이마트는 지난해 10월 베이커리 계열사인 신세계SVN에 판매수수료를 과소 책정하는 등의 방법으로 62억 원을 부당지원한 혐의로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40억 원의 과징금을 받은 바 있다. 이에 경제개혁연대 등이 정 부회장과 신세계 임원 3명을 배임 혐의로 고발했고,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이번에 검찰조사를 받았다. 또 정 부회장은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과 함께 국회 국정감사와 청문회에 출석하지 않은 혐의로 정식 재판에도 회부된 상황이다.
공정위에 따르면 2009년 신세계 경영전략실은 신세계SVN의 베이커리 사업 매출이 급격하게 떨어지자 그룹 계열사 등을 동원해 지원을 결정했다. 신세계백화점에 입점한 신세계SVN과 조선호텔의 델리 브랜드 베끼아에누보의 판매수수료율을 다른 브랜드의 평균 25.4%보다 낮은 15%로 책정해 12억8300만원의 부당이익을 챙겨줬다. 또한 2010년 2월부터 지난해 2월까지 이마트 내 슈퍼프라임피자의 판매수수료율을 5%에서 1%로 낮게 책정해 12억9800만원의 부당이익을 내기도 했다. 신세계와 이마트, 에브리데이리테일 역시 각 매장에 입점한 베이커리 브랜드 데이엔데이의 판매수수료를 낮게 책정해 36억3600만원의 부당이익을 챙겨줬다고 밝혀졌다.
이마트 노조탄압과 관련된 압수수색 등의 검찰의 수사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 신세계그룹의 두 번째 위기다. 신세계 이마트는 ‘무노조 경영’을 고수해 온 가운데, 노조를 결성할 가능성이 높은 직원들을 ‘문제 인물’로 지정하고 그 주변 인물들까지 수십 명을 몇 년 동안 사찰해온 사실이 드러났다. 이에 서울지방노동청은 직원 사찰, 노동조합 결성 방해 등 불법 노동행위 혐의를 받고 있는 신세계 이마트의 본사와 지점 13곳을 압수수색했다.
민주통합당 노웅래·장하나 의원이 공개한 이마트 내부 문건에 따르면, 지난 해 10월 이마트 노조가 결성되기 이전부터 이마트는 직원들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2010년 하반기부터는 이들의 동향을 담은 문서를 작성해 인사·노무 담당자 간에 공유하면서 조직적으로 관리해온 것으로 나타났다. 이 문건에는 노조를 결성한 전수찬 노조위원장과 노조 관련자 2명, 그리고 이들과 친분 관계에 있는 인물 34명에 대한 내용들이 담겨있다. 게다가 협력업체를 포함한 1만 5천여 명에 이르는 전 직원의 개인정보를 이용해 민주노총 혹은 한국노총 등 노조단체 홈페이지에 가입했는지 여부를 확인했고, 실제로 이마트는 노조단체 홈페이지에 가입한 직원에게 징계를 내리기도 했다고 밝혀졌다.
신세계그룹의 위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인천시와 인천터미널 매각에 대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높은 이윤으로 알짜배기 매장 중 하나였던 인천터미널점을 롯데에 넘겨줘야 될 처지인 것이다.
이렇다보니 신세계그룹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대책조차 세우지 못할 정도로 당황스러워 하고 있다. 그래서 책임회피라는 비판을 받으면서까지 정 부회장의 사임을 강행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일단 피하고 보자”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등기이사직을 전격 사퇴함에 있어 잇단 검찰조사에 부담을 느껴 책임을 회피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등기이사는 이사회에 참석해 주요 경영 사안에 대한 의사결정을 내리며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직책이다. 특히 법령이나 정관에 위반된 행위를 하거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경우 회사에 대해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경영을 외면한다는 논란이 일자, 신세계 그룹은 “검찰 조사의 부담 및 책임을 피하려는 의도는 없다. 3년 임기가 다음달 끝나는 상황이라 예정대로 실행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재계는 정 부회장이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기업경영 책임까지 지는 것은 부담스럽다고 스스로 판단했거나,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경영 문제를 추가로 책임질 수 있는 상황은 피하자는 의도로 보고 있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재계의 오너들이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것도 한몫 했다고 분석된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공약인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집단소송제’가 도입될 경우 등기이사 부담은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또한 재계 오너들이 잇달아 법정 구속되고 대기업 등기임원 연봉을 의무적으로 공개하는 방안이 국회에서 나오는 등 재벌을 향한 정치·사회적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재벌개혁을 비롯한 경제민주화와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높아지면서 재벌 오너가 경영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전문경영인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는 추세다.
일각에서는 재벌 오너들이 등기이사에서 물러나는 것은 재벌을 압박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틈타 잠시 몸을 피하는 임시방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그룹 총수는 등기이사를 맡지 않더라도 경영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정 부회장은 등기이사에서 사퇴해도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신세계 관계자는 “각 계열사 전문 경영인들이 기존 사업을 맡고 정 부회장은 신성장 동력 등 그룹의 미래를 책임지는 사업 영역을 발굴하는 작업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부당거래, 노조탄압 등으로 기업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은 신세계그룹은 정 부회장의 등기이사 사퇴로 인해 ‘책임회피’라는 불명예를 함께 안게 됐다. 이는 법적인 문제보다 ‘비윤리적인 기업’으로 낙인찍힐 수 있어 신세계그룹의 고민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 부회장의 사내이사 사퇴가 올 주총에서 임기가 끝나는 다른 대기업 오너 경영인들의 거취에도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