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 당선인이 ‘대통령의 딸’이 아닌 ‘정치인 박근혜’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때는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발생할 당시였다.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대선캠프 고문을 맡으며 정계에 입문한 박 당선인은 1998년 대구 달성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와 관련해 박 당선인은 “IMF 위기에 국민들이 고통을 겪는 것을 보고 개인 자격으로는 도움을 드릴 수 없다고 생각해 정치를 시작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본격적으로 박 당선인이 대권주자로 부상한 때는 일명 ‘천막당사’ 시대였다. 박 당선인은 한나라당이 대선패배에 이어 차떼기 사건,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위기에 처하자 당 대표를 맡아 천안 연수원 국가헌납하는 등 당 쇄신작업을 이끌었다. 여의도 중소기업전시장 부지에 ‘천막당사’를 세우고 국민에 눈물로 사죄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존폐위기에 처했던 한나라당은 17대 총선에서 121석을 확보하는 등 기적적으로 기사회생한다.
한나라당 내에서 입지를 탄탄히 넓혀가던 박 당선인에게도 시련은 찾아왔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경선에서 이명박 당시 후보에게 석패했던 것이다. 당시 박 당선인은 결과에 승복하고 지원유세에 나서며 양분된 당의 힘을 합쳤다. 그러나 ‘친이계-친박계’의 갈등은 2008년 총선 공천에서 친박계가 대거 탈락하면서 또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 박 당선인은 한나라당에 남았지만, 친박계가 대거 탈당해 ‘친박연대’를 창당하는 등 총선을 앞두고 이들의 갈등은 절정에 달했다.
잠시 몸을 낮추던 박 당선인이 다시 한번 한나라당의 전면에 나선 때는 2011년이다. 당시 서울시장 보궐선거 과정에서 디도스 의혹이 제기되는 등 한나라당은 사면초가에 빠져있었다. 홍준표 대표는 논란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고, 박 당선인은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출돼 또다시 당의 구원투수로서 발판한다. 이때 박 당선인은 당명을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바꾸는 등 획기적인 개혁에 나섰고, 패배가 점쳐졌던 19대 총선에서 152석을 획득하는 등 ‘선거의 여왕’ 위력을 입증했다.
박 당선인은 이러한 기세를 이어가 대선경선에 재도전했고, 압도적인 지지율(84%)을 기록하며 새누리당의 대선후보가 된다. 그리고 대선에서 박 당선인은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초박빙 접전을 펼친 끝에 51.8%와 48%의 지지율을 얻으며 대통령에 당선됐다. 오는 25일은 박 당선인이 ‘헌정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