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당선인은 대학 졸업 후 1974년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그해 8월15일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문세광에게 저격당해 숨지자 유학생활을 접고 급히 귀국했다. 그리고 어머니 장례식을 치른 뒤 일주일도 안 돼 퍼스트레이디 직무대행을 시작했다. 그때 나이 22세였다. ‘영부인배 쟁탈 어머니 배구대회’가 퍼스트레이디 자격으로 참석한 박 당선인의 첫 일정이었다. 박 당선인은 당시 일기에 “날카로운 칼이 심장 깊숙이 꽂힌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고 적었다.
1974년 걸스카우트 명예총재를 맡은 박 당선인은 새마을운동 정신을 이어가자는 의미로 ‘새마음운동’을 전개하며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영세한 기업과 소외된 계층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토시찰이나 산업현장을 방문할 때 함께 이를 수행하기도 했다.
1979년 주한미군 철수를 두고 미묘한 시점에 지미 카터 미국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주한미군철수 계획이 취소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이때 박 당선인은 카터의 부인 로잘린과 따로 만난 자리에서 북한의 위협과 한국의 특수성을 설명했다. 로잘린은 나중에 인터뷰에서 박 당선인과 나눈 대화를 남편에게 전달해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매일 아버지와의 아침식사 때 박 당선인은 조간신문을 읽어주며 주요 현안에 대한 박 전 대통령의 생각을 물었고 자기 의견을 얘기했다. 주제는 국방·외교 등으로 넓어졌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박 전 대통령의 큰딸이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1979년 10월 27일 새벽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들은 박 당선인은 그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고 기억했다. 김계원에게 저격 당시 상황을 간단히 들은 박 당선인은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고, 김계원은 “계엄령이 선포됐습니다”라고 답했다. 장례식은 9일간 국장(國葬)으로 치러졌고 박 당선인은 청와대 대접견실에 마련된 빈소에서 문상객을 맞았다.
1979년 11월 27세의 박 당선인은 근령·지만 두 동생을 데리고 신당동 사저로 돌아갔다. 트렁크 6개가 이삿짐 전부였다. 박 당선인은 “그때부터 한 집안의 가장(家長)이 돼야 했다”고 말했다.
약 5년여의 시간동안 박근혜 당선인은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삶을 대신 살아야 했다.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아버지의 국정 임무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항상 긴장하며 살았다. 일각에서는 이때의 경험이 박근혜 당선인이 정계에 들어서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됐을 것으로 분석했다. 청와대에서 직무수행을 해봤던 경험과 부모님의 못 다 이룬 꿈을 위해서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