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레마에 빠진 기초선거 無공천
여야 정치권이 지난 대선에서 약속한 ‘기초자치단체장 및 기초의원 정당공천제 폐지’가 4.24 재보궐선거의 쟁점으로 확산되고 있다. 지난해 18대 대선 과정에서 여야 대선후보들은 정당 개혁의 핵심을 공천 개혁이라고 밝히며 기초의원과 기초단체장의 정당공천 폐지를 약속했다. 대선 당시 안철수 무소속 대선 후보의 새 정치 바람과 정치개혁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거세지며 정치권이 기득권 포기차원에서 공천폐지라는 해법을 내세운 것이다.
여야, ‘無공천’ 법제화 한목소리 그러나 실천은?
정당공천 폐지 정치권 안팎 극심한 논란만 가중
내년 6월 지방선거 영향력 등 미온적 입장 표명
국민과 기초단체장들의 정당공천폐지 여론이 드높지만 막상 정치권은 4.24 재보선을 앞두고 기득권을 모두 포기한 채 이를 현실화하기에 힘들어 하는 눈치다. 국회의원들이 스스로 이같은 기득권을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은 정당공천제 폐지에 공감을 표시하고 있지만 실행부분에 있어서는 뒤로 한걸음씩 물러서 있는 상황이다.당장 4월 재보선 뿐만 아니라 내년 6월에 있을 지방선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도 있다. 이번 선거에서 정당공천이 폐지되면 내년 지방선거에서 전면폐지가 가능하지만 지역 정치권의 불만 등 여러 이유를 생각하며 미온적인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새누리당 공천심사위원회는 지난 19일 4월 재·보선 기초단체장 및 기초의원에 대해 ‘무공천’ 방침을 결정했다가 당 공심위의 발표 하루만인 지난 20일 일부 최고위원들의 반발로 전면 유보된 까닭도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민주당도 이번 4월 재보선에서의 정당공천제 폐지 여부에 대해 방안을 생각하고 있지만 현행대로 공천제를 적용하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지는 모습이다. 정당공천제 폐지 등 혁신안을 논의하는 당 정치혁신위원회가 최근 발표한 혁신안에는 공천제 폐지 안건이 누락돼 대선 공약 실천을 위한 의지가 후퇴했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기초선거 공천 폐지’ 20여년간 논란
18대국회 개정안 상임위 상정 안돼
지방선거에서 정당공천 폐지 논란은 1991년 지방자치 부활부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논쟁이다. 정당 공천 문제 탓에 국회가 파행됐고, 지방선거가 연기되는 불상사도 발생했다. 1995년 지방선거부터 기초의원 선거에서는 정당공천을 배제하고, 반면 광역단체장, 광역의원, 기초단체장 선거에는 정당공천을 허용하는 타협안이 나와 실시됐다. 그러나 2006년에 기초의원 선거의 정당공천이 다시 부활됐다.
이에 따라 정치권 안팎에서는 광역단체장을 제외한 광역·기초의원 및 기초단체장의 공천 폐지가 쟁점이 됐고, 지난 18대 국회에서는 정당공천 폐지와 자치구 의회 폐지를 둘러싸고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합의를 도출하지는 못했다.
이와 함께 새누리당 정몽준·이재오 의원이 지난해 9월 기초단체장 및 광역의원, 기초의원에 대한 정당공천 폐지를 내용으로 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끝내 소관 상임위에 상정되지 못하는 불운을 맞았다.
특히 4.24재보선을 앞두고 박근혜 대통령의 지방선거 정당공천 폐지 약속을 새누리당 공천심사위원회가 실시하려 했지만, 최고위원회에서 제동이 걸리며 오히려 논란만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정당이 가진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이며 이에 대해 민주당 역시 적극적으로 입장과 행동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無공천 대선공약 지켜야 VS 정치현실과 배치
무공천을 반대하는 새누리당 심재철 의원은 “우리만 공천을 안 하는 것은 자살하자는 것”, “민주당 천하를 스스로 만들어 진상하는 꼴” 등 격한 발언을 쏟아내며 반대했고, “공천하느냐, 마느냐는 중요한 당무로 최고위 의결 사항”이라고 최고위 권한을 내세우기도 했다.
유기준 최고위원도 “무공천이 개혁인지 개악(改惡)인지 검증된 바 없다”며 현재 정치현실과 맞지 않음을 강조했다.
이에 재보선 공천심사위를 이끄는 서병수 사무총장은 “공천권은 공심위의 권한”임을 내세우며 “공심위의 결정을 존중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서 사무총장은 최고위원회의에서 심, 유 최고위원의 거듭된 반대에 “‘무공천’으로 의결 했을 때 공심위원들 자체 생각만으로 결론을 내린 게 아니라 해당 지역 당협위원장과 논의를 거쳤고 양해를 얻어 무공천을 하기로 결론을 내린 것”이라고 강변했다. 또 “정치쇄신이라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문제는 한 번도 실천해보지 못했다는 것”이라며 “실천에 옮기는 게 중요하다고 최고위에서 의견을 주셨다. 총·대선에서 공약했고 국민과의 약속은 정당간의 약속보다 더 우선시해야 한다”고 거듭 ‘무공천’ 입장을 천명했다.
심, 유 최고위원이 ‘중앙당 공천 폐지’를 강하게 반대를 하는 것은 기초의원이 무공천이 될 경우, 새누리당 당원인 후보자가 탈당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당의 조직력을 바탕으로 하는 선거를 치르는 야당에 패배할 수 있는 원인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공천을 통해 여권후보를 정해 선거에 임했으나 공천이 폐지되면 서로 여당의 추천을 받았다며 여권후보 난립이라는 혼선도 빚어질 것이라 말했다.
이와 관련 서 사무총장은 “무공천하면 무소속으로 해서 나가지만 정당경력을 표시할 수 있고 지역 당원들이 원하면 당원들이 지지 의사를 표명할 수 있다고 공직선거법 법조항에 있다”고 해명했다.
국회의원 의지에 법 개정 운명
기초단체장 등 공천폐지 촉구 나서
중앙당 공천 폐지는 그동안 지방선거 공천과정에서 국회의원이나 당협위원장의 영향력으로 이른바 ‘공천장사’의 폐해가 지적됐기 때문이다. 중앙당의 입김으로 지방자치의 의미가 퇴색되고 풀뿌리 민주주의의 발전을 오히려 저해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급작스런 폐지는 오히려 중앙정치에 예속된 지방정치에 공보다는 과가 더 많을 수 있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관련법 개정을 먼저 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와 관련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공직선거법 개정을 한 목소리로 내고 있다.
새누리당 이상일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지난해 대선 때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 후보에 대한 정당 공천을 폐지하는 정치쇄신을 이루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며 “이제 기초자치단체장과 기초의원 후보에 대한 정당의 무공천을 법제화하는 문제를 국회에서 적극적으로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박용진 대변인도 “국회논의를 거쳐 법 개정을 해야 할 사안이므로 새누리당은 편의적이고 자의적인 재보궐 선거 ‘무공천’ 방침으로 무책임한 논란을 일삼지 말고 관련법 개정에 속히 나설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여야 대변인들의 이 같은 입장표명에도 불구하고 공직선거법 개정이 생각만큼 빠른 결론을 내릴지에 대해서는 여야모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는 입법권이 있는 국회의원들의 법개정 의지가 작용해야 기초지방선거 공천폐지가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새누리당 내부에서 반발이 만만치 않고, 민주당도 소극적인 입장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때 여야가 법안 개정을 합의하기는 용이해 보이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정당공천 폐지는 정치권 안팎에서 논란만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여론은 이같은 정치권의 기득권 주장과 달리 폐지쪽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한 여론조사 기관이 이에 대해 조사한 결과 전국 230개 단체장 가운데 85%가 정당 공천제 폐지에 찬성을 나타냈다. 국민들의 경우는 51.2%가 ‘공천권을 두고 각종 폐해가 심각하므로 폐지해야 한다’고 답변했고, 28.1%는 ‘잘 모르겠다’, 20.7%는 ‘정당정치에 입각해 현행대로 유지해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전국 기초단체장들은 기초단체 선거에서 정당공천폐지를 강력히 요구했다.
‘전국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회장 배덕광 해운대구청장)는 지난 22일 시도지역회장 17명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충북도 청남대에서 민선5기 3차년도 제5차 공동회장단회의를 열고 “풀뿌리 지방자치 정착을 위해 국민과 약속한 정당공천폐지를 반드시 이행하라”고 정치권에 촉구했다.
또 전국 시·군·자치구의회의장협의회(회장:김인배 삼척시의장)도 지난 25일 기초단체장 및 기초의원 정당공천제 폐지를 위한 정책토론회를 열고 내년 지방선거 이전에 정당공천제 폐지 법안이 국회를 통과될 수 있도록 하라고 촉구했다. 전국 시·군·자치구의회의장협의회와 전국 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 공동 주관으로 열린 이날 토론회에서는 지난해 대선 당시 공약으로 내세웠던 기초단체장·기초의원의 정당공천제를 폐지하고 국민에게 공천권을 주겠다는 내용으로 법 개정 및 실천사항까지 발표한 약속을 거론하며 여야 정치권이 법 개정 노력과 대국민 홍보를 통해 정당공천제 폐지에 적극 동참하고 내년 6월 지방선거 이전에 정당공천제가 폐지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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