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법안은 부처간 알력으로 있으나 마나
‘사행성’ 우려보다는 기금 마련이 우선
굳이 미국의 라스베이거스나 대한민국 강원랜드를 가지 않더라도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도박을 즐기는 세상이 왔다. 경마장, 경륜, 성인오락실 등에서부터 불법 도박하우스까지...온통 너나할 것 없이 도박을 권하는 사회가 되어버린 요지경 속을 들여다 본다.
“지금부터 단도박 친목모임을 시작하겠습니다.” 늦은 저녁,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의 한 성당에 'ㅎ'단도박모임 회원 12명이 모였다. 3시간 동안 계속된 모임에서 이들은 자신이 카지노, 경마, 경륜, 경정 등 도박중독자임을 시인하며, 도박중독을 이겨내기 위해 솔직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단도박모임에 참가한다고 도박중독증이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이날 참석한 12명 중 7명은 다시 도박에 손을 댔다. 그만큼 도박중독은 쉽게 치유할 수 없는 병이다. 이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완전히 치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병세를 억누르는 것일 뿐입니다.” 모임에 참여한 ‘홍은동 이씨’의 이야기다. 30대 후반인 홍은동 이씨는 사회생활을 시작한 20대 중반부터 도박인생을 시작했다. 친구를 따라 해본 슬롯머신이 화근이었다. 전세자금을 다 날리고, 이혼까지 당했다.
이로 인한 충격으로 도박을 7년 정도 끊었지만 완전히 끊을 수는 없었다. 또 다시 직장동료를 따라 카드게임에 빠진 것이다. 물론 그동안 벌어놨던 돈도 전부 다 날렸다. 카드게임을 하던 그는 카드게임에서 발생하는 시비에 진저리를 쳤다.
그 이후로는 우연히 간 경마장이 마음에 들었다. 뒤끝없이 혼자서 게임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6년전 재혼한 부인이 임신한 가운데, 경마에 빠져 부인이 조산했다. 하지만 그는 아이가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다시 경마장을 찾았다.
■ 주머니에서 돈 빼가는 ‘레저’?
2001년 단도박모임을 알게 된 부인의 손에 끌려 모임에 참석한 그였지만 도박중독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손쉽게 도박을 할 수 있게 된 주변 여건 탓이었다. 경륜과 경정이 생긴 뒤로는 차례로 손을 댔다.
수·목에는 경정, 금요일에는 경륜, 토·일에는 경륜이나 경마를 하는 식이었다. 곳곳에 스크린 경마 등 불법경마가 등장하면서부터는 1주일 내내 경마에 푹 빠지기도 했다. 지난해 5월부터 3개월 동안 정신병원 신세도 졌다.
이후에도 도박을 하고 싶은 충동에 안절부절 못할 때가 많다. 거액이 눈앞에서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그는 단도박 모임에 참가, 다른 중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는 완전히 치유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도박을 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이를 억누르려고 최대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도박으로 날린 돈은 7억여원. 그는 이 돈을 가져간 국가를 그리 곱게 보지 않는다. 그는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사행행위를 부추기고, 빈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가면서 말로는 레저라고 이야기하는 것 아니냐” “레저라면 사행성을 줄여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비난했다.
사행성을 줄이려고 게임당 베팅 한도를 경마는 10만원, 경륜·경정은 5만원으로 낮췄지만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 창구에서 발권한 다음 다른 창구에서도 얼마든지 발권이 가능하다. 그는 한 게임에 300만원 정도를 베팅했다가 날린 적도 많았다.
황당했던 것은 한도를 초과해서 표를 산 뒤, 당첨된 경우 10장이라도 상금을 준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는 당첨된 10장을 창구로 가져가 전부 상금으로 돌려받기도 했다. 한국마사회 관계자는 “한도를 지키게 하려면 ID카드를 만들어서 이를 근거로 발권하는 수밖에 없다”면서 “그러면 매출이 줄어들 것”이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매출이 줄어드는 것은 한국마사회 등 시행기관은 물론이고 정부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수익 일부를 기금과 세금으로 가져가기 때문이다. 경마의 경우 한국마사회는 주무부처인 농림부와 이익금 일부를 축산발전기금과 농어촌 복지사업에 내놓겠다는 경영계약을 한다. 만약 매출이 줄어들어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 마사회는 직간접적으로 압박을 받게 된다.
한국마사회 관계자는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하면 회장은 무능한 경영인이 되고, 구조조정 등 경영혁신방안을 내놓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다른 부처도 마찬가지다. 카지노와 경륜·경정을 관리하는 문화관광부는 5대 기금 중 4대 기금의 50~80%를 사행산업을 통해 조달한다. 결국 정부와 산하단체가 기금 마련을 핑계로 도박중독을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마사회 관계자는 “경마는 도박성이 가마될 때 재미가 커진다”며 “경마선진국처럼 베팅 한도를 없애야 한다”는 말도 했다. 한국레저산업연구소에 따르면 사행산업으로 정부와 시행기관이 거둬들인 수입의 규모는 지난해 4조8700억여원으로 1998년의 1조980억원에 비해 4배 이상 뛰었다. 같은 기간 입장객이 2배 정도 증가했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금액이다.
매일 133억여원의 돈이 국민의 호주머니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정부는 이 돈을 국민복지, 청소년복지, 환경, 문화, 예술 정책 등에 지출한다. 물론 이 모든 돈이 도박중독자의 주머니에서 나갔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도박중독자가 큰 돈을 베팅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도박중독자가 사행산업의 주된 고객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지난해 마사회가 발표한 용역보고서 ‘도박중독 척도 개발 및 발병률 조사’에 따르면 경마와 경륜, 카지노 고객 가운데 문제성 혹은 병적 도박자의 비율은 각각 34%, 39.5%, 49.1%였다. 2002년 발표된 자료를 보면 전국 성인남녀의 9.28%(약 320만명)이 도박으로 문제를 겪고 있으며 3.8%(약 32만명)가 병적 도박자라고 추정할 수 있다.
■ “차라리 누가 날 죽여줬으면”
이처럼 도박중독자가 많아진 것은 쉽게 사행산업장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경마의 경우 과천과 제주 등의 본장 이외에 장외발매소가 30곳 있다.
경륜장 본장은 3군데, 경정장 본장은 1군데지만 장외발매소는 경륜장이 15군데, 경정장이 8군데다. 단도박모임에서 만난 홍은동 이씨도 본장에 간 적은 별로 없다. 주변에서 쉽게 장외발매소에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본장과 달리 장외발매소는 좁은 공간에서 베팅만을 목적으로 한다. 이런 까닭에 사행성이 높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문제는 장외발매소가 더 늘어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현재 여러 지방에서 장외발매소 건립을 추진 중이다.
이는 세수 확대를 위한 지방자치단체와 매출의 약 70% 이상을 장외발매소에서 거둬들이고 있는 각 기관, 여기서 각 기금을 마련하고 있는 정부부처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현재 장외발매소의 신규개설은 규제가 없다.
단도박 모임에서 만난 한 도박중독자는 “차라리 누가 날 죽여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경제적·정신적 피해를 봤을 뿐 아니라 언제 재발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살도 시도했다는 한 도박중독자는 “단도박모임에 나오면서 도박 충동을 억제하고 있는 지금도 수면제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사정은 이렇게 심각한데 그동안 도박중독을 막기 위한 국가차원의 노력은 많지 않았다. 사행산업 기관별로 치료·상담센터를 운영하고 있지만 턱없이 모자란 인력과 시설, 상담건수 등이 지적되고 있다. 그나마 국가차원에는 전혀 대응이 없었다.
손봉숙 민주당 의원이 지난 2월 대정부 질의에서 사행산업의 문제점을 지적하자, 정부는 부랴부랴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를 바탕으로 국무조정실은 ‘사행산업 건전화 방안’을 내놓았다. 여기서 정부는 “사행산업 전반에 대한 부작용 실태 파악이 미흡했고 전문적 연구도 부재했을 뿐 아니라 정부 내의 종합대책이나 건전화 방안에 대한 논의도 전무한 실정”이라고 인정했다.
사행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한 국무조정실은 ▲사행산업 조사연구센터 설립 ▲사행산업감독위원회 설치 ▲도박중독 예방·치료 대책 마련 등의 대책을 내놓았다.
■ 갈팡질팡 ‘사행산업 건전화 방안’
이런 내용을 종합적으로 담은 것이 6월 28일 열린우리당 이경숙 의원 등이 발의한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법’이다.
이 법은 당초 문화관광부와 농림부, 복권위원회 등 관계기관의 협의를 거쳐 문광부가 마련한 법안 내용에 기초한 것으로 도박산업의 총량 규제 등을 담고 있다. 사행산업에 대해 손놓고 있던 정부가 이런 법안을 마련했다는 점은 인정해줄 만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이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법에 반대하는 이가 많다. 원래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는 ▲인허가에 대한 사전심사 ▲사업자의 사행성에 대한 통합적인 지도·감독 ▲벌금 및 과태료 부과 등 실질적인 권한을 가진 위원회로 추진됐다.
또한 각 부처와 지자체 등의 이견을 조정하기 위해 국무총리실 산하 위원회로 추진됐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부처간의 이견 때문에 문광부 산하에 설치됐고 협의·조정 또는 권고 기능만 갖게 됐다. 문광부 산하 위원회가 농림부 산하의 마사회는 물론 국무총리실 산하의 복권위원회까지 관리하게 되는 셈이다.
이에 대해 법안을 발의한 이경숙 의원실 관계자는 “각 부처가 한발짝도 뒤로 물러서려고 하지 않는 와중에 나온 것이 이번 법안”이라며 부처간의 이기주의로 인해 알맹이 없는 법안이 된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 관계자는 “이번에 통과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만큼 일단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행산업 관련 논의의 실마리를 제공한 손봉숙 의원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는 국회에 계류 중인 사행산업 관련법안을 개별적으로 처리하고,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의 문제점을 고친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
손봉숙 의원실 관계자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법안에 인허가권과 처벌에 대한 내용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며 “이런 까닭에 공동발의를 거부하고 대체법안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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