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해커집단인 ‘어나니머스’가 공개한 북한의 ‘우리민족끼리’ 사이트의 회원 정보에 사회적 파장이 커졌다. 사실관계가 명확치 않은 상황에서 수사당국은 곧바로 내사에 착수했다. 과거 수사당국은 불법으로 수집한 정보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이번 경우 내사에 바로 착수하면서 법적용에 있어 ‘이중잣대’ 라는 논란을 불렀다. 이는 불법도청 사건으로 유명한 ‘초원복집’ 사건과 ‘삼성 X파일’사건을 상기하게 한다.
‘독수독과론’으로 역사에 묻힌 사건들
14대 대선을 사흘 앞둔 92년 12월 11일 부산의 ‘초원복집’에서 8명의 부산지역 기관장들은 지역감정 조장발언을 일삼으며 김영삼 민자당 후보 선거지원을 모의했다.
당시 국민당 관계자와 안기부 직원은 대화내용을 몰래 도청해 이들의 ‘불법 선거개입’ 모의와 ‘지역감정 조장발언’을 세상에 폭로했다. 민주당(후보 김대중)과 국민당(후보 정주영)은 민자당의 관권선거와 부정선거를 규탄했고 김영삼 후보진영은 위기상황을 맞았다. 당시 보수언론은 ‘초원복집’사건의 본질인 권력기관과 고위공직자의 ‘불법선거개입’보다는 상대 후보측의 ‘불법도청’을 집중적으로 부각했다.
초원복집 사건, 조선일보 “도청행위는 비판받아야”
삼성X파일 사건, “위법한 자료는 증거로 쓸 수 없다.
우리민족끼리 사건 내사 착수, 법적용 ‘이중잣대’ 논란
조선일보는 선거 당일인 그해 12월 18일 사설을 통해 ‘공작정치’를 소리높여 비판했다.
사설은 “기관장모임을 도청함으로써 국민당은 선거전략상 호재를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공공사회와 국민생활에 미칠 정보정치의 악영향을 고려할 때 도청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비난했다.
2005년 ‘삼성 X파일’은 당시 노회찬 진보정의당 전 공동대표가 2005년 과거 국가안전기획부(국정원)의 불법 도청팀장이 폭로한 이학수 전 삼성 부회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간의 1997년 대회 녹취록을 인용해 ‘삼성 떡값검사 7인’의 명단을 보도자료로 배포하고 인터넷 홈페이지에 공개한 사건이다.
현 법무부 장관인 황교안 당시 서울중앙지검 2차장이 이끈 수사팀은 “도청이라는 불법을 통해 취득한 증거이기 때문에 이를 이용해 수사할 수는 없다”며 X파일을 공개한 노회찬 전 의원과 이를 보도한 기자만을 재판에 넘겼다.
도청 내용에 담긴 금품이 오간 내용은 ‘독수독과’(毒樹毒果)론을 들어 수사하지 않았다. 독이 든 나무에서 난 열매에는 독이 있는 것처럼 위법하게 수집된 자료는 증거로 쓸 수 없다고 했다.
노회찬 진보정의당 전 공동대표, MBC 이상호 기자, 월간조선 김연광 편집장은 모두 삼성엑스파일 사건으로 판결을 받은 사람들이다.
반면 X파일 속에서 불법자금을 전달한 정황이 드러난 삼성그룹 전 이학수 비서실장과 중앙일보 전 홍석현 사장, 이들로부터 돈을 받은 것으로 의심되는 정계 인사와 검사들은 한 명도 처벌받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삼성 X파일’사건은 금품을 전달한 사람은 ‘불법으로 취득한 증거’이기 때문에 무죄가 되었고 이를 공개한 이들은 ‘유죄’가 된 결과를 낳았다.
‘삼성 X파일’ 사건에 비춰보면 수사 대상은 유출된 명단이 아니라 이를 유포하는 사람이 되어야 논리적이다. 하지만 수사가 이렇게 진행될 것이라 기대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검찰 독수독과론, ‘이중잣대’
공안당국이 국제 해커집단 ‘어나니머스’가 해킹한 북한 대남 선전용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에 가입된 회원들을 수사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불법적으로 얻은 증거자료를 토대로 한 사법처리가 가능한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현재 경찰이 조사하고 있으며 지금 단계로서는 뭐라 말할 수 없고 지켜보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법조계 일각에서는 ‘우리민족끼리’에 가입된 가입자들을 사법처리하는 것이 위법이 될 우려가 있다는 지적한다.
박주민 민변 변호사는 “검찰은 X파일 떡값 검사 명단이 불법적 방법으로 획득했기 때문에 수사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는데 우리민족끼리 해킹 자료를 가지고 수사를 하겠다는 것은 당시 입장과 모순된다”며 “검찰이 사안에 따라 다른 행동을 하다 보니 중립성의 의심을 받는다. (현재 입장이면) 떡값 검사 명단도 수사를 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박 변호사는 떡값 검사 명단이야 말로 중요한 공익적 사안이지만, 우리민족끼리 가입명단이 수사하고 처벌할 만큼의 공익적인 사안인지에 대해선 의문을 나타냈다.
그는 “자유주의 헌법을 가진 한국은 언론과 사상의 자유 등 다양성에 기반한 사회”라며 “우리민족끼리 명단을 통한 간첩 딱지 붙이기는 다양성을 파괴하고, 특정 색채를 사상의 자유 시장에서 배제하는 행위로 공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 지점에서 과연 ‘공익적 사안을 구별하는 기준점은 무엇인가’라는 궁금증이 유발된다. 독이 든 나무에서 자란 독이 든 열매라도 공익을 위해 처벌해야 한다면 ‘공익’을 위한 기준을 설정해야 한다. 사안에 따라 이중적으로 처리한다면 법치국가의 존립근거가 의심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