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체제 안정에 희생되는 한반도
북한의 3차 핵실험 이후 북한은 연일 위협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금방이라도 전쟁이 날 듯한 분위기 속에서 미국은 강경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러한 위태로운 안보위기 속에 북한의 위협이 권력기반 강화를 위한 선전용이라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과연 북한의 위협적인 행태속에 숨은 의도는 없는지 살펴봤다.

북, 인공위성 발사 3차 핵실험 치적 선전
집권 내내 핵·미사일·군부대 방문
남북군사대결 긴장상태로 몰아넣어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집권 1년은 전례 없는 한반도의 긴장을 유발시키며 개성공단 폐쇄 등 남북관계를 벼랑끝으로 몰아넣었다. 지난 11일은 김 제1위원장이 노동당 제1비서에 추대되면서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지 꼭 1년이 되는 해로 남북관계를 파국이 넘어 사상 유례 없는 군사대결의 긴장 상태로 만들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중·단거리 미사일 동시다발 발사 위협으로 한반도는 물론 미국, 일본과 대치하는 상황을 조성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지배체제를 확고히 하고 체제안정을 도모하려는 것으로 남북관계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이와관련 “개성공단 정상화는 대화를 통해 해결돼야 하며 이와 관련해 북한 측이 제기하기를 원하는 사안들을 논의하기 위해서라도 북한 당국은 대화의 장으로 나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류 장관은 지난 11일 정부서울청사에서 통일장관 성명을 발표하고 “북한은 지금이라도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깨뜨리는 행위를 중단하고 책임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행동하길 바란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류 장관은 북측에 “한반도에서 위기를 더 이상 조성하지 말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우리측의 이같은 입장천명에도 불구하고 북한당국이 김정은 체제 1주년을 맞아 최대 치적으로 인공위성 발사와 3차 핵실험을 선전했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지난 11일 김정은의 노동당 제1비서 추대 1주년을 맞아 사설에서 “‘인공지구위성 광명성 3호 2호기의 성과적 발사’ ‘제3차 핵실험에서의 성공’ 등 두 가지 성과는 김정은 동지께서만이 안아오실 수 있는 통쾌한 승리이며 우리나라를 우주강국, 핵보유국의 지위에 당당히 올려세운 민족의 대경사였다”라고 밝혔다.
도발국면, 사전각본에 따라 전개된 것
이같은 선전선동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도발국면은 사전각본에 따라 치밀하게 전개된 것으로 평가된다. 지난해 12월 12일 장거리 미사일 ‘은하3호’발사, 올해 2월 12일 3차 핵실험 등으로 긴장을 고조시키며 1년 동안 공개된 군부대 방문만 26회에 달하는 등 불안정한 체제를 결속시키는 데 총력을 다했다. 핵 우위에 기반한 경제·핵무력 병진 노선을 구사하며 향후 4차 핵실험 강행이 예상되는 등 북한의 도발국면이 어디까지 행해질 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다.
김 제1위원장의 도발국면은 승계작업이 마무리되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북한 노동당은 지난해 4월 11일 평양에서 제4차 당대표자회를 열고 당시 최고사령관과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만 맡고 있던 김정은을 당 제1비서로 추대하고 이틀 뒤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 추대해 권력 승계작업을 마무리했다.
김 제1위원장은 같은해 4월 27일 인민군 제655연합부대 종합전술 훈련 지도에 참석하면서 군부대 방문을 시작했고, 잠시 창전거리, 능라인민유원지 등 ‘경제 행보’를 통해 지도자로써 인식을 각인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7월 리영호 총참모장 숙청에 이어 군 수뇌부를 대거 교체하며 군을 자신의 휘하에 두었고, 8월 한 달 무려 7차례 군부대를 방문했으며 특히 8월 24일에는 목선 한 척에 의지해 연평도 포격 등 북한의 도발이 잦은 서해 북방한계선(NLL)의 섬 방어대들을 시찰, 국지전 도발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또 11월 19일 국가안전보위부를 방문하며 80여 일 만에 군부대 시찰을 재개했고, 장거리미사일 발사 운운하며 남북 간 긴장을 고조시켰다.
특히 올해 들어 2월 3차 핵실험을 단행한 뒤 김 제1위원장의 군부대 시찰은 더욱 늘어났고, 2월 20일부터 한 달여간 무려 13회나 시찰했으며 서해의 장재도·무도방어대를 재시찰해 긴장감을 더욱 높이기도 했다.
남북화해 상징 개성공단 무너지나
북한이 남북 화해와 상생 그리고 경제협력의 상징인 개성공단을 폐쇄하는 등 극단적 선택으로 치닫고 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등에서 그동안 화해의 상징으로 진행되어 온 남북 간의 도로·철도 건설과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상황에서 마지막 보루라고 할수 있는 개성공단마저 폐쇄의 수순을 밟고 있어 앞으로 남북관계의 벼랑끝 대치를 시사해주고 있다. 여기에 노동당 대남총책인 김양건 통일전선담당 비서는 최근 이곳을 방문하고 담화를 통해 “개성공업지구에서 일하던 우리 종업원들이 전부 철수한다”고 밝혔고, “공업지구 사업을 잠정 중단하며 그 존폐 여부를 검토할 것이며, 이후 사태가 어떻게 번지게 되는가는 전적으로 남조선 당국의 태도 여하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정경분리원칙을 깨고 공단에서 북측 인력을 모두 철수시킨 것은 2004년 12월 공단 가동 후 처음있는 일이다. 물론 북한이 우리 근로자들의 개성공단 입출경을 일부 제한한 사례는 있었지만 이번처럼 북측 근로자들을 전면 철수시킨 것은 처음있는 일이다
이같은 일련의 조치로 123개의 남한 기업이 진출해 있고 5만3000여 명의 북한 근로자가 일하고 있는 개성공단은 파국을 맞게 됐다.
개성공단의 사실상 폐쇄라는 극단적 조치는 북한 군부 주도의 대남 강경 분위기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예상된다. 한반도에 위기감이 고조되어 있는 상황에서 하루 수백 명의 남한 인력과 장비가 휴전선을 넘어 오는 상황을 북한 군부가 용납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핵 불바다 발언 등 극렬한 도발 위협에도 박근혜 정부와 국민 여론이 꿈쩍 않자 마지막 남은 압박카드인 개성공단 폐쇄라는 승부수를 띄운 것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여기에 개성공단이 김정은의 외화벌이 수단이라거나 남북간에 긴장국면이 높아지면 인질 가능성이 높다는 부분에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김양건의 담화에서 “남조선 대결 광신자들은 ‘돈줄’이니 억류·인질이니 하면서 우리의 존엄을 모독했다”고 주장한 것이 이를 뒷받침하며 최근 북한 권력 내 과잉충성 분위기가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북측이 군사적 요충지인 개성공단을 내줬는데도, 남측이 마치 일방적으로 시혜를 베풀 듯 선전하며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김관진 국방장관이 ‘인질 구출 작전’까지 거론하고 미군 특수부대를 끌어들일 흉심(凶心)까지 드러냈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우리 군이 개성공단을 둘러싼 남북 대치 국면을 틈타 미군을 끌어들여 북침을 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다는 것으로 선전선동을 일삼았다.
북한의 박근혜 정부 길들이기 위한 전략?
하지만 일부에서는 각본에 맞춘 개성공단 폐쇄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김양건이 개성공단을 방문해 북측 기관인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과 입주 업체를 둘러본 날 남측에서는 개성공단에 대한 돌파구가 나올 수도 있다는 희망섞인 전망을 내놓았다. 하지만 김 비서의 공단 방문 소식은 낮 12시48분 나왔고, 정부 당국자는 “김양건이 평양으로 귀환하기도 전(개성~평양은 차로 2시간30분 거리) 보도가 나온 건 이미 짜인 발표문이 있었다는 얘기”라고 밝혔다.
이같은 원인분석 뿐만아니라 새로 출범한 박근혜 정부를 길들이기 위한 전략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북한은 이명박 정부 출범 첫해인 2008년 7월 북측 병사에 의한 관광객 피격사망 사건이 터지자 예상과 달리 강경분위기로 남북간의 대립각을 세웠다. 새 정부가 들어선지 두 달도 안된 상황에서 남북간의 마지막 화해상징인 개성공단 카드까지 빼든 부분에 대해 남측 정부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예의주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일부는 “군부 인사가 아닌 대화파 김양건이 공단을 찾아온 건 긍정적 신호”라고 낙관하다 뒤통수를 맞았다며 북한은 ‘잠정 중단’이란 어정쩡한 결정으로 개성공단의 부활 여지를 남겼지만 어찌됐든 “남측 태도에 달렸다”며 공단의 운명을 자기들이 쥐고 흔들겠다는 의도를 명확히 드러냈다. 한편 개성공단이 해법을 찾지 못하고 이대로 폐쇄될 경우, 지난 2004년 12월 우여곡절끝에 첫 생산품을 생산한지 9년만에 문을 닫게 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남북 관계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공단 운영에 합의한 역사적인 2000년 6·15 정상회담 이전으로 뒷걸음질 치게 되는 형국이 된다.
저작권자 © 시사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