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강간죄 성립 여부 논란
정상적인 부부 사이에서도 강간죄가 성립할 수 있을까? 부부 강간죄는 부부 중 어느 한 쪽의 강압으로 인해 성관계를 가졌을 경우 이를 성폭력으로 인정하는 범죄다. 우리 사회에서는 그동안 정상적인 부부 사이의 강간죄 성립에 부정적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최근 헌법상 기본권에 기초한 ‘성적 자기결정권’을 중요시하면서 ‘강간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현재 인권보호에 중점을 둘 것인지, 부부관계의 특수성에 중점을 둘 것인지에 따라 의견이 갈리는 상황이다. 논란의 쟁점이 무엇인지 취재했다.

정상적인 부부 사이에서도 강간죄가 성립할까?
“폭행과 협박으로 이뤄진 부부관계는 명백한 범죄”
강간은 상대가 누구인가가 아닌 성적결정권의 문제
대법원은 18일 부부강간죄 성립여부에 대한 공개변론을 열었다.
4년만에 대법원까지 올라와 논란을 점화시킨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A씨는 2001년 결혼한 아내와 잦은 불화를 겪던 중 밤늦게 귀가한 아내를 부엌칼로 위협한 뒤 강제로 성관계를 맺었다. A씨는 이틀 뒤에도 부엌칼로 옷을 찢고 칼을 복부에 들이대면서 반항하는 B씨를 억압한 채 다시 성관계를 맺었다가 특수강간 등 혐의로 기소됐다. 사건은 1·2심에서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1심은 “정상적인 부부관계라도 폭행·협박 등으로 억압해 강제로 성관계를 할 권리까지 있다고 할 수 없다”며 징역 6년에 전자장치 부착명령 10년을 선고했고, 2심은 양형부당을 이유로 징역 3년6월을 선고했다. A씨는 상고했고 사건은 대법원으로 넘겨졌다.
우리나라는 1970년 대법원이 부부 사이에는 강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결, 협박이나 폭력이 개입돼도 성폭력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2009년 2월 이혼하기로 해 실질적인 부부관계로 보기 어려운 경우에 한해서 부부강간죄를 인정했다.
이번 사건은 정상적인 혼인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경우에도 남편을 배우자에 대한 강간죄로 처벌할 수 있는지 여부를 다루는 최초의 사건이다.
성적 자기결정권 VS 부부관계 특수성
공개변론의 쟁점은 정상적으로 유지되는 부부관계에도 부부강간죄를 적용할 수 있는지 여부다.
우선 A씨 측 대리인인 신영석 변호사는 “혈연과 성을 매개로 하는 가족과 혼인의 관계는 특수한 관계인 만큼 일반 행위의 강간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변호인 측 참고인으로 출석한 강원대 윤용규 교수 역시 “대법원 판례는 부부관계의 특수성을 고려해 정상적인 부부관계의 강간죄를 신중히 부정하고 있는 입장”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이건리 대검찰청 공판송무부장은 “부부관계의 특수성이나 가정유지의 필요성 등을 고려하더라도 폭력과 협박이 동반되는 강간죄는 어떤 이유로든 허용될 수 없는 명백한 범죄”라며 “폭행과 협박으로 강간이 이뤄진 부부관계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 볼 수 있다” 주장했다. 또한 “강간죄의 객체에서 배우자를 제외하는 것은 범죄 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검찰 측 참고인으로 출석한 영남대 김혜정 교수는 “강간의 문제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했는지 여부가 문제”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이들의 변론을 경청한 대법관들은 이와 관련해 제기된 쟁점 등을 언급하며 검사와 변호인, 참고인 측의 의견을 물었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검찰 측에 “형법이 개인의 생활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며 이에 대한 의견을 물었고, 이건리 대검찰청 공판송무부장은 “법이 지켜줘야 하는 것은 보호가치가 있는 사생활이지 은밀히 행해지는 범죄까지 보호해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고 답했다.
또 ‘심각한 폭력을 동반한 강간의 경우에도 정상적인 부부관계라면 형법이 개입하지 말아야 되는 것이냐’고 묻는 박보영 대법관의 질문에 신용석 변호사는 “형벌 이외의 다른 보호수단이 없는지 먼저 살핀 뒤 형벌에 나서야 하는 것”이라고 의견을 밝혔다.
피고인 변호를 맡은 신용석 변호사는 “부부강간의 현상이 존재한다고 해서 형벌이 부부침실에 들어가 시시비비를 가려야 한다고 볼 수 없다”며 “앞서 대법원이 혼인파탄의 경우에만 부부강간을 인정한 것은 합당하다”고 주장했다.
변호인 측 참고인으로 나선 윤용규 강원대 교수도 “부부 강간 사안은 확정 해석하는 문제가 아니라 치료와 교육의 문제다”라며 “부부강간죄의 유죄 성립은 법리를 처벌강화 쪽으로 해석할 수 있는 만큼 신중히 검토돼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건리 대검찰청 공판송무부장은 “부부 사이의 반복된 폭력은 타인에 대한 강간보다 더 중한 폭력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며 “부인이라는 이유로 강간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부부강간의 유죄를 주장했다.
검찰 측 참고인으로 나선 김혜정 영남대 교수도 “아무리 부부 간에 동거 의무와 성적 충실 의무가 포함되어 있더라도 폭행이 수반된 강간이 허용돼서는 안된다”며 검찰 측 주장을 지지했다.
이번 대법원 공개변론은 폭력성과 선정성을 고려해 중계방송은 허용되지 않았다.
선고 기일은 추후 양측에 통보될 예정이다.
선진국 대다수가 부부 강간죄 인정
이번 공개변론은 가정 내 부부관계의 특수성, 부부간 성의 의미와 기능, 강간죄 성립시 부부 및 가족관계에 미치게 될 영향 등을 다양한 각도에서 고민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1984년, 영국은 1991년부터 부부 강간죄를 인정하는 등 선진국 대다수가 부부 강간죄를 인정하고 있다. UN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우리나라가 ‘부부강간죄’를 법제화하지 않은 것을 지적해 왔다.
18일 열린 ‘부부강간죄 성립여부’에 대한 공개변론은 결국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법적공방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결정권이란 대한민국 헌법상의 권리로 국가권력으로부터 간섭 없이 일정한 사적 사항에 관하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의적 권리를 의미한다. 자기결정권은 헌법 제10조가 보장하는 개인의 인격권과 행복추구권에 전제된 개인의 자기운명결정권이다. 물론 자기운명결정권에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포함되어 있다.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이며 헌법에서 보장된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자유국가’라는 사실을 증거해야 한다.
“혼인증명서가 면책특권을 갖고 아내를 강간하는 자격증일 수 없다. 기혼 여성도 자신의 신체를 통제할 권리를 지닌다.”고 판결한 바 있는 1984년 미국 뉴욕주 항소법원의 모습을 한국에서도 볼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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