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감정 있거든!” 감정노동자의 인권실태

포스코 계열 포스코 에너지 임원 A씨의 여승무원 폭행사건으로 말미암아 감정노동자의 실태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감정노동’은 미소, 친절 등 특정한 감정 상태를 지속적으로 드러내도록 강요당하는 노동유형을 말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앨리 러셀 혹실드가 처음 개념화했다. 혹실드는 인간의 감정까지 상품화하는 현대사회의 단면을 감정노동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감정노동자의 실태를 취재했다. (편집자 주)
불친절한 모습이 포착되면 일자리 잃어
폭언·폭행·성추행까지…‘고객’을 우선하는 사측
감정노동자는 ‘고객은 왕’이라며 노예로 전락
2013서울연극제 공식참가작인 <불멸의 여자>는 자본주의 사회의 최전선에 서 있는 계약직 감정노동자를 극의 소재로 삼았다. 극은 감정노동자를 통해서 겉보기에만 화려한 자본주의 사회를 풍자한다. 2명의 여직원은 일터인 마트에서 늘 활짝 웃는 얼굴로 고객을 맞아야 한다. ‘진상고객’이 사소한 일로 꼬투리를 잡아도 고객의 감정을 존중해야 하는 감정노동자는 웃어야 산다. 웃지 않으면 고객만족센터에 신고되고, 불친절한 모습이 포착되면 일자리를 잃는다. 세태를 반영한 이 연극은 감정노동자의 모습을 적나라게 보여준다. 실제 서비스 직군의 종사자들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는 무관하게 고객의 입장에서 행동하도록 교육받는다.
감정노동자는 웃어야 산다?
감정을 숨기고 고객을 대하는 이른바 감정 노동자는 630여만 명. 감정노동자는 백화점이나 마트, 콜센터, 은행 등 가까운 곳에 있다. 이들은 업종과 하는 일은 다르지만 모두 감정 노동자에 속한다. ‘고객이 왕’이라는 서비스 정신 아래 감정 노동자들의 고충이 자리 잡고 있다.
“규정상 처리가 안 되는 업무에 대해 억지를 쓰는 고객들한테 온갖 폭언과 협박을 듣는다”는 은행창구 여직원 김모씨(32·여). 그녀는 고객들로부터 욕을 먹고 수치심을 느끼는 일이 일상이 됐다.
‘은행의 얼굴’로 불리는 여직원들이 겪고 있는 감정노동의 폐해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고객들 앞에서 늘 친절함을 보여야 하기 때문에 감정은 숨기다 못해 억눌러야 한다. 업무시간의 90% 이상을 고객과 직접 대면하며 시종일관 친절한 미소도 잃지 않아야 한다.
지난 24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익명을 요구한 전직 스튜어디스는 포스코 임원 폭행 사건을 접하고 통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이유인 즉 “그 전에는 이런 일들이 있어도 그렇게까지 대응을 못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도착지가 미국이다 보니까 좀 일이 합리적으로 그렇게 진행이 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정리하면 목적지가 한국이었다면 일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 대충 무마됐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항공사측에서도 대응 메뉴얼이 있지만 절차에 의해서 처리되는 적은 거의 듣거나 보거나 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또한 지상에서 일어났다면 경찰서에 신고할 정도의 성추행일지라도 웃으면서 ‘이러시면서 안 됩니다.’ 라며 알아서 대응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전했다.
감정노동자의 경우, 기업의 이익을 위해 고객으로부터 폭언이나 폭행을 당해도 사건은 방치 은폐된다는 것이다.
이는 기업이 표방하는 ‘고객제일주의’가 한몫을 한다. ‘고객은 왕’이란 슬로건아래 감정노동자는 노동자가 아닌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인사상 불이익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고객에게 반발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유럽이나 중국에서 유학·여행한 적이 있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한국처럼 다양한 업종에서 강한 감정노동을 실시하고 있는 나라는 드물다”고 한다.
감정노동자의 인권에 대한 존중 부족
느끼는 감정과 다른 감정을 표현해야 할 때 감정노동이 발생하는데 문제는 감정노동으로 생긴 문제가 적절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경우에 좌절이나 분노, 적대감을 보이게 된다. 심한 경우엔 정신질환까지 갈 수도 있다.
2010년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가 노동자 3096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서비스직 감정노동자의 26.6%가 심리상담이 필요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감정노동 종사자일수록 뇌심혈관계질환과 근골격계질환 등의 유병률이 높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2011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낸 ‘여성 감정노동자 인권가이드’도 감정노동자들이 일상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건강에 좋지 못한 결과에 이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조사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여성 감정노동자들은 고객의 폭언과 무례한 행동으로 인격적인 수모와 굴욕감을 느껴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았다. 또한 사업장에서 △항시 대기상태 △제대로 된 휴식시간 부족 △앉거나 쉴 공간 부족 등 고충을 토로했다. 특히 ‘손님은 왕’이라는 식의 ‘폭군형 고객’, 기계적 친절을 강요하는 사업주의 태도 등이 여성 감정노동자들의 인격권과 노동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인권위는 현장간담회와 전문가회의 등을 거쳐 사업주를 대상으로 여성감정노동자들의 인권 가이드북을 발간한 바 있다.
가이드북은 △적절한 휴식시간과 휴게시설 확보 등의 근무환경 개선 △고객과 마찰시 일관적인 대응기준을 담은 지침과 인센티브를 통한 관리 등의 업무 시스템 개선△ 여성감정노동자들을 위한 심리 상담실이나 고충처리전담기구를 상시 운영하는 방안 등을 제시했다.
인권위관계자는 “시민들의 감정노동에 대한 인식이 점차 형성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여성 감정노동자의 인권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부족하다”고 말했다.
포스코 임원의 승무원 폭언 폭행 사건이 일회성의 가십거리로 지나치지 않고 감정노동자들의 인권을 향상시킬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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