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감자-‘일감모아주기’ 불협화음
‘경제민주화’는 지난 대선 여야를 막론하고 최대 화두였다. 당시 ‘경제민주화’는 ‘진보의 전유물’이 아닌 공동으로 해결해야 할 ‘시대적 과제’로 인식한 듯 했다. 하지만 최근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이 국회 입법수순에 접어들면서 각계의 갈등이 본격화하고 있다. 원칙과 소신을 중시하는 박근혜 정부의 대선공약인 경제민주화를 선거용이 아닌 민생정치의 핵심문제로 풀어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는 상항이다. 박근혜式 ‘경제민주화’가 어떤 좌표를 향해 가고 있는지 집중 취재했다. (편집자 주)
당·청, 경제민주화 입법 속도조절 주문
여권 “일감몰아주기 처벌 지나쳐” 반발
경제민주화가 기업을 죽인다? 본질 왜곡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는 ‘경제민주화 전도사’라 불리는 김종인 교수를 전격 영입해 경제민주화 이슈를 주도했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일감 몰아주기와 골목상권 지키기’는 경제민주화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은 경제민주화에 방점을 찍었던 지난 대선 때와는 달라진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민주화 후퇴 발언
박 대통령은 17일 국회 정무위·기획재정위 소속 새누리당 의원들과의 오찬에서 “대기업이란 이유로 벌주는 식의 때리기로 가서는 안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15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상임위원회 차원이기는 하겠지만 공약내용이 아닌 것도 포함돼 있다”면서 “무리한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된다”는 발언으로 신중론을 내비쳤다.
민주당은 ‘경제민주화 후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특히, 국회 입법 과정에서 논의되고 있는 사안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입법권 침해’라며 비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내 공약을 넘어서지 말라’며 경제민주화 법안에 대한 ‘입법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데 이어, 집권 여당 원내 사령탑인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연일 경제민주화 법안 입법 추진에 제동을 걸었다.
이 원내대표는 22일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정치민주화는 이해하겠는데, 우리 사회가 아무데나 ‘민주화’를 붙여놔, 이제는 무책임한 인기주의 형태의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이 원대대표는 15일 최고위원회의에서 “국회에서 선거 때는 이해가 되지만 아직도 대기업에 대해 무조건 문제가 큰 것처럼 기업 의욕을 꺾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의 경제민주화 입법 추진과 관련해 우려를 밝히자, 청와대와 당 지도부가 조율해 국회의 경제민주화 입법에 대해 ‘속도조절’을 주문하고 나선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 멘토’라고 불리는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까지 나서 “지금은 경제위기 국면이기 때문에 경제민주화는 일단 뒤로 미뤄야 한다”며 노골적으로 속도 조절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경제민주화실천모임(경실모)’ 소속 개혁 성향 의원들을 주축으로 당내의 반발 기류도 감지된다.
경실모 소속 남경필 의원은 17일 “경제민주화가 기업을 죽이고 경제를 악화시킨다고 말하는 것은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라며 “당 지도부가 미리 선을 긋거나 경제민주화의 필요성을 부인하면 상임위의 토론과 타협이 위축될 수 있다”고 지도부에 ‘반기’를 들었다.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이종훈 의원도 이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경제민주화 대선 공약 실천이 후퇴하면 집단적으로 대응하겠다”고 역설했다.
당 밖에서도 논란이 확산됐다. 중소기업중앙회는 18일 경제민주화 논란과 관련해 논평을 내고 “경제살리기의 중심에는 경제민주화가 있어야 한다”며 “현재 추진되고 있는 경제민주화는 결코 위축되거나 뒷걸음질 쳐서는 곤란하며, 건강한 생태계가 복원되기 위해 경제민주화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앙회가 이날 중소기업 현장의 우려를 현실화함에 따라 향후 경제민주화를 둘러싼 논란은 한층 가속화될 전망이다.
‘일감 몰아주기’ 이견 커 논란 확산
박 대통령은 대선 공약집에서 ‘일감 몰아주기 금지 강화’, ‘골목상권 보호’, ‘하도급 불공정 피해방지’,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 ‘재벌에 대한 사면 제한’ 등을 약속했다. 이를 위한 입법 과제로 공정거래법·유통산업발전법·하도급법·가맹사업법·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의 개정을 제시했다.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 중심이 된 여야 6인 협의체는 지난 12일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들의 개정을 올 상반기 중에 추진키로 합의했다.
지난 22일 국회 정무위원회 소위에서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 중 지하경제 양성화와 관련된 금융정보분석원(FIU)관련 법, 공정거래위원회의 전속고발권 폐지법, 프랜차이즈 가맹점주에 대한 제재 법안 등은 통과됐지만 공정거래법은 이견이 커 통과되지 못했다.
공정거래법 개정안의 경우 대기업 계열사간 ‘일감 몰아주기’를 제재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어 ‘일감 몰아주기 금지법’으로도 불린다.
이른바 ‘일감 몰아주기’는 재벌의 대표적 불공정거래행위로 지목된다. 공정위 조사에 따르면 민간대기업집단의 계열사 85.2%가 부당내부거래를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내부거래의 88%가 수의계약형태이며 광고, 물류, 시스템통합 분야에서 특히 두드러지고 소모성 자재구매 대행 등 서민형 업종으로까지 확대해 있다.
‘일감 몰아주기’와 관련된 핵심 쟁점은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무엇을 계열사 간 부당 내부거래로 볼 것이냐 △부당 내부거래 입증을 누가 할 것이냐 △제재 및 처벌은 누구를 어떻게 할 것이냐 △대기업 총수일가의 지분이 30% 이상인 계열사가 부당내부거래로 적발될 경우 명확한 증거없이도 총수가 관여한 것으로 추정해 형사처벌 할 수 있는 이른바 ‘30% 룰’도 논란거리다
먼저 기준에 있어 ‘어디까지를 계열사 간 부당내부거래 및 일감몰아주기로 보느냐’에 관한 부분이다. 지금까지는 정상적인 거래보다 ‘현저하게’ 유리한 조건의 거래만 일감 몰아주기로 판단했지만, 개정안은 ‘상당히’ 유리한 조건으로 규제 대상 범위를 넓혔다. 내부거래 자체를 부당거래로 봐 제재를 강화하겠다는 의도다.
그 동안 일부 대기업 총수와 자녀 간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행위 현상의 부작용을 제재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개정안은 공정거래 억제라는 목적을 넘어 대기업 총수의 사익추구행위 자체를 규제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부당 내부거래 입증을 누가 할 것이냐’도 논란이 거세다. 야권은 대기업이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는 주장이지만 새누리당은 공정거래위위원회가 입증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법에 ‘부당한 내부거래’라고 규정돼 있을 경우에는 거래 부당성을 공정위가 입증해야 할 책임이 있지만 ‘정당한 이유 없는 내부거래’라고 돼 있다면 ‘정당한 이유 있는 거래’였음을 기업이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부거래를 통해 일감을 준 회사와 받은 회사 양측을 모두 처벌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현재 논의중인 개정안은 일감을 몰아준 회사와 받은 회사 양측 모두 관련 매출액의 최대 5%를 과징금으로 부과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감을 몰아준 회사에만 2~5%의 과징금을 추징하는 현행 규정과 비교해 과징금이 최대 두배 이상 늘어난다.
대기업의 부당 내부거래 처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법이 개정될 경우 이에 해당하는 30대 그룹의 계열사는 112개에 이른다. 그룹별로는 총수 일가의 지분이 30% 이상인 계열사가 많은 GS, 효성, 부영 등 순으로 부담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재계는 30% 룰이 “형법상 무죄추정의 원칙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미 형법상 배임죄 등이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권이 너무 의욕을 높이는 것 아니냐는 불만도 터져 나온다.
“기업에 경제민주화는 변수가 아닌 상수”
재계의 한 관계자는 “대주주가 자신의 기업을 사익 목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취지에는 일부분 동의하는 측면도 있다”면서도 “정치권이 현재 기업의 시스템이나 대내외 경쟁력 등을 고려하지 않고 지나친 의욕과잉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우려스럽다”고 토로했다.
경제민주화가 기업투자와 성장을 해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해 보인다. 일각에서는 기업이 투자를 머뭇거리는 것은 마땅한 투자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정부가 압박하거나 달랜다고 투자가 늘어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도 “기업에 경제민주화는 이제 변수가 아닌 상수다. 여기에 기업이 맞춰 적응해야한다”고 강조하고 나서는 상황이다.
일감몰아주기나 횡령·배임·탈세의 근절은 기업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경제정의라며 ‘경제죽이기’가 아닌 ‘경제생태계 회복’이라는 시각이 우세해 보인다.
하지만 ‘재계의 반발이 청와대의 견제로 이어지고 법안폐기로 이어졌던 과거의 전례를 재연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린다.
공약이행을 중시하는 박대통령의 스타일로 볼 때 어떤 식으로든 관련 법안들이 국회를 통과할 것이라는 전망도 힘을 얻고 있다.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은 여권 일각의 경제민주화 ‘속도조절론’에 대해 “대통령이 선거과정에서 경제민주화에 대한 분명한 의지를 밝혔기 때문에 약속은 지킬 것”이라며 “단지 임기가 5년이기 때문에 경제상황에 따라 완급 조절이 있을 것이고 현재 조절을 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경제민주화는 헌법 119조 2항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에 근거한다. 과연 헌법에 근거한 경제민주화가 제 갈 길을 갈 수 있을지, 전 국민적 관심이 요구되고 있다.
저작권자 © 시사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