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당 대표 김한길…대선 승리 두차례 이끈 대표적 ‘전략통’
국민들이 요구하는 변화 강조…고강도 ‘혁신 드라이브’ 예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변화 강조…고강도 ‘혁신 드라이브’ 예고
대세를 뒤집기에는 구도가 너무 뚜렷했던 민주당 전국대의원대회. 친노 대 비노의 혈투로 불렸던 민주당 지도부 경선에서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선출된 것은 대선 이후 달라진 당내 분위기를 반영한 결과였다.
김한길, “계파와 세력다툼 없어야”
민주당 선관위는 이번 전당대회에서 총 투표인단 1만4014명 가운데 8803(62.82%)명이 참여한 전국대의원 투표 결과와 총 투표인단 10만2592명 가운데 3만0801(30.02)명이 참여한 권리당원투표 결과에 여론조사 결과를 합산해 최종 투표 결과를 산정했다.
신임 김 대표는 수락연설에서 “60년을 지켜온 민주당의 영혼만 빼고 모든 것을 버려야 우리가 살 수 있다”며 “지금부터 변화와 혁신의 폭풍 속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밝혔다.
김 대표는 “계파와 세력도 없는 내가 당대표로 선택된 자체가 민주당에 큰 변화를 상징한다”며 “새벽이 오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고 한다. 이제 민주당은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새벽을 만들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새로운 민주당으로 나아가기 위해 계파주의 정치를 청산하고 온정주의, 분열주의, 포퓰리즘, 교조주의와도 과감한 결별에 나서겠다”며 “갈등과 반목, 무능과 무책임 역시 극복해야 할 숙제”라고 강조했다.
김 대표는 또 ‘새로운 민주당’, ‘더 큰 민주당’, ‘이기는 민주당’을 3대 목표로 제시한 뒤 “고강도 혁신 드라이브에 시동을 걸겠다”며 ▲대탕평 인사 ▲정당 민주주의 실천 ▲정책정당 면모 강화 ▲신진인사 적극 발굴 등을 약속했다.
김 대표는 안보와 민생현안 등의 해결을 위해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참여하는 정기 회의체인 ‘여야 국정협의체’ 구성을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에 제안했다.
김 대표는 “민생을 살리기 위해 정부·여당과 초당적으로 협력할 준비가 돼 있지만, 국민과 야당을 무시하고 불통의 국정운영을 고수한다면 무서운 민주당, 강력한 야당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DJ 권유 정계입문…대통령 만든 공신
민주당 김한길 대표는 소설가 출신 4선 의원으로 1995년 김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하기 전까지는 ‘여자의 남자’ 등을 히트시킨 베스트셀러 소설가 출신 4선 의원이다.
그는 일본 도쿄 출생(60)으로 이대부고를 나와 건국대 정외과를 졸업했다.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여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으나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 대신 김대중 총재가 이끌던 새천년민주당을 선택해 정계에 입문했다. 특히 김대중·노무현 대선 후보의 선거 캠페인을 기획한 자타가 공인하는 선거전략통이다.
진보정당 발전에 매진한 선친 김철 전 통일사회당 당수의 영향을 받은 탓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김 대표는 <여자의 남자>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등을 히트시킨 베스트셀러 작가 겸 TV 토크쇼 진행자로서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이듬해인 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의 선거 캠페인을 기획·총괄하면서 김대중 정부 출범의 주역으로 평가받았다. 사상 첫 도입된 후보들 간 TV토론회가 주요 대선 변수로 떠오른 상황에서 김 대표가 김대중 후보의 방송대책팀장을 맡아 ‘미디어선거전’을 성공적으로 치렀기 때문이다.
이후 국민의 정부에서 청와대 정책기획수석과 문화관광부 장관 등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2002년 대선에서도 노무현 후보의 미디어선거대책 특별본부장을 맡아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성사시키는 등 ‘선거기획자’로서의 명성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김 대표는 국회에서도 여야 간 타협을 이끌어내는 수완을 발휘했다. 17대 국회 건설교통위원장 시절 여야간 쟁점 법안인 행정중심복합도시법 처리를 성사시켰고,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시절인 2006년 1월 당시 이재오 한나라당 원내대표와의 산상회담을 통해 사학법 문제로 장외투쟁 중이던 한나라당의 원내 복귀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 내 비노무현계 의원들의 집단 탈당을 주도한 경력은 아직까지도 친노무현계로부터 ‘분열의 리더십’이란 비판을 받는 계기가 됐다.
당시 그는 열린우리당을 떠나 중도통합민주당을 창당한 뒤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참여한 구(舊) 민주당과 통합해 대통합민주신당을 탄생시켰다.
이런 점 때문에 경선 과정에서도 민주당의 최대 난제인 계파를 아우르면서 당 혁신을 주도할지에 대해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김 대표는 17대 대선 이후 패배의 책임을 지겠다며 2008년 18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으나 지난해 19대 총선에서 서울 광진갑에 전략 공천돼 4선 의원으로서 국회에 재입성했다.
서울시장 선거 후 새누리당이 각종 악재로 골머리를 앓을 무렵, 민주당(당시 민주통합당) 지도부는 김 대표에게 손을 내밀었다. 총선을 한 달 앞두고 서울 광진갑에 김 대표를 전략 공천한 것이다.
김 대표는 “중앙당으로부터 서울 광진갑 지역에 출마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고심 끝에 받아들였다”며 “반드시 승리해 정권 교체에 앞장서겠다”는 출사표를 던졌다.
정송학 새누리당 후보와 맞붙었던 김 대표는 52.1%의 득표로 당선된 것이다. 김 대표는 당선 직후 당 대표 출마 가능성을 내비치며 ‘당권’을 향한 의욕을 내보였다.
당시 김 대표는 “4년 전 정권을 뺏긴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며 “그러면 정권을 찾아올 책임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의지를 거듭 확인했다.
지난해 6ㆍ9 전당대회에선 11곳의 지역경선에서 7곳에서 1위를 차지하며 선전했지만 친노진영의 이해찬 전 대표에게 분루를 삼켰다.
지난해 11월엔 대선 승리를 위한 인적 쇄신을 내세우며 지도부 동반사퇴를 주장했다가 수용되지 않자 홀로 최고위원 직에서 물러나 결국 지도부 총사퇴 요구를 관철했다.
국민을 위한 민주당으로 거듭나야
김 대표는 지난 5월 6일 국회에서 열린 첫 최고위원 회의에서 “혁신은 우리에게 많은 고통을 요구할 것이지만 우리 모두는 기꺼이 그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변화를 위한 변화가 아니라 국민들이 요구하는 변화를 하나하나 실천해 가겠다”면서 “너무 서두르다 내용이 못 미치거나, 너무 신중을 기하다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그는 “친노니 비노니 주류니 비주류니 하는 말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최고위원들도 이날 회의에서 일제히 ‘계파청산, 대탕평’ 등을 강조하는 것으로 김 대표의 ‘혁신’에 힘을 보탰다.
김 대표가 자신이 주장한 ‘계파청산’을 완수하고 국민을 위한 민주당으로 거듭날 것인지 여부에 관심이 쏠리면서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 ‘정계개편’은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 ‘안철수 신당’과의 관계설이 나오자 김 대표는 “안철수 신당을 반길 세력은 분명 새누리당밖에 없을 것”이라며 “야권의 재구성이 있다면 그 중심에 민주당이 있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면서 김 대표는 “자신이 거름이 돼 2017년 대선에서 승리하는 민주당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민주당 혁신작업의 1차 관문은 계파정치를 청산해 민주당의 고질병으로 꼽혀온 계파 갈등을 해소하면서 내부 결속과 당내 화합을 기하는 일이라고 당 관계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김한길 체제’에서 내세울 ‘혁신 드라이브’는 당내 비주류 정치인들의 등용과 ‘노무현 전 대통령 지우기’로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정치권에서는 김 대표가 경선 과정에서 과열된 갈등을 봉합하고 제1야당의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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