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없는 것은 없다!!!
할 수 없는 것은 없다!!!
  • 하창현
  • 승인 2005.09.15 22: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애인이라고 주저할 수 없어
450만 장애우들을 위한 투쟁은 계속되어야 돼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으로서의 삶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단지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장애인용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 따위가 전부이다. 장애인의 인권과 권리를 위한 호소와 투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지만 그다지 귀 기울이고 그들의 곁에 서고 싶어하는 모습도 없다. 장애인용 승강기, 장애인용 에스컬레이터 따위들도 마련이 되기에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에 대해 깊이 반성해 본다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도 무심한 비장애인들에 의해 당연한 과정과 결과가 되는 것이지만 장애인들은 고단의 투쟁의 연속으로 인해 생긴 산물이다. 450만 장애우들과 장애스포츠인들을 대변하고자 하는 한국장애인선수협의회 강창균 사무국장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소아마비를 3살 때부터 앓았던 강창균 사무국장. 그의 삶은 고단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는 말했다. ‘할 수 없는 것은 없다’라고. 맞는 말이다. 이 말 한 마디는 그의 모든 것을 대변해 주리라. 고등학교 시절 체육과목 성적을 내기 위해 찾았던 ‘정립회관’. 그곳에서 그는 체육점수도 환산받았던 곳이지만 삶을 바꾸어주는 결정적인 계기를 찾은 곳이기도 하다. 강 사무국장은 줄곧 장애인 학교를 다니지 않고 일반인 학교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소아마비를 앓고 있었던 그는 당연히 일반학생들과 비해 체육과목에 대한 활동이 부진할 수 밖에 없었고 체육과목에 대한 성적도 자연 최하위권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학교측의 배려로 장애인에 맞게 실력을 측정해주는 것으로 체육 성적을 갈음할 수 있게 해 정립회관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휠체어 농구와 휠체어 레이스를 권유받았고 본격적인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실 다른 장애스포츠인들도 그렇겠지만 장애인으로서 운동을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사실 수상을 한다는 것도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지난 88년 서울올림픽에 휠체어 레이스 경기에 출전했던 강 사무국장은 당시 아쉽게도 4위에 그치고 말았던 터라 그 말이 더욱 더 안타깝게 들렸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운동에 대한 열정과 남다른 애정이 빛바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그의 수상경력도 만만찮다. 전국체전에서는 항상 1위를 거머쥐었고 각종 세계대회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 어쩔 수 없이 등 돌려야 했던 운동 그렇게 두각을 나타내고 운동에 대한 감각이 절정에 달했을 때 강 사무국장은 운동을 그만 둘 수 밖에 없었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확연하게 사정이 달라진 것은 없다만 당시만 해도 장애인이 운동을 하는 것에 대한 시선은 그렇게 곱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자연적으로 장애스포츠인들에 대한 처우 역시 뻔한 것이었다. “저는 삼시 세끼 밥 먹을 정도만 되어도 운동을 해 나갈 자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안 되었던 그 때는 정말 벼랑끝에 선 기분이더군요”라며 당시의 시절을 회상했다. 경제적인 사정으로 기본적인 삶조차 꾸려나가기 힘들었던 강 사무국장의 선택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99년부터 약 3년간 안 해 본 일이 없다는 강 사무국장. “세공일도 했었고 전자회사 생산라인에서 일도 했습니다. 하체를 자유스럽게 쓸 없었기에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조건 닥치는 대로 하려고 덤볐습니다. 일단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콜센터 근무도 해봤고 택시 운전 면허도 땄습니다.”라는 그의 말은 현재 대한민국 장애우들의 고단한 삶을 보느듯 해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들도 저를 막지는 못하더군요. 장애인선수협의회에 가입이 되어있던 저로서는 자연적으로 협의회 분들과 교류가 있었고 자연적으로 운동에 대한 열망을 버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침 2002년 아?태 장애인 대회가 열렸습니다. 뚜렷한 계기는 없었지만 제 발길은 이미 그곳으로 행하고 있었습니다”라며 장애인스포츠계로의 복귀과정을 담담히 밝혔다. “운동은 저를 지탱해주는 그 무엇입니다” ■ “대한민국 장애인 행정...심각한 수준입니다, 휴우” 이제 10월이면 보건복지부 소속에 있던 장애인선수협의회가 문화관광부 소속으로 옮겨진다. 450만 장애우들과 함께 이루어낸 값진 결과이다. 보건복지부에서 문화관광부로 옮겨진다는 것은 많은 것을 내포한다. 일단 장애스포츠인들에 대한 처우가 달라진다. 시설과 지원이라는 측면에서 많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기대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끝없이 투쟁할 것 입니다. 지난 4월 장애인 날에 저희는 또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제 시위도 지겹습니다. ‘우는 아이 젖 한 번 더 물린다’는 속담이 꼭 들어맞습니다. 요구하지 않으면 저희 장애인들 따위는 아예 관심도 없습니다. 행정당국에서부터 일개 말단 사회복지사까지 기본적인 배려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라면서 현재 대한민국 장애인 행정에 대해 비판을 꺼리지 않았다. 실제로 그 역시 그러한 대우를 몸소 겪었다고 한다. 기초수급대상자인 그는 정부의 몇 안되는 혜택이라도 받고자 했지만 그마저도 많은 불편이 따른다고 했다. “무슨 요구 서류들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서류들이야 요구를 한다손 치더라도 그들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기본적인 소양부터 길러야 될 것 같더군요”라고 말하며 관련 기관의 사회복지사들과 실질적인 행정업무를 맡아보는 이들에게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굽신대면 편하고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혜택도 못 받는다는 그는 “대한민국의 장애행정이요? 아직 멀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일회성, 전시성 행정 말고 뭐가 있습니까? 기본적인 사고부터 뜯어 고쳐야 합니다”라며 강하게 주장했다. ■ 사랑스런 아내와 아들 딸 “고등학교 재학시절 전국체전에 선수로 참가하면서 아내를 만났습니다. 당시 아내는 비장애인으로서 자원봉사자였고 저는 장애인으로서 휠체어 육상 선수였습니다. 지금도 저는 아내를 만난 것이 너무나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가족들이 모두 다 그러하듯이 힘들고 지칠 때, 언제 어디서든 그녀는 저의 든든한 버팀목입니다. 단지 제가 그런 아내에게 잘 해 주지 못하는 것이 가슴 아플뿐이죠”라며 아내에 대한 애틋하면서도 뿌듯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강 사무국장은 13살 난 아들과 11살짜리 귀여운 딸이 있다고. “항상 아버지를 잘 따릅니다. 솔직히 말해서 걱정이 됩니다. 장애인 아버지를 둔 사실에 아이들이 위축되거나 창피해 하지는 않을까, 놀림은 당하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적은 없었습니다. 저만 모르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저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사랑스러운 아이들입니다. 앞으로도 맑고 건강하게 자라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라며 자녀들에 대한 사랑도 빼놓지 않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