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곳곳이 인종차별 논란으로 뜨겁다. 아시아나 항공기 사건의 파장이 인종차별 논란으로 튀면서 한국사회에 공분이 일고 있다. 근대에 들어 ‘천부(天賦)적인 문제는 차별할 수 없다’는 의식이 성숙하면서 여성이나 인종, 장애인에 대한 차별은 저급한 문화의 산물로 인식되고 있으나 개선되지 않고 있다. 지구촌에서 격화되고 있는 인종차별 논란을 계기로 ‘차별금지법안’에 대한 심도깊은 논의가 진행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美방송, 아시아나 조종사에 인종차별적 이름 보도
비무장 흑인소년 살해 백인 ‘무죄’ 판결, 시위 확산
이탈리아 “흑인 장관, 오랑우탄 같다” 막말성 비하
인종차별 금지…‘포괄적차별 금지법안’ 통과 될까?
아시아나 항공기 착륙 사고를 둘러싸고 인종차별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아시아나기 샌프란시스코공항 착륙사고와 관련해 조종사들의 이름을 왜곡하고 희화화한 사건이 발생한 것.
아시아나기 사고가 난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 지역방송사 KTVU가 아시아나 항공 한국인 조종사 4명을 인종차별적 농담에서 따온 엉터리 이름으로 보도했다.
KTVU의 여성 앵커는 아시아나기 조종사들의 이름을 Sum Ting Wong(Something wrong·뭔가 잘못됐다) Wi Tu Lo(Wee too low·우린 너무 저급해) Ho LEE FUK(Holy fuck·빌어먹을) Bang Ding Ow(충돌을 뜻하는 의성어) 등으로 표현했다. 이 같은 이름은 아시아나기 조종사 4명(이강국, 이정민, 이종주, 봉동원)의 이름 중 일부를 희화해 지어 낸 것이다.

방송국은 NTSB(국가교통안전위원회)의 인턴 직원에게 왜곡된 이름을 확인받았다고 항변했다. 방송이 알려지자 한인사회는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뉴욕한인회는 한국인 조종사 4명의 이름에 인종비하적인 표현을 사용한 샌프란시스코 지역방송 KTVU 보도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뉴욕시민참여센터 김동찬 대표는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조종사들의 이름을 가지고 비하해서 쓰는 단어로 교체해서 발표를 했다”며 “이는 상당히 의도적이고 인종을 비하하기 위한 행위였다”고 지적했다.
김 대표는 “미국 사회는 일반적으로 조그마한 동네에서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하다”며 “길거리를 가다가 보면 히스패닉동네라든지 흑인동네라든지 백인동네라든지, 이렇게 젊은 친구들이 모여 있을 때 아시아인 한 명 지나가면 전부 다 ‘헤이, 칭총칭총 (Hey, Ching Chong Ching Chong)’ 부르는 게 다반사”라고 폭로했다.
인종차별 비난을 받은 보도에 대해 미국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계속되고 있다.
CNN 방송에서 클레어 진 킴 어바인 캘리포니아주립대 정치학 부교수는 “이런 농담은 아시아계 미국인을 열등하고 문화적 차이가 있다고 보는 시각을 반영한다”고 말했다.
대내외적으로 비판이 일자 KTVU은 이에 대해 공식 사과했으나 한인사회의 분노는 진정되지 않고 있다.
아시아나항공은 “전체 아시아인을 저급하게 비하하는 표현을 사용한 인종차별적인 보도에 대해 강력히 대응하고자 소송을 진행하겠다”고 했으나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 17일 “해당 방송에서 사과문을 발표한 바 있다”며 기존 입장을 철회했다. 일각에서는 아시아나의 소극적인 대처에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했다. 인종차별 논란은 한인사회 뿐만이 아니다.
흑인청소년 살해 사건 무죄판결
미국에서는 일명 ‘짐머먼 사건’으로 인종차별 논쟁이 격화되고 있다. 이 사건은 한 백인 방범대원 조지 짐머먼(29)이 비무장의 흑인 소년 트레이본 마틴을 총기로 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플로리다주 샌포드 법원의 배심원단은 ‘무죄’라고 평결하면서 촉발됐다. 특히 짐머먼을 무죄라고 평결한 배심원단 6명은 모두 여성으로 5명은 백인이었고 1명은 히스패닉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짐머먼을 사건 당시 체포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인종차별 논란이 거세게 타올랐다.
미국 전역에서는 재판 결과에 대한 대규모 항의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LA 현지언론에 따르면 시위대는 “정의가 없다. 평화도 없다”는 구호를 외치며 주요 도로를 점거했다. 시위 참여자는 “여전히 사람들은 겉모습으로 차별한다”며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두 똑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인종차별과 미국의 사법제도를 비판하는 시위는 뉴욕, 샌프란시스코, 보스턴, 디트로이트, 시카고 등 주요 도시로 확산됐다. 일부 도시에서는 ‘미국은 흑인을 싫어한다’고 적힌 플래카드가 내걸렸고 성조기를 불태우는 등 폭력적 양상을 보이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연일 판결에 항의하는 글들이 쏟아지고 있으며 미국 전역의 흑인 커뮤니티는 주요 도시에서 연대 시위를 계획하고 있다.
미 언론에 따르면 이 사건을 인종과 종교 등에 의한 ‘증오범죄’로서 새롭게 입건할 것을 요구하는 청원운동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시민운동가들은 오는 23~25일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집결해, 이번 무죄평결을 내리게 한 정당방위법(Stand Your Ground)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일 예정이다. 또한 내달 24일에는 워싱턴D.C에서 대규모 행진도 벌일 계획이다. 더구나 8월에는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킹’이 워싱턴DC에서 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 50주년 행사가 예정돼 있어 시위는 더욱 장기화 될 것으로 관측된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인종차별 논란이 ‘제2의 LA 폭동’으로 번질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탈리아 흑인장관 폭언
미국에 이어 이탈리아에서도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여론이 뜨겁다. 반이민 정당인 북부동맹의 로베르토 칼데롤리 상원의원이 이탈리아 첫 흑인 장관인 세실 키엥게 통합장관(49)을 오랑우탄에 비유하는 발언을 한 것.
칼데롤리 의원은 정치 집회에서 “나는 동물을 사랑하지만 키엥게 사진을 볼 때마다 오랑우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며 “그녀는 자기 나라에서나 장관을 하면 될 것”이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칼데롤리 의원의 발언이 알려지자 인터넷에서는 그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엔리코 레타 총리는 트위터에 올린 공식성명을 통해 “(용인의) 한계를 넘은 발언”이라고 비난하며 “키엥게에게 전폭적인 지지와 연대를 보낸다”고 밝혔다.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에서 태어난 키엥게 장관은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1983년 이탈리아로 이주했으며 이탈리아인 남편과 두 자녀를 두고 있다. 키엥게는 지난 4월 레타 총리가 이끄는 좌파 연립정부에서 이민 문제를 담당하는 통합부 장관에 임명됐으나 우파 정치인들의 인종차별성 공격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다.
이탈리아는 뿌리 깊은 인종차별적 문화로 명성이 높은 나라다. 지난 5월에는 축구경기도중 관람객들이 집단적으로 흑인선수에게 인종차별적인 야유를 보내는 사건이 발생해 이탈리아 프로축구에서 처음으로 인종차별 때문에 경기가 중단된 적이 있다. 당시 이탈리아축구협회는 경기 다음날 AS로마 구단에 벌금 5만 유로(약 7200만원)를 부과한 바 있다. 물론 이러한 예는 셀 수 없이 많다. 개인차원에서 인종차별적 언행이 문제이긴 하지만 선진국들은 ‘인종차별 금지법’이 마련돼 있다.
인종차별에 대한 이중적 태도
인종차별 논란은 먼 이웃나라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도 이 문제는 심각하다. 특히 백인에 대한 태도와 달리 피부색이 다른 방글라데시나 스리랑카,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 남부아시아 출신 외국인에 대한 비하와 편견은 위험수위에 달했다.
지난 5월17일 <워싱턴 포스트>는 ‘세계 인종주의 지도’를 보도한 바 있다. 이 지도는 ‘세계 가치관 조사(World Values Survey)’라는 비영리단체가 ‘인종이 다른 이웃을 원하지 않는다’라는 항목에 응답한 비율을 이용하여 작성했다. “예”라고 한 응답이 많은 국가일수록 인종에 대한 편견이 심한 국가라고 분류했는데 일본은 15%를 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은 무려 37%가 ‘다른 인종과 같은 동네에 살기 싫다’고 답했다.
일각에서는 ‘아시아나 조정사 이름 막말 비하 사건’을 거론하며 인종차별에 대한 이중적 사고를 진단할 때라는 의견을 표했다.
경기도 안산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상대로 선교활동을 하는 권모 목사는 “한국인이 미국인에게 받는 차별에 대해서 공분을 표하는 사람은 많지만 우리사회에 만연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편견과 혐오감에 대해서는 둔감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사회도 우리나라 보다 못 살고, 피부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로 외국인을 폄하하며 혐오하는 이중적 사고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 목사는 “이러한 반성이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으로 공론화 되어 ‘인종차별금지법’이 제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사회는 인종차별을 비롯하여 ‘차이’를 ‘차별’하는 ‘차별금지법안’ 이 없는 실정이다.
UN 이사회와 같은 국제사회는 ‘차별금지법’ 제정과 관련하여 한국에 수차례 권고 한 바 있다. 2000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법제정 필요성이 제기됐다. 하지만 여러 차례 입법 예고됐으나 폐기됐다. 현재도 인종, 장애, 종교, 성별, 학력, 고용형태, 성적 지향 등 모든 영역에서 ‘합리적 이유 없는 차별’을 금지토록 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이 국회에 상정돼 있지만 종교계의 반발로 진전을 못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