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프존은 일감몰아주기라도 ‘상당히 유리한 조건(정상가와 차이 및 거래총액)’ 혹은 ‘합리성이 없는 상당한 규모의 거래(총 내부거래 매출액 및 비중)’가 아니면 규제대상에서 제외하는 규정을 뜻한다. 조건을 쉽게 바꾸기 어려운 만큼 실질적으로 일감몰아주기 규제를 하는 요건은 세이프존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공정위가 세이프존 조건을 완화시켜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하면서 경제민주화 후퇴라는 논란이 일고 있다. ‘내부거래 매출액 200억원 미만과 내부거래 비중 12% 미만’이 수정된 조건이다. 이 경우 일감몰아주기 규제대상은 공정위 원안보다 40%나 줄어들어 반발이 만만찮을 것으로 예상된다.

일감몰아주기 규제대상 ‘208개→122개’ 급감
롯데, 시네마통상 등 4개사 규제대상서 제외
“기업 활성화, 총수일가 사익편취는 다른 것”
경제민주화의 상징이었던 ‘일감몰아주기 규제’도 결국에는 완화될 것으로 보인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일감몰아주기 규제와 관련해 총수일가 지분율 하한선은 30%(상장사 기준)로 유지하면서도 일감몰아주기 규제대상에서 제외되는 ‘세이프존’ 조건은 완화했다. 이로써 규제대상은 또다시 감소했다.
규제대상 40% 줄어
1일 공정위는 일감몰아주기 규제를 담은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세이프존 조건에서 ‘합리성이 없는 상당한 규모의 거래’ 기준은 ‘내부거래 매출액 200억원 미만 및 내부거래 비중 12% 미만’으로 수정됐다. 이는 ‘기업의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는 새누리당 일부의 요구가 수용된 결과로 보인다.
당초 세이프존에 대한 공정위 안은 ‘정상가격과의 차이가 7% 미만 및 거래총액 50억원 미만(상당히 유리한 조건)’, ‘내부거래 매출액 50억원 미만 및 비중 10% 미만(합리성이 없는 상당한 규모의 거래)’이었다. 반면 새누리당 안은 ‘정상가격과의 차이가 7% 미만 및 거래총액 200억원 미만’과 ‘내부거래 매출액 200억원 미만 및 비중 20% 미만’으로 공정위 안보다는 느슨한 편이었다.
총수일가 지분율 하한선은 공정위 초안인 ‘상장사 30%, 비상장사 20%’로 유지됐다. 새누리당 일부는 이에 대해서도 기업 간 정상적 거래까지 위축시킬 수 있다며 지분율 하한선을 높여 규제대상을 좁히자고 주장해왔다. 이들의 요구했던 안은 ‘상장사 40%, 비상장사 30%’였다. 이 경우 일감몰아주기 규제대상은 208개사에서 181개사로 감소하게 돼 경제민주화 후퇴라는 지적을 받았다.
하지만 세이프존 조건이 완화되면서 일감몰아주기 규제를 받는 대상은 이 보다도 줄어들게 됐다. 수정된 세이프존 조건을 적용하면 일감몰아주기 규제대상은 공정위 원안(208개사)에서 40%나 감소한 122개사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정부는 총수일가 지분율 유지로 명분을 세우고, 세이프존 조건완화로 기업에게 혜택도 주는 결정을 내린 셈이다.
희비 갈린 기업은
기업집단별로 살펴보면 삼성그룹은 비상장사인 삼성에버랜드·삼성석유화학이 규제대상이다. 삼성SNS도 규제대상이었으나 최근 삼성SDS로 합병되면서 제외됐다. 삼성에버랜드의 총수일가 지분율과 내부거래 비중(지난해 기준)은 각각 46.02%, 46.65%(국내계열사 거래 1조3918억원)였다. 삼성석유화학도 총수일가 지분율이 33.19%인 가운데, 지난해 국내 계열사와 2657억원(26.93%) 규모의 일감거래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기아자동차그룹에서는 비상장사인 이노션·삼우·현대오토에버 등 9곳과 상장사인 현대글로비스가 규제대상에 이름을 올렸다. 총수일가 지분율은 이노션 100%, 삼우 50%, 현대오토에버 30.1%, 현대글로비스 43.39%다. 지난해 내부거래 비중은 이노션 57.77%(국내계열사 거래 2005억원), 삼우 88.37%(7783억원), 현대오토에버 85.10%(6615억원), 현대글로비스 74.92%(3조2495억원)다.
그밖에 GS그룹은 GS네오텍(총수일가 지분율 100%, 내부거래 78.73%·3922억원)·GS아이티엠(93.33%, 72.07%·1311억원) 등 12곳의 비상장사와 상장사 ㈜GS(43.19%, 88.72%·1140억원)가 규제대상에 포함됐고, 코오롱은 마우나오션개발(50%, 42.84%·276억원)·코오롱베니트(49%, 62.49%·525억원) 등 비상장사 3곳과 상장사 ㈜코오롱(48.16%, 71.69%·421억원)이 규제대상에 속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세이프존 조건완화로 일감몰아주기 규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기업도 있다. 대표적 사례가 롯데그룹이다. 롯데그룹은 시네마통상(총수일가 지분율 84.9%)·시네마푸드(88.02%)·SNS인터내셔날(100%)·한국후지필름(22.02%) 등 비상장사 4곳이 규제대상에서 제외됐다. 아모레그룹도 상장사인 아모레퍼시픽그룹(55.06%)이 빠지면서 일감몰아주기 규제와는 무관해졌다.
이외에도 삼성그룹은 가치네트(총수일가 지분율 36.69%)가,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은 입시연구사(69.11%)·현대커머셜(40%)이 각각 일감몰아주기 규제대상에서 제외됐고, GS그룹은 삼정건업(100%)·코스모정밀화학(100%)·위너셋(97.63%)·삼양인터내셔날(92.54%)·센트럴모터(92.43%)·정산이앤티(50%)·마루망코리아(30%)·삼양통상(48.47%) 등 8곳이 규제대상에서 빠졌다. 추가 제외된 계열사만 86개사에 달한다.
앞서 강기정 민주당 의원은 일감몰아주기 규제대상이 축소되는 움직임과 관련, “고래도 빠져나갈 그물을 만들어 재벌대기업을 봐주면서 경제민주화 운운하는 것은 국민을 기망하는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송호창 무소속 의원도 “기업 활성화와 총수일가의 사익편취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며 “일감몰아주기는 총수일가의 배만 불리고 기업의 경쟁력을 저하 시킨다”고 일갈했다.
그러나 재계는 이번 공정위 시행령 입법예고안에 대해 여전히 규제범위가 넓다는 입장이다. 추광호 전국경제인연합회 기업정책팀장은 연합뉴스에 “기업의 정상적인 경영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어 우려된다”며 “지배주주의 사익편취 행위를 규제하는 목적에 맞게 규제범위가 설정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재계는 그간 총수일가 지분율 하한선을 50%로 올려달라고 요구해왔다.
한편, 공정위는 입법예고 기간(10월 2일~11월 11일) 중 대기업·중소기업, 시민단체 등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한 뒤 내년 2월 14일 시행령 개정을 완료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