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9일부터 13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 극장 무대에서 열려
시간의 세례를 받은 고전의 힘은 대단하다. 시대와 나이를 초월해 관객 혹은 독자들에게 감동과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고전,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이유다. 극작가 오영진이 1942년 발표한 희곡 '맹진사댁 경사'는 영화로, 연극으로, TV 드라마로 매체를 달리해 끊임없이 변주되어 가며 명실상부한 한국의 고전으로 자리 잡은지 오래.
영화로는 한국 최초로 베를린 영화제(8회)에 진출한 '시집가는 날(일명:맹진사댁경사)'(1956년作, 감독/ 이병일, 주연/ 조미령, 최현, 김승호)이 제 7회 시드니 영화제 출품, 제 4회 아시아 영화제 특별 희곡상 수상 등 화려한 수상경력을 자랑한다. 1962년에 발표된 '맹진사댁 경사'(감독/ 이용민, 주연/ 최은희, 김승호, 김진규, 김희갑, 구봉서)는 '시집가는 날'을 리메이크한 것. 여기서 멈추지 않고 1977년 '시집가는 날'(감독/ 김응천, 주연/ 김진해, 강주희, 김정훈)로 다시 리메이크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기할 것은 1956년과 1962년작 모두 주인공 ‘맹진사’ 역할을 맡았던 명배우 ‘김승호’씨의 빼어난 연기력이다. 그는 특유의 카리스마와 진심어린 연기로 ‘맹진사’를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연극계에서는 국립극단이 1992년 '맹진사댁 경사'(국립극단 제 150회 정기공연)로 뒤늦게 ‘초연’했고, 이후 1992년 151회 정기공연, 1994년 한국명작 무대, 1995년 165회 정기공연, 1997년 '시집가는 날'이란 제목의 175회 정기공연, 그리고 2001년 다시 원제로 돌아가 ‘새해맞이 가족극장’으로 '맹진사댁 경사 The Wedding Day'를 공연했다.
이처럼 국립극단(예술감독 이윤택)의 대표 레퍼토리로 자리 잡은 '맹진사댁 경사'가 오는 11월 9일(수)부터 13일(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 극장 무대에 오른다. 이윤택 예술감독 부임 이후 시작된 ‘국립극단 레퍼토리 복원과 재창조’작업의 일환으로 ‘제 1회 名作 코메디 페스티벌’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것. 이번 페스티벌은 침체일로인 한국 연극계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리라는 기대와 한국의 대표적인 극작가 故 이근삼 선생의 2주기를 맞이하며 그의 희극정신을 이어가고자 마련되었다.
그렇다면 장르를 넘나들며 사랑받아온 '맹진사댁 경사'의 매력은 무엇일까? 일단 이야기 뼈대를 살펴보면, 제목에서 알수 있듯이, 판서댁 아들을 사위로 맞아 세도가의 사돈으로 행세하려던 맹진사가 주인공. 그는 사윗감이 절름발이라는 소문에 전전긍긍하다 결국 잔꾀를 부리는데, 자신의 딸 대신 몸종 ‘입분’을 시집보내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혼인날 나타난 사윗감 ‘미언’은 절름발이는커녕 늠름하고 당당한 젊은이였고 이에 맹진사의 낭패감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입분’이 그대로 시집가고 만다.
이 작품은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맹진사의 모습을 시종일관 풍자적으로 바라보며, 더불어 진실된 사랑 없는 정략결혼을 비웃고 있다. 또한 몸종과 판서댁 아들을 맺어줌으로써 신분제 봉건 사회에 대한 은근한 조소도 잊지 않았다. 딸을 이용해 신분 상승하려는 얄팍한 부정이 조건을 따져 결혼하려는 요즘 세대들에게 시사하는 점이 크고, 유쾌하고 깊은 맛이 나는 코믹요소도 다분하기에 오래 사랑받고 있는 것. 또한 향토적인 소재 위에 한국적 해학과 풍자를 잘 녹여냈다는 점도 강점.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감칠 맛 나는 오영진의 대사가 발군이다. 맹 진사, 입분, 미언의 캐릭터가 잘 살아있다는 점도 또 다른 장점.
이번 국립극장 공연은 해학과 풍자를 가지고 놀며 되려 뚫고 지나가, 원전을 기가 막히게 해체하기로 유명한 이윤택이 연출을 맡았다는 점에서 연극 팬들의 기대가 클 것으로 예상된다. 또 이윤택의 특기인 한국적 연희양식의 독특한 형식미를 마음껏 뽐내며 ‘이윤택 연기 메소드’의 집대성이 될 무대이기에 기대감이 증폭되는 것이다. 한국적 미학의 정수를 뽑아 잊고 있었던 특유의 몸짓과 소리를 무대 위에서 재연하고, 탈 바가지같은 독특한 분장을 통해 시각적으로도 즐길거리가 많다. 또 국악기(장구, 해금, 대금, 생황, 피리, 태평소 등)를 아우르는 5인조 악단(악장/ 김주홍)이 어깨춤 절로 나는 흥겨운 마당을 펼쳐 한바탕 난장을 필 예정.
이번 공연에서는 역대 국립극장의 ‘맹진사’였던 권성덕, 정상철에 이어 ‘김재건’이 2005년의 맹진사로 거듭날 예정인데, 국립극단의 산증인인 원로배우 ‘장민호’가 맹진사의 아버지인 ‘맹노인’역을 맡아 극의 무게중심을 잡는다.
사실, 이미 여러 차례 검증받았던 고전에 도전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큰 작업이다. 널리 알려진 작품이라는 점은 장점인 동시에 창조력을 제약하는 한계점이 될 수 있는 것. 하지만 이런 태생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제아무리 고전이어도 무턱대고 따라하는 것은 자기 복제이자 무의미한 자아도취일 뿐이다. 현 시대의 흐름을 잘 끄집어내기로 정평이 난 연출가 이윤택이 이런 무리수를 둔 데에는 남다른 이유가 있을 터. 그가 쓴 ‘연출의 글’을 읽어보면 그의 연출의도와 원작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오영진의 '맹진사댁 경사'는 서구 극작술에 영향을 입은 극대극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원형적 상상력과 몸짓, 소리, 언어가 잘 스며들어 있어서 가장 한국적인 명작 희극으로 남을 수 있는 작품이다....(중략) 결국 나는 국립극단에서의 작업은 국립극단의 근대성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탈근대성의 방향으로 나아갔고, 그 과정은 우리 전통의 원형 속에서 연극성을 발굴하고, 그 한국 원형의 연극성을 보편적인 현대 연극 기호로 바꾸는 것이었다. 이러한 나의 의도가 이번 <맹진사댁 경사>에서 시험받게 될 것이다.”
파격적인 연출로도 유명한 이윤택이기에 이번에는 그가 뭘 어떻게 ‘해체’하고 ‘재구성’해 낼지 귀추가 주목되는 바이다. 앞서 말했듯이 시대의 트렌드를 꿰뚫고 있는 그이기에, 그리고 올 봄 국립극단 세계 명작 무대 '떼도적'으로 독일 만하임 국립극장에서 격찬 받았던 그이기에, 가을에는 독일 베를린 세계문화의 집에서 창극 '제비'로 한국문화를 널리 알릴 그이기에 이번에는 얼마나 놀라운 감흥을 불러일으킬지 궁금하기만 하다.
한편 재력에 만족하지 않고 돈으로 진사벼슬을 산 것도 모자라 권세있는 집안과 혼인, 권력까지 움켜쥐려는 맹진사의 끝없는 욕심이 어떻게 좌절되어가는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지 않을까?
평일 오후 7시 30분/ 주말 오후 4시에 공연하며, 으뜸석은 3만원, 버금석은 2만원, 딸림석은 1만 오천원이다. 사랑티켓 참가작이니 대학로에서 조금만 발품을 팔면 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관람할 수도 있으니 그리 부담될 것은 없다. 참, 청소년은 30% 할인이 되니 오영진과 이윤택의 궁합이 궁금한 10대들도 관람해 볼 것을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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