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백하고 겸손한 맛이 그립다면 차를 돌려라.
일산방향으로 강변북로를 타고 20분 정도 달리면 후미진 마을이 나온다. 자칫 그냥 지나치기 쉬운 초라한 마을 어귀, 하얀색 외벽에 나무로 펜스를 단 건물이 생경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감하게 우회전하면 담백하고 정갈한 한정식을 맛볼 수 있다.
木香. 말 그대로 ‘나무 향’이란 그윽한 이름의 한정식집이다. 허기에 지쳐 쓰러지기 직전이 아니라면 조금 인내심을 갖고 입구에 있는 안내문을 살펴보자.
“고려 말 이성계가 위화군 회군을 한 후 조선을 창건했을 때, 한양을 수도로 정하고 천도를 했다. 그러다 삼송리(三松里) 숫돌 고개에 이르렀을 때에 기러기 한 마리가 용포(龍布)에 배설물을 떨어뜨리고 날아갔다고 한다. 이것을 이성계가 쏘아 맞혔고, 그 기러기가 이 동산에 떨어져 ‘기러기 안(雁)’자를 써서 ‘안산(雁山)’이라 이름 붙였다.”
나무 계단을 올라 내부로 들어서면 산뜻한 한지 벽면이 눈에 띈다. 방마다 전통 문을 달아놓아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마침 점심시간에 찾은지라 민복 차림의 종업원들 손길이 바쁘다. 우측 벽면 전체가 통유리인 방에 들어서면 필요 충분한 볕을 듬뿍 쬘 수 있다. 눈이 부신 게 싫다면 하얀 블라인드를 내리면 그만이다.
적당히 푹신한 방석에 앉아 ‘대나무 정식’을 주문해 본다. 에피타이저로 홍합, 호박죽, 김치동치미, 녹두전, 단 호박, 웰빙 감자 샐러드 등이 나오는데 하나같이 깔끔담백한 맛이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적당히 간이 배서 곱게 부쳐 낸 녹두전, 국수같이 얇고 길게 채친 감자에 방울토마토를 얹고 아몬드 가루를 뿌린 새콤달콤 ‘웰빙 감자 샐러드’, 마늘빵 가루를 곱게 뿌려놓은 홍합구이가 입맛을 돋운다.
다양한 맛에 취해 입안이 행복해질 즈음, 선한 인상에 은백색 양장을 얌전히 차려 입은 이집 사장 박미정씨가 묻는다. “음식 맛은 어때요?” ‘맛있다’는 세 글자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무지가 죄송스럽다. 젓가락을 내려놓고 잠시 조근조근한 설명을 들어본다.
“개업한 지는 4년 됐어요. 원래 갖고 있던 땅인데, 쉰 넘어서까지 평생 전업주부만 하자니 일을 해보고 싶더라구요. 그냥 죽으면 허무하니까. 주위에서도 다 반대했어요. 한정식은 가짓수도 많으니까 손 많이 간다고. 하지만 마지막을 좋게 장식하고 싶어서 시작했어요. 그래서 인터넷으로 주방장님도 구하고 차근차근 시작했어요.”
‘목향’이라는 가게이름이 향기롭고 좋다고 운을 떼자 선한 미소로 답한다.
“땅하고 나하고 맞춰서 지은 거에요. 나무향.. 좋잖아요. 참, 여기 홍실장이 강남 호텔 출신인데 음식 데코레이션을 예쁘게 해줘서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치워드릴까요?” 종업원이 들어와 양해를 구하고 채 먹지도 못한 접시를 내 간다. 사실 가짓수가 워낙에 많아서 겨우 2~3명이 꼼꼼하게 먹긴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놈의 식탐. 떠나가는 접시를 안타까워하고 있는 찰나, ‘안산’의 유래에 대한 보충 설명을 해 주신다.
“입구에 있는 설명문 보셨나요? 이성계가 쏜 화살이 떨어진 곳이 바로 저 동산이에요(유리벽 너머 잔디밭을 가리키며). 원래 여기가 한양 가는 길에 쉬어가던 주막거리였데요. 그러니까 예전부터 식당 터였던 셈이죠.” 그러더니 뿌듯한 표정으로 한마디 덧붙인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반대하더니 (장사가) 되고 나니까 다들 잘 했다고 그래요.”
장사가 잘 되는 이유는 꼬치꼬치 묻지 않아도 음식 맛이 증명해 주고 있었기에, 조용히 고개만 주억거리고 있는데 코스 요리가 나온다.
첫 번째는 홍합, 새우, 조랭이 떡, 소고기, 목이버섯이 푸짐하게 들어간 ‘해물잡채’. 모락모락 김이 나는 잡채를 한 젓갈 뜨려니 ‘연어 무말이’가 나온다. 미나리에 큼직하고 얇게 썬 무를 넣고 그 위에 연어 회를 돌돌 말아 새콤 짭짜름한 소스에 찍어먹는데 입안 가득 풀내음이 번진다.
다음은 채친 배, 오이, 당근과 새우, 갑오징어, 맛살에 특제소스(소스 배합은 비밀이란다. 이런)를 부어 먹는 ‘해물 냉채 소스’. 처음에는 팔보채인 줄 알았는데 비밀스런 특제 소스의 오묘한 맛과 어우러지니 입안이 시원해지면서 호사스런 음식에 놀랐던 혀의 감각이 돌아온다. 다음은 양배추 쌈에 예쁘게 얹힌 ‘한방 제육 보쌈’. 푹 고아내서 그런지 육질이 연한데 쫀득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 특히 퍽퍽한 살을 선호하는 남성들에겐 맞지 않을 듯하다. 하지만 새콤한 새우젓에 찍어먹으면 부드러운 육질을 좋아하는 여성과 아이들에겐 딱이다.
마지막은 그릇 가운데의 정교한 소나무 장식이 인상적인 ‘참치 회 무침’. 먹기 아까울 정도로 깜찍하고 정성스레 담겨 나온다. 그 외에 갈비찜, 10여 가지의 찬과 함께 된장찌개에 밥이 나오는데, 배부르기 전에 이 음식 저 음식 맛보라는 섬세한 배려에 슬며시 미소가 번진다.
전체적으로 요즘 유행하는 웰빙 식단이라 할 수 있는데, 맵고 짜고 자극적인 맛에 질린 사람들에게 최고의 식단이 될 것이라 믿는다. 더불어 끝도 없이 반찬이 나오는 고루한 한정식이 되길 거부하며 단아한 맛과 퓨전요리의 세련됨을 동시에 추구하기에 시각적인 즐거움 또한 크다.
이 집의 또 다른 매력은 색다른 메뉴 구성이다. 겸손함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저렴한 한정식에 상호명과 같이 ‘목향’이라 이름 붙였고, 나머지 메뉴명도 밤나무 정식, 대나무 정식, 참나무 정식, 소나무 정식, 잣나무 정식, 향나무 정식이라 부른다. 가장 자신 있는 코스를 물으니 “참나무 정식이에요. 1인당 32,000원이라 부담스러우실 수도 있지만, 한번 드셔본 분은 100% 만족하시더라구요.”라며 다부지게 말한다.
평일 낮에는 주로 계모임이나 교회모임 등이 잦고, 평일 저녁에는 학교 선생님들의 회식, 주말에는 상견례나 돌, 백일, 회갑 손님이 주인데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보장할 수 있는 맛에 반해 많이 찾는다고. 하지만 부부동반이나 소규모로 오는 사람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맛도 맛이지만 이 집의 가장 큰 매력은 입구에서부터 소개 된 뒤뜰의 작은 동산 ‘안산’이다. 가게 입구부터 나 있는 오솔길에는 친절하게 나무 펜스가 쳐져있고, 그 옆 들국화, 나팔꽃, 모과나무, 소나무, 산수유, 보리수, 앵두, 매실, 살구 등이 반겨준다. 몇 걸음만 옮기면 보라색 구슬같이 생긴 ‘작살나무’가 보이는데 포도알처럼 송이송이 매달린 열매가 눈에 시리다.
“예쁜데 이름이 좀 그렇죠?” 장난스레 웃는 모습이 천진스럽다.
저녁에는 가로등과 작은 등만 켜는데 은은한 분위기에 취해 집에 돌아가기 싫을 정도다.
주 5일이 보편화되면서 주말에 도심을 벗어나고픈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왕 나들이 가는 것, 뭔가 확실하고 보장된 곳, 검증받은 곳에 가서 아까운 주말 시간을 낭비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도 같을 것이다. 고급 한정식에 정갈한 맛, 편안한 인테리어와 불 꺼진 잔디밭의 고즈넉함과 커피 한 잔이 그립다면 망설이지 말고 차를 돌려라.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라 장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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