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기업들은 대부분 공익법인을 가지고 있다. 또 대기업 총수들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을 때 계열 공익법인에 자신의 주식을 사재 출연하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다. 공익법인은 문화재단, 복지재단, 나눔재단, 장학재단 등 이름만큼이나 다양한 활동을 한다. 기업의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좋은 일’을 하자는 취지에서 만든 공익법인이건만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지배주주의 경영권 유지 수단으로 동원되거나 편법 증여·상속의 수단으로 악용될 여지가 있다는 지적 때문이다.
삼성·동부·한진 등 공익법인이 핵심계열사 지분보유
지분 팔지도 못하고, 배당도 적어 수익창출 어려워
“그룹 지배권 위해 악용되지 않도록 제도 보완 필요”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금호아시아나그룹 공익법인)은 지난해 보유하고 있던 금호석유화학 48만5000주 전량을 장내매도했다. 매각직후 재단은 매각대금 555억원을 포함, 600억원을 금호타이어 유상증자에 출자해 3.47% 지분을 확보했다. 당시 박삼구 회장 일가는 그룹 워크아웃 이후 금호타이어 주식을 전혀 보유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 유상증자로 재단을 포함해 내부지분은 약 11%가 됐다.
일반적으로 공익재단이 다양한 공익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적극적인 수익사업을 발굴하거나 자산운용에 나서야한다.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면 그 주식을 좋은 가격에 팔아서 매각대금으로 공익사업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의 경우, 자신들이 보유한 주식의 매각대금을 고스란히 계열사 출자에 활용해 지배주주 경영권 강화를 도왔다는 비난을 받았다.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은 2009년 그룹 경영권 분쟁 당시에도 지배주주 일가가 보유한 계열사 주식을 매입하는 등 경영권 분쟁에 동원된 바 있다.
지배구조 핵심지분 보유
경제개혁연구소가 지난 23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36개 대기업집단 소속 공익법인은 55개이며, 이들은 총 209개사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이중 공익법인과 같은 대기업집단 소속, 즉 계열사지분은 139개(중복제외 발행회사 기준 110개)로 대부분 공익법인이 계열사 주식을 중심으로 자산운용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5개 공익법인 중 계열사 주식만 100% 가지고 있는 곳도 34개에 달했다.
공익법인이 보유하고 있는 계열사 지분 가운데는 그룹의 지배구조상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핵심계열사 지분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삼성그룹 소속 삼성생명공익재단과 삼성문화재단은 그룹 지배구조상 핵심계열사인 삼성생명 지분을 각각 4.68%씩 총 9.36%를 보유 중이다.
동부그룹의 동부문화재단은 사실상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동부건설, 동부CNI, 동부화재해상보험의 주식을 각각 3~5%씩 보유하고 있다. 한진그룹의 양현재단과 하이트진로그룹의 하이트문화재단도 공정위에 등록된 지주회사 ㈜한진해운홀딩스, 하이트진로홀딩스㈜의 주식을 9.9%, 7.42%씩 가지고 있다.
이외에도 이랜드그룹은 이랜드복지재단이 5.62% 보유한 이랜드월드를 통해 그룹을 지배하고 있고, 한라, 태광, 태영그룹 소속 공익법인 역시 대표적 계열회사의 지분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배권 유지나 승계 목적” 지적
주식을 자산으로 가진 대부분 공익법인들이 사업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주식을 매각해서 현금화한 뒤 다른 금융자산으로 바꾸거나, 주식을 그대로 보유하면서 배당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공익법인들은 대부분 계열사 주식을 가지고 있어서 주식을 매각하기 쉽지 않은데다, 일부를 매각하더라도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처럼 다시 다른 계열사 주식을 매입하는 경우가 많다. 주식매각을 통해 공익사업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는 사례가 거의 없는 것이다.
결국 대부분 공익법인들은 배당을 통해 재원확보를 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막대한 주식규모에 비해 배당금액은 극히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보유주식이 공익사업을 위한 재원으로서도 효과적인 역할을 못한다는 의미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경제개혁연구소에 따르면, 공익법인이 보유한 계열사 주식의 공정가액(상장주식 2012년말 시가, 비상장주식 장부가) 대비 배당금 비율은 평균 1.68%에 불과했다. 배당을 전혀 받지 못한 주식도 47개에 달했다. 공익법인이 보유한 자산 가운데 주식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매각은 물론 배당을 통해서도 수익을 거의 창출하지 못하고 있음이 확인된 것이다.
이수정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원은 “결국 대기업집단 소속 공익법인은 계열사 주식을 순수한 자산의 의미보다 지배주주 일가의 그룹 지배권 유지나 승계 목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며 “공익법인 출연 주식에 대한 비과세 혜택이 대기업집단 지배주주 일가의 조세회피나 그룹 지배를 위해 악용되지 않도록 계열사 주식보유 제한을 좀 더 강화하는 등 제도의 보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한편, 현재 국회에는 대기업집단 소속 공익법인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은 ‘독점 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계류돼 있다. 이종걸 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개정안은 자산규모 5조원 이상인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을 지배하는 사람은 해당기업집단과 특수관계인 공익법인이 취득·소유한 주식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고, 이를 위반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억원 이하의 벌금을 내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