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령·배임 등 혐의로 사법처리 중인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공백이 길어지며 한화그룹 사정이 심상치 않은 징후를 보이고 있다. 한화그룹 각 계열사의 3/4분기 실적은 저조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유동성 확보 문제로 회사채를 발행하는 계열사도 있다. 아울러 그동안 사활을 걸었던 한화S&C의 제2기 서울시 교통카드 사업도 법원의 제동으로 무산될 위기다.

‘정보 불법 입수?’ 한화S&C, 교통카드 사업 협상중지
A급 이하 회사채 불안감 가중 탓? 회사채 판매 난항
이라크 재건사업 답보…한화 “김승연 회장 공백 영향”
‘건강악화’ 김승연 회장, 4번째 구속집행정지 연장신청
물론 한화그룹은 화약 및 방산 관련 사업이라는 어지간하면 위기가 스며들 틈이 없는 분야에서 확고부동한 입지를 다지고 있다. 아울러 한화생명(구 대한생명)이라는 업계 정상권의 계열사도 보유하고 있어 최소한 자금 면에서는 큰 문제가 없는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한화에너지도 그룹의 든든한 자금줄 역할을 하고 있다.
법원 ‘철퇴’ 맞은 한화S&C
그렇지만 ‘카리스마’를 통해 그룹 내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행사했던 김승연 회장의 구속 수감 및 병으로 인한 구속집행정지 신청 등 일련의 사태로 한화그룹은 ‘안정감’이라는 측면에서 상당히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동안 한화그룹이 계열사 한화S&C를 통해 심혈을 기울여왔던 교통카드 관련 사업에 불법 시비로 급제동이 걸려 그룹 전체의 불안감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최근 법원이 제2기 서울시 지하철 교통카드 시스템 구축사업 입찰에 참여한 한화S&C가 유출된 경쟁사 제안서를 입수한 뒤 입찰에 활용한 정황을 포착하여 이에 제동을 걸어버린 것이다.
지난 10월 22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51부(부장 김재호)는 한국스마트카드가 서울시를 상대로 낸 가처분 신청 사건에서 서울시와 한화S&C의 협상절차 중단 및 도급계약 금지를 명령했다.
재판부는 “서울시에 소속된 공무원이 입찰 절차 가운데 한국스마트카드의 1차 제안서를 외부인에게 유출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를 경쟁사 관계에 있는 한화S&C가 법에 어긋나는 경로로 제안서를 입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재판부는 “한화S&C가 유일한 경쟁 상대인 한국스마트카드의 정보를 파악하고 유리한 위치를 차지해 입찰에 불균형이 두드러지게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며 “입찰 절차에서 공공성과 공정성을 침해할 수준의 중대한 하자가 있었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법원은 한국스마트카드가 강력하게 요청한 우선협상대상자 변경 요구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 않아 여운을 남겼다.
원래 제2기 서울시 지하철 교통카드시스템 구축 사업은 한국스마트카드 측이 수의계약을 염두에 두며 단독으로 제안한 바 있다. 그런데 이 때문에 형평성 문제에서 문제가 불거지며 결국 경쟁 입찰로 바뀌었다. 경쟁 체제로 바뀌면서 뛰어든 기업이 바로 한화S&C다. 이에 따라 한국스마트카드와 한화S&C의 2파전 양상을 보였으며 마침내 우여곡절 끝에 한화S&C가 사업을 수주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이때부터 문제가 본격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국스마트카드 측이 “한화S&C가 제출한 제안서 내용을 보면 한국스마트카드가 맨 먼저 내놓았던 제안서와 비슷한 부분이 상당수”라며 법원에 우선협상 중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한 것이다.
이와 같은 법원의 판결에 대해 한화S&C 측은 “서울시가 유출한 제안서를 한화S&C가 입수했다는 사실은 정황상 증거일 뿐이며 절대 사실이 아니다”라고 항변했다. 가처분 이의 제기를 신청할 예정인 한화S&C는 “법원 판결에 따라 협상이 중지된 상태일 뿐이지 입찰 결과 자체까지 무효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한화S&C는 IT아웃소싱·IT컨설팅과·SI(시스템 통합)을 주요 사업으로 하는 계열사로 2001년 (주)한화에서 분사했다. 한화S&C의 지분은 김승연 회장의 세 아들인 김동관 씨·김동원 씨·김동선 씨에게로 완벽하게 분배되어 있다.
한화S&C는 그동안 주로 계열사 간 내부거래를 통해 급격하게 성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재벌기업의 ‘일감 몰아주기’ 논란이 거세진 요즘 들어서는 내부거래 비율은 미미한 편”이라는 게 업계의 중평이다.
독자적 자금조달 어려운 상황
아울러 재계 일각에서는 “최근 한화그룹 핵심 계열사들이 회사채 발행을 통해 자금 확보에 집중하고 있다”며 예의주시하는 분위기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최근 업황 침체로 수익성이 크게 떨어진 (주)한화와 한화케미칼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추측도 설득력을 얻고 있어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금융권시장에 따르면 (주)한화는 11월 초 3년 만기 1,500억 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할 예정이다. 또한 같은 시기 한화케미칼은 1,000억 원 규모 회사채를 발행할 것으로 알려졌으며 한화갤러리아도 비슷한 시기 500억 원의 회사채를 발행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자금이 조달되면 한화그룹은 향후 운영자금 및 회사채를 차환하는 용도로 쓰일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업계에서는 “(주)한화의 경우 회사채 만기 도래 시점이 내년 2월이지만 유동성을 미리 확보하기 위해 회사채를 발행한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하고 있다. 한편 한화케미칼의 회사채 만기 도래 시점은 11월 11일이며 회사채 규모는 500억 원 선이다.
그렇지만 현재까지 (주)한화와 한화케미칼은 회사채 발행에서 아직 큰 재미를 못 보고 있는 실정이라 재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주)한화는 11월 초 발행 예정인 회사채에 대한 수요예측을 실시한 결과 불과 약 10억원의 기관 수요를 모집하는 데 머물러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한화케미칼에 대한 수요도 (주)한화와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한화그룹이 회사채 시장에서 수난을 겪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로는 최근 잇따라 불거진 웅진그룹·STX그룹·동양그룹의 연쇄 해체 사태로 인해 A급 이하 회사채에 대한 불안감이 날이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금융계는 보고 있다.
한 경제평론가는 “이런 분위기에 더해 김승연 회장이 지난 8월 배임 혐의로 실형을 선고 받으며 초래된 경영상 공백에 대한 위험성이 한화그룹 전체로 퍼지고 있다”며 “이에 따라 투자자들 또한 아무래도 한화를 향한 투자심리가 그다지 긍정적일 리가 없지 않겠느냐”고 설명했다.
증권가에서는 “한화그룹 채권의 경우 재계 수위권 그룹 계열사와 똑같은 선상에 놓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그렇게 때문에 향후 미매각 부담을 해소하는 데 크게 노력을 쏟아 부어야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처럼 한화그룹이 회사채를 정상적으로 판매하는 데 난관을 겪으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 산업은행에 대한 의존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상황도 문제로 꼽히고 있다. (주)한화와 한화케미칼 모두 회사채 발행 실무를 담당할 대표주관사로 산업은행을 선정했다. “사실상 한화그룹은산업은행의 도움 없이는 자금을 조달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는 게 업계의 전반적인 평가다.
주요 계열사인 한화건설 또한 어려움을 톡톡히 겪고 있다. 김승연 회장의 경영 공백이 장기화되며 누리 알 말리키 이라크 총리가 한화그룹에게 요청했던 100억 달러 규모의 이라크 추가 재건 사업이 답보상태에 놓여있다. 지난 2012년 7월 알 말리키 이라크 총리는 김승연 회장에게 발전 및 정유시설, 병원·학교·군시설현대화·태양광 사업 등 이라크 추가 재건사업을 요청한 바 있다. 이 사업의 규모는 총 100억 달러나 되는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한화그룹 관계자는 “그렇지만 김승연 회장의 경영 공백이 장기화 되면서 이라크 재건 사업을 통한 대규모 일자리 창출과 연관 산업 및 중소 협력사 동반진출이 자칫 무산될 위기에 놓여있는 실정”이라고 하소연했다.
재판도중 퇴정한 김승연 회장
한편 지난 10월 29일 오후 3시 서울고법 형사5부(부장판사 김기정)의 심리로 김승연 회장에 대한 파기환송심 첫 공판이 열렸다. 이는 지난 9월 26일 대법원의 예상치 못한 파기환송 결정으로 비롯된 공판이다.
이날 공판에서 검찰과 변호인 측은 양형 판단의 기준이 되는 김 회장에 대한 배임행위와 관련한 재판부의 법리해석을 놓고 초반부터 치열한 신경전을 펼쳤다. 그런데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이 공판에서 건강상의 이유로 재판을 변호인에게 일임하고 출석한 지 20여분 만에 법정을 나갔다.
변호인은 김승연 회장의 상태에 대해 “기존 당뇨로 인한 우울증과 호흡부전 폐질환 말고도 최근 낙상으로 비롯된 3번 요추압박골절까지 더해 건강이 더욱 악화됐다”며 “현재 이 자리에 있기 힘든 상황이기 때문에 김 회장이 퇴정한 상태에서 재판을 진행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앞서 대법원은 지난 8월 김 회장의 세 번째 구속집행정지 연장 신청을 받아들여 구속집행정지 기간을 11월 7일까지 연장한 바 있다. 지난 10월 25일 김 회장 측은 파기환송심 재판부에 네 번째 구속집행정지 연장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에 재판부는 오는 11월 4일 오후 경에 김승연 회장의 구속집행정지 심문기일을 비공개로 진행하기로 했다. 김승연 회장의 구속집행정지 연장 여부는 11월 5~6일에 결정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