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정치개입 사건을 수사·지휘했던 ‘검찰총장-서울지검장-특별수사팀장’ 등으로 이뤄진 검찰 수뇌부가 풍비박산 났다. 국정원 수사가 검찰의 무덤이라는 비난이 거세지고 있는 이유다. 일각에서는 향후 검찰이 권력의 입맛대로 나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앞으로 어느 검사가 정권과 관련된 의혹에 제대로 손을 댈 수 있겠냐는 것이다. 국정원 수사와 관련, 제기되는 목소리를 담았다.
朴 정권이 ‘책임을 물은 건’ 국정원이 아니라 ‘수사팀’
대질심문 없이 “외압 無”…“표적·편파감찰” 비난 쇄도
“정권 정통성에 위해 되는 수사, 안전 못해” 선례 남겨
‘감찰결과 부당’ 48.6%…국정원 수사 ‘특검 찬성’ 55%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선거에 국가기관이 개입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법과 원칙에 따라 확실히 밝힐 것”이며 “책임을 물을 것이 있다면 묻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 정권이 책임을 물은 것은 국정원이 아니라 국정원을 수사한 수사팀이 됐다. 국가정보원 대선 정치개입 사건을 수사하던 검찰 수뇌부가 연이어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다.
국정원 수사팀 풍비박산
국정원 수사를 진두지휘하던 채동욱 전 검찰총장에 이어 수사팀을 이끌던 윤석열 전 특별수사팀장과 박형철 서울중앙지검 공공형사수사부장이 대검 감찰본부로부터 각각 중징계와 감봉처분을 받았다. 국정원 수사 외압 논란에 휩싸였던 특별 수사팀장이었던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은 감찰 논란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진사퇴 했다.
감찰본부의 감찰 핵심은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수사에 있어 △‘외압이 있었느냐’ △‘항명이 있었느냐’ △‘수사기밀 유출이 있었느냐’다.
감찰본부의 감찰결과는 ‘항명’에 관해서는 철저한 조사가 이뤄진 반면 ‘외압’과 ‘수사기밀 유출’에 대해서는 흐지부지 넘어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감찰본부는 국정원 수사 과정에서 상부의 지휘 없이 영장을 집행하고 공소장 변경 허가 신청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윤석열 전 수사팀장에게 중징계를 내렸다. 일명 ‘항명’이라는 것이다. 반면 감찰본부는 수사팀의 거듭된 영장 집행과 공소장 변경 신청과 관련 외압 의혹을 받고 있는 조영곤 중앙지검장과 이진한 중앙지검 2차장에 대해서는 “외압은 없었다”라고 결론지었다. 결재 지연은 통상적인 의견 조율 과정일 뿐이라는 것이다.
‘국정원 수사 기밀 유출 의혹’에 대해서도 감찰 본부는 조사가 미진한 채 마무리했다. 윤상현 새누리당 수석부대표가 공소장 변경 신청 다음 날 구체적인 수치를 언급하는 등 수사 기밀 누출 의혹이 강하게 제기됐으나 대검 감찰본부는 “윤 의원을 감찰할 권한이 없고 윤 의원 측에 확인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이제 국정원 수사 지휘 라인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이진한 2차장 검사뿐이다. 하지만 이 차장은 처음부터 국정원 선거 개입 수사에 반대 입장이었다고 알려졌다.
감찰결과에 비난 빗발쳐
감찰본부의 감찰 결과에 대해 부실·표적 징계라는 비판이 터져 나오고 있다. 진술이 엇갈릴 경우 대질 신문 등을 통해 추가 조사를 하는 것이 정상인데, 서면 조사만으로 성급하게 내린 결론이라는 것이다. 절차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더구나 윤석열 전 수사팀장의 징계에 대한 감찰위원들의 의견이 엇갈렸음에도 불구하고 징계를 밀어붙였다는 점도 비판의 근거로 거론되고 있다.
박범계 민주당 의원은 “한 쪽(윤석열)은 과다하게 절차위반을 강조하며 중징계를 낸 반면, 다른 한 쪽(조영곤)은 수사방해의 절차위반 문제를 과소하게 결정했다”며 “감찰위원회 내부에서 격론이 있었으나 의결을 못한 채 이렇게 강행한 것으로 아는데, 의견대립이 있었다면 어떤 과정에서 이런 결정이 나왔는지도 보여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 의원은 “그런 과정없이 법무부에 올린 것은 절차적 정의에 반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무소속 송호창 의원도 “외압을 넘어 수사를 충실히 하려는 수사팀장의 행위들이 징계대상이라면 검사 전체를 모욕하는 것”이라며 “법원에서도 공소장변경을 허용한 점은 당시 수사팀의 업무가 적절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이어 “검찰은 이번 징계가 떳떳하다면 국민 앞에 진실된 답변을 해야 할 것”이라며 “이미 성접대 로비에 대한 무혐의, 표적감찰 등 자정능력까지 의심스러운 검찰조직에는 과한 기대인지 모른다”고 꼬집었다.
감찰본부에 대한 비판은 검찰 내부에서도 나왔다. 김선규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 검사는 10일 검찰 내부 통신망 ‘이프로스’에 ‘국정원 수사팀에 대한 정직, 감봉 등 징계건의를 철회하십시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김 검사는 국정원 수사팀의 행위가 중징계 사유에 해당하는지 의문을 제기하며 “국정원 수사팀에 대한 대검 감찰본부의 징계 건의는 철회되어야 하고, 오히려 검사로서 소신 및 국민에 대한 봉사정신을 저버린 채 ‘법과 원칙’에 위반된 결정과 지시를 한 사람들이 징계되어야 할 것입니다”라며 서울중앙지검 수뇌부를 겨냥했다. 이어 “이번 결정이 조직의 불명예를 스스로 덮어쓰는 결정이자 검찰이 권력에 눈치나 보는 집단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며 윤 팀장 징계 철회와 조 검사장 징계를 촉구했다.
국민들도 이러한 결정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2일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에 따르면 검찰의 이번 감찰 결과가 타당하다는 의견은 23.3%에 머물렀다.
반면 부당한 결정이란 응답은 48.6%로 두 배 이상 높게 나왔다. ‘잘 모르겠다’는 28.1%다. 특히 이번 조사에서는 60대 이상을 제외한 모든 연령층에서 타당하다는 답변보다 부당하다는 답변이 높게 나왔다.
일각에서는 이번 감찰이 국정원과 정권에 대한 항복선언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검사 출신인 김희수 변호사는 12일 팟케스트 방송에서 “검찰 전체가 권력에 순치되어 있다”며 “권력의 말을 잘 듣는 검사들은 어떤 징계도 받지 않고 모두 출세했다. 반면 밑에서 말을 듣지 않는 검사들은 나와야 했다”고 질타했다.
이번 감찰에서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것은 이 사태가 검사들에게 일종의 가이드 라인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검찰총장, 서울중앙지검장이라 하더라도 정권의 정통성에 위해가 되는 수사는 안전할 수 없다는 선례를 남겼으며 정치적 중립성을 스스로 포기했다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된 것이다.
향후 국정원 수사는?
국정원 사건을 제대로 파헤칠 수 있을까라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김진태 검찰총장 후보자에 대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13일 열린 김진태 검찰총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 야당의원들은 특검 필요성과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특별수사팀 외압 논란에 대한 김 후보자 의견을 캐물었다.
김 후보자는 야당의 특검 도입을 주장에 대해 반대 입장을 밝혔다. 김 후보자는 “특검은 국회에서 결정해야 할 일”이라면서도 “검찰에서 (국정원 사건에 대해) 수사 중이니 가급적 검찰의 수사를 믿어달라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윤 전 팀장 감찰에 대해서는 “절차에 따라 감찰조사하고 감찰위원회가 충분히 논의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답했다.
김 후보자는 ‘검찰총장이 된 다음 청와대나 정권 실세의 외압이 들어오면 어떻게 하겠느냐’라는 질문에 “오늘날 같은 법치가 제대로 되는 나라에서 법을 어겨가며 외압을 넣을 사람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김 후보자의 답변에도 불구하고 야권은 김진태 검찰총장 후보자와 청와대 김기춘 비서실장과의 ‘인연’을 고리로 검찰의 독립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더구나 야권은 청와대의 ‘채동욱 전 검찰총장 찍어내기’ 논란 후 임명된 인사라는 점에서도 김 후보자가 검찰총장으로서 외풍을 막아내고 국정원 수사를 종결할 수 있을지 의심 하고 있다.
국정원 수사에 대한 불신이 확산되는 가운데 국정원 수사에 대한 특별검사제 도입을 묻는 질문에 절반이 넘는 응답자가 특검을 도입해야 한다는 여론조사가 나왔다. 검찰의 국정원조사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담긴 결과다.
11일 여론조사기관 <조원씨앤아이>에 따르면, 9~10일 이틀간 전국 19세 이상 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특검 찬성 입장은 54.9%로 조사됐다. 이에 반해 특검에 반대한 응답은 36.3%에 그쳤다. 특검 찬성 의견이 특검에 반대한다는 의견보다 18.6%p 높게 나타난 것. 무응답은 8.8%였다.
한편 국정원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자 시민사회가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사건에 대해 ‘국민공소장’을 작성하고 ‘국민배심원단’을 모집해 모의 법정을 열기로 했다.
‘국정원 정치공작 대선개입 시민사회 시국회의’(시국회의)는 13일 “국정원과 국방부를 중심으로 전개된 국가기관의 총체적 불법 대선개입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노골적으로 방해받는 상황에서 특검은 당연히 필요하다”며 “특검의 마중물이라는 차원에서 국정원·국방부 등 국가기관에 의한 총체적 대선개입 사건을 규명하기 위한 범국민적 책임 추궁 활동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12월 초까지 ‘국민공소장’을 작성하고 자발적인 ‘국민배심원단’을 모집해 모의 법정인 ‘국민법정’을 열 계획이다.
시민사회의 이러한 노력이 국정원 사건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을 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