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 멕시코)
The Two Fridas 두 명의 프리다 1939년 작
800*857cm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 멕시코). 그녀는 화가, 천재, 천재의 고독한 아내, 혁명가, 공산주의자, 장애자, 약물중독자, 양성애자, 그리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였다. 어느 하나 이 사회에 어울리는 조건이 아니지만 그녀는 그것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표현했다’
우리는 흔히 예술작품을 볼 때 창작자의 일생과 작품과의 연관성을 생각하며 창작자의 인생의 어느 시기에 나온 작품과 그것에 얽힌 이야기에 열광한다. 직접 만나 볼 수 없고 평범한 이들과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 생각되는 예술가에게도 세상사의 희로애락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매력적이다. 또는 그들만이 가지는 강렬하고도 파괴적인 에너지를 우리의 인생이 망가지는 위험 없이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은 일탈성에 대한 매혹을 보여준다. 예술작품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경외감은 바로 매혹이다.
1907년 독일인 아버지와 스페인계 멕시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프리다 칼로(독일어로 평화를 뜻한다)는 7세 되던 해 소아마비를 앓고 왼쪽 다리가 불구가 되었다. 그녀의 일생을 절망으로 몰고 간 끔찍한 사고를 당한 것은 18세 때. 집으로 가기 위해 탄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는 사고로 그녀는 다리, 척추, 자궁을 크게 다쳤고 1년 간 깁스를 한 채 침대에 누워지냈으며 평생 30번이 넘는 대수술을 해야 했다.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를 위해 가족들은 침실 천장에 큰 거울을 달아주었고, 그때부터 프리다 칼로는 그녀 자신을 모델로 한 자화상에 열중하게 된다.
“나는 병이 난 것이 아니라 부서졌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은 행복했다”고 이야기한 것처럼 그림은 그녀의 의지의 산물이다. 이 때의 사고는 고통을 극복하고자 거울을 통해 자신의 내면 심리를 관찰한 프리다 특유의 자화상이 나오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누워지내는 동안 러시아 혁명에 관한 책을 읽으며 공산주의 모임에 참석한다. 그 곳에서 프리다는 멕시코 현대미술 최고의 거장인 디에고 리베라를 만난다. 어린 시절부터 디에고에게 관심을 보이며 친구들에게 “디에고의 아이를 낳고야 말 것”이라고 외쳤던 그녀였다. 벽화작업을 하고 있는 디에고에게 “내려와서 내 그림을 보라”고 소리친 휠체어의 작은 여자.
프리다는 이미 두 번의 이혼경력이 있는 식인귀라는 별명을 가진 42세의 바람둥이 디에고와 결혼한다. 그녀의 부모가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합’이라 부른 이 결혼은 프리다에게 많은 것을 상심케 하고 또한 많은 것을 얻게 하였다. 훗날 프리다는 “내 평생에 겪은 두 차례의 대형사고는 전차가 나를 들이받은 것과 디에고를 만난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디에고의 끊임없는 외도, 특히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불륜의 관계를 맺는 등 디에고는 그녀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안겨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낳아 디에고를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그녀는 세 번에 걸친 유산으로 소박한 꿈마저 박탈당한다.
그 당시 그녀의 그림은 탯줄, 죽 혹은 뿌리 같은 상징물로 흘러가 사라진 아이들, 곧 희망의 사라짐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유산으로 고통받을 당시 그림들은 그녀 인생의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자신은 그저 살아가기 위해 그림을 그려야 하는 여자라고 말했던 프리다 칼로. 그녀의 그림은 고통의 기록이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인 앙드레 부르통에 의해 초현실주의 회화로 주목받기도 했지만 그녀 자신은“내 그림은 초현실주의가 아니다. 나는 꿈이 아니라 내 현실을 그리는 것이다”라고 반발하며 자신의 작품 세계의 정체성을 지켰다.
그 후 공산당 입당과 탈당, 미국 생활과 환멸, 트로츠키와의 교류, 다리 절단, 디에고와의 수 차례의 별거와 재결합, 그리고 이혼, 우울증, 신경쇠약, 두 번의 자살시도, 처음이자 마지막인 개인전 등 그녀의 일생은 연극적으로 흘러갔다.
그녀는 1954년 일기장 마지막 페이지에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이란 말을 적어놓고 세상을 떠났다.
붙어 있는 아치형의 짙은 눈썹, 희미한 콧수염으로 중성적이고 원시적인 매력을 풍겼던 프리다 칼로. 화려한 꽃을 머리에 달고 장신구로 치장하고 평생 화려한 전통 의상을 즐겨 입으며 그녀는 삶을 하나의 축제로 받아들였다. 휠체어를 탄 채 시위 현장에 나섰던 혁명가였으며 멕시코 고유 문화의 전통성을 찾으려던 그녀는 지금 우리에게 잊혀지지 않는 강렬한 인상을 풍긴다.
혹자는 그녀의 그림을 ‘폭탄에 둘러진 리본’이라 표현한다. 이마에 난 제 3의 눈, 화면에 낭자한 핏줄 등 사람을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당황하게 만드는 그림은 현대 미술사를 통틀어도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녀는 늘 마음 속에 자신의 분신을 품었고 자화상을 통해 그런 내면의 분신과 대화를 나누었다. 흔히 자화상은 나르시시즘의 한 표현이라 여겨진다. 자신을 냉철하게 분석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있는 자화상 속에서 그녀의 자화상은 남다르다.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다는 진부한 말. 그 말에 가장 합당한 화가, 프리다 칼로는 도취되지도, 자학하지도 않는 솔직함으로 정면을 응시한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흔든다.
글/ 남정민 기자 njm8309@sisafoc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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