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은 오직 하나뿐. 카리스마는 계속된다
영웅은 오직 하나뿐. 카리스마는 계속된다
  • 남정민
  • 승인 2003.08.12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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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공개유물 특별展 진시황>
“시황제는 즉위하면서부터 여산에 능을 만들기 시작했다. 통일 후에는 70만 명을 동원하여 땅을 깊이 파고 구리를 부어 곽의 둘레를 메웠으며, 지상의 궁전과 관청, 각종 기이한 물건을 옮겨와 가득 채웠다. 자동으로 발사되는 활을 장인에게 만들도록 하여 황릉을 파내거나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바로 쏘게 했으며,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들고 기계장치로 흐름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위로는 별자리를 갖추고 아래로는 땅의 형태를 갖추었다.” -사마천의 史記 중에서 지난 1월 초 장예모 감독의 <영웅>이 개봉되어 인구에 회자되었다. 중국 최초로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황제, 진시황에 대한 색다른 시각과 ‘진정한 영웅’의 천하통일이라는 과업을 위해 진시황 암살을 포기하는 자객들의 이야기구조 뿐 아니라 대륙 특유의 스케일과 주인공들의 각기 다른 심리상태를 상징하는 색의 묘사 특히 중국정부에 반골 기질로 맞선 문화혁명 이후 제 5세대 감독의 대표격인 장예모가 중국, 즉 CHINA의 절대적인 인물 진시황에 대해 시종일관 찬양조의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 더욱 화제가 되었다. 진정한 영웅은 하나이며 그 영웅이 어지러운 시대를 마감시켰기에 진시황의 모든 것이 초인적으로 그려진 이 영화는 중국인들이 진시황제에 가지는 변하지 않을 경외심을 읽을 수 있다. 진시황(秦始皇). 진시황은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는 과업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중국역사상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통일제국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인해 폭군으로 부각되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중국이 전국 7웅에 의해 분열되어 서로 각축을 벌이던 기원전 259년에 태어난 그는 불과 13세의 어린 나이에 진왕에 즉위하였다. 놀랍게도 그의 통일사업은 기원전 230년부터 221년까지는 아주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기원전 8세기부터 분열된 중국이 하나의 통치체제 밑에서 역사를 전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그는 중앙집권적 전제정치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그는 황제라는 존호를 최초로 제정하고 스스로 始皇帝(시황제)라 칭했다. 그는 또한 불로장생(不老長生)을 꿈꾸듯, 통일제국이 영구히 존속하도록 온갖 노력을 경주했다. 효과적인 지배를 위한 각종 통일정책이 이어졌다. 새로 편입한 지역에 군현제를 실시하여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를 꾀하고, 통일제국의 능률적 운영을 위해 도량형과 화폐를 통일했으며, 다른 글자체로 쓰여지던 여러 문자도 하나로 통일한다. 뿐만 아니라 도로망을 전국적으로 정비하고 도로 폭을 일정하게 하기 위해 수레의 차폭도 통일시키는 등 국가가 발전할 수 있는 사상과 산업의 기본 틀을 확고히 했다. 그러나 무리한 만리장성 축조, 아방궁 건설과 진시황릉 건설, 분서갱유 (焚書坑儒)등 전형적인 독재자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 후대인 들에게 상반된 평가를 받기도 한다. 진시황제가 기원전 210년 50세의 나이로 사망한 후 얼마 못되어, 진 제국의 장수도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고 보고 나서도 더욱 믿을 수 없다 이번 삼성동 COEX 3층 특별전시장에서 10월 26일까지 열리는 <미공개유물 특별展 진시황>은 진시황의 카리스마가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기회다. 1994년 경복궁에서 열린 첫 번째 전시회 이후 진시황릉에서 발굴된 실물 전시회는 10년만이다. 이번 전시회는 1998년에서 2001년까지 발굴한 중국본토인들에게 아직 공개되지 않는 미공개유물의 세계최초 일반전시이며 우리에게 익숙한 병마용 이외에도 진시황릉이 전쟁의 세계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문무가 조화된 세계를 꿈꾸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여 그 의미가 크다. 1998년 발굴된 돌 갑옷과 돌 투구는 진 대에는 투구가 없다는 기존의 고고학 사실을 바꾸었으며 1999년 발굴된 백희용(百戱俑)은 궁정오락을 하는 광대들로 밝혀졌다. 실물크기에 육박하는 크기와 더불어 근육의 표현과 놀이기구의 흔적 등이 눈길을 끈다. 또한 청동으로 만든 학과 기러기, 오리 등과 함께 발견된 좌용(坐俑)은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다. 도용들이 원래 채색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채색용두, 중국의 진품 국보 27점, 아직도 발굴 중인 제 7호 갱의 유물, 시대의 성격에 따라 진과 한의 도용의 예술적 변화를 비교해볼 수 있어 흥미롭다.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2000년에 발굴된 문관용(文官俑). 채색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 문관용들은 병마용들과는 사뭇 다른 표정과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종이가 없던 당시 붓 대신 나무에 글자를 기록하기 위한 칼과 숫돌을 허리춤에 차고 있는 이들 문관용은 호전적이고 당장이라도 앞으로 뛰쳐나올 듯한 병마용들과는 달리 이지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으며 차분한 눈길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하다. 이들 문관용의 발굴로 인해 진 제국이 군사력과 더불어 철저한 행정지배체제를 갖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진시황이 전 국토를 순행했던 청동마차, 이미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제 1,2호 갱의 병마용들, 진의 예술품 등 다채로운 코너로‘세계 최초의 미공개 유물전’이라는 이번 전시회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1974년 우물을 파던 농부들에 의해 그 위용을 드러낸 진시황릉. 진시황의 즉위부터 시작되어 무려 398년에 걸쳐서 수십만 명이 완성한 이 세계 8대 불가사의는 진시황릉의 극히 일부이며 발굴은 황릉의 중심에도 와 닿지도 못한 실정. 죽음을 그렇게 피하려 했으면서도 한편 열세 살에 즉위하면서부터 자신의 무덤을 판 진시황은 죽어서야 비로소 영생불사의 꿈을 이룬다. 지상의 제국을 그대로 옮겨놓은 거대한 지하제국의 황제로서, 극단적인 묘한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진시황. <미공개 유물 특별展 진시황>를 통해 지상이 아닌 지하에서도 영원하길 바란 한 영웅의 욕망을 만나볼 수 있다. 글/ 남정민 기자 njm8309@sisafoc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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