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숲길을 잠시 걷는 것만으로도 도심 속 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비가 한 차례 내리더니 날씨가 본격적으로 쌀쌀해진다. 옷 깃 속으로 파고드는 바람의 예각이 날카롭다. 나도 모르게 햇볕이 따뜻한 곳으로만 찾아서 걷게 된다. 사계절 중 어느 계절을 가장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따뜻함을 진짜로 느낄 수 있어서 겨울이 가장 좋다는 선문답 같은 답을 던진 친구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오늘 소개할 코스는 역시 간단한 산책 겸 나들이 코스다.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별로 찾아볼 생각을 하고 있지 않던 곳 두 군데. 식사 후 뒷산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가볍게 나설 수 있는 곳 두 군데를 소개 하겠다. 이번 주나 다음 주를 지나 더 차가워진 바람에 단풍 입사귀가 모두 떨어지기 전에, 가을 막바지 단풍 바라지하는 기분으로 나설 수 있는 산책길들이다.
보통은 덕수궁 옆의 성공회 성당에서 출발해서 덕수궁 안쪽 오솔길과 덕수궁 정문 왼쪽의 정동길을 돌아서 광화문까지 내려온 후 계속해서 경복궁 - 삼청동으로 이어지는 순서로 코스를 잡지만, 그 반대도 좋다. 길은 같은 길이라도 다른 방향에서 걷게 될 때 또 다른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지하철 2 호선 3 번 출구로 나가면 현재 공사 중인 덕수궁 정문대신 임시 출입구로 개방 되어 있는 출입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
그길로 끝까지 올라가면 마당 세실 극장과 영국 대사관이 있고, 그 중간에 성공회 성당 마당으로 들어설 수 있는 문이 있다. 이쪽으로 들어서면 한 바퀴 돌고 같은 곳으로 돌아 나오게 되므로, 그것 보다는 조선일보 호텔을 지나 조선일보 미술관 들어가는 길 쪽, 그러니까 광화문 빌딩 왼편의 골목길로 들어서면 조선일보 미술관이 나오고, 조금 더 지나가면 성공회 수녀원 건물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성공회 성당 뒷마당으로 들어설 수 있다. 성공회 성당은 한국에 존재하는 몇 되지 않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 건축물로, 하늘에서 보면 정확히 대칭인 십자가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1926 년 완공되었고, 1993 원설계자인 아더 딕슨의 설계도가 발견 되어서 그것에 근거해서 대성당 부분을 신축했다. 다만 신축하면서 추가된 알루미늄 샤시로 만든 지하 출입구 부분은 살짝 눈감고 지나가는 편이 좋다. 아무리 좋게 봐도 원래 건물에 어울리지 않는 덧칠 부분이 못내 아쉽다.
성공회 성당은 가을 단풍으로도 유명하다. 고풍스러운 사제관 주변의 울창하고 오래된 나무들이 제각각 뽐내는 가을 단풍의 자태가 고혹적이다. 특히 아기 손바닥만 한 크기에 만지면 손끝에 선혈이 묻어 날 것처럼 새빨간 단풍나무는 가을 이면 버릇처럼 성공회 성당을 찾아 발길을 돌리게 만드는 요소다. 성당 왼쪽 편으로 돌아서 마당 세실 극장 사이 길로 내려오면 성당 정문으로 나올 수 있다.
마침 덕수궁 정문 공사 중이라 임시로 개방된 출입구가 가깝다. 입장료 천원을 지불하고 안쪽으로 들어선다. 우연이겠지만 원래 입구 쪽 으로 들어온다면 별로 찾아 볼기회가 많지 않은 덕수궁 내부의 오솔길을 만나 볼 수 있다. 덕수궁 정문 방향에서 보면 왼쪽에 있는 이 산책길은 원래는 없던 것이었는데 추가적으로 조성된 곳이다.
그리 길지 않은 코스지만 울창하게 하늘을 가린 단풍 숲길을 잠시 걷는 것만으로도 도심 속 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개인적으론 경복궁 보다는 덕수궁을 더 좋아한다. 경복궁은 과시적이고 좀 으리으리한 느낌인데 덕수궁은 그것 보다는 좀 더 소박하고 조용하다. 물론 규모도 좀 작은 것은 사실이다.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면 덕수궁의 제일 뒤에 있는 건물로 나오게 된다. 그 길을 계속 따라 내려오면 분수대가 나온다. 건물들을 꼼꼼히 들여다보아도 덕수궁을 다 돌아보는 데에는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 조금 지친 다 싶으면 중간 중간 벤취에 앉아서 고궁의 가을 정치를 맛보면서 쉬어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분수대를 따라 내려가는 길 오른 편으로 보루각 자격루 (물시계)가 있고 그 뒤쪽으로 오래된 은행나무가 흐드러지게 노란 은행잎을 떨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후 1 시 경 찾아가면 꽤 따뜻한 초겨울 햇살을 받으면서 낙엽을 밟을 수 있다. 그래도 바람은 차가우므로 옷차림은 따뜻하게 준비하는 것이 좋다.
다시 입구로 나와 정동 길 쪽으로 올라간다. 정동 길에서는 이동하는 순서대로 서울 시립 미술관과 정동 제일 교회, 이화여고를 만나볼 수 있다. 정동 제일 교회는 한국 최초의 기독교 교회 건축물로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지만 일반적인 고딕양식의 위압적인 느낌 보다는 낮게 웅크리고 있는 소박한 인상을 준다. 오래된 목제 아치형 창틀의 모습이 정겹다. 정동 길에는 노란색 단풍나무와 느티나무, 상수리나무, 살구나무 등 키 큰 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길이 좁고 오른쪽으로 높은 건물들이 많이 세워져 있는 탓에 바람이 좀 거센 것이 흠이다. 하지만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서 만날 수 있는 오래된 건물들에서 느낄 수 있는 정취는 저절로 길을 걷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줄 것이다. 정동 길을 돌아 나오면 광화문 시네큐브 앞을 지나 광화문 사거리에서 길을 건너 우측으로 방향을 잡아 계속 올라간다. 란 사진관 앞 횡단보도를 건너 계속 올라가면 삼청동 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찾을 수 있다. 삼청동 입구의 진선 북 카페 바로 오른쪽에 갤러리 진선이 있다. 아주 작은 곳이지만 몇 주 단위로 기획전이 열린다.
거의 대부분의 기획전은 관람료가 무료이다. 1 층의 아티스트 샵 에서는 젊은 작가들의 독특한 개성이 담긴 작품들도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이 가능하다. 덕수궁에서 삼청동 입구까지 느긋하게 걸으면 대략 5 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걷느라 수고한 다리도 풀어줄 겸 진선 북 카페나 근처 조용한 카페를 찾아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면서 하루를 마무리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저작권자 © 시사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