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사실상 철도민영화의 수순으로 해석되는 세계무역기구(WTO) 정부조달협정(GPA) 개정을 재가한 것으로 뒤늦게 알려져 파문이 일고 있다. 특히 이 문제에 대해 야권은 물론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까지 ‘반드시 국회 비준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지만, 박 대통령은 이를 무시하고 밀실 재가를 해 논란이 거세다.
야권에서는 이 같은 박 대통령의 밀실 재가 문제가 마치 2008년 이명박 정권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때와 유사하다며 제2의 촛불 경고까지 보내고 있다. 게다가 철도민영화는 그 파장 때문에 불도저정권이라 불렸던 이명박 정권에서조차 함부로 밀어붙이지 못했던 것이어서 파문의 강도는 더욱 클 것으로 예상되기도 한다. 국정원 등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의혹 문제로 국민적 불신이 팽배한 가운데, 이 같은 밀실 협정ㆍ재가 사실까지 알려져 정국은 또 다른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모습이다.

◆열흘 만에 쥐도 새도 모르 게 속전속결
지난 4일, 프랑스를 방문 중이던 박근혜 대통령은 경제인 간담회 자리에서 “정부조달시장을 개방해 주었으면 좋겠다. 특히 철도관련 정부 조달 시장을 개방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프랑스 기업인들의 질문에 “도시철도 시장개방과 관련해서는 WTO의 정부조달협정의 국내 비준을 추진하고 있고 이 비준이 통과되면 연내 WTO에 비준 기탁서를 제출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며 “그렇게 되면 도시철도 분야의 진입 장벽도 개선될 수 있다고 본다. EU 역시 정부조달협정에 대한 비준을 조속히 추진해 주길 바란다”는 입장을 밝혔던 바 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인 5일, 정부는 박 대통령의 발언을 기다렸다는 듯이 국회 비준 동의 없이 GPA 개정안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해버렸다. 박근혜 대통령도 열흘 후인 지난 15일 소리 소문 없이 이 같은 개정안에 대해 재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는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 또는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의 체결-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고 명시한 헌법 60조 1항이나 ‘국회는 서명된 조약이 통상조약에 해당한다고 판단할 경우 정부에 비준 동의안의 제출을 요구할 수 있다’는 통상절차법 제13조 3항이 있음에도 박근혜정부는 이를 모두 묵살한 셈이다.
이와 관련, 정의당 박원석 의원은 26일 오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근혜 대통령이 프랑스 기업인들 앞에서 한국의 공공철도시장을 개방하겠다는 말씀을 한 이후 그와 같은 중요한 국제조약은 반드시 국회비준을 거쳐야 한다는 점을 거듭해서 문제제기 해왔다”며 “문제제기가 있은 이후 제1야당 원내대표를 포함 많은 국회의원들이 국회비준동의를 거칠 것을 요구했고, 소관상임위인 산업통상자원위에서 공개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이 이뤄지고 여야 간사간에 협의를 거쳐 추후 산자위에서 의결할 것까지 논의가 이뤄졌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런데 오늘(26일) 확인한 바로는 지난 11월 5일 국무회의에서 비준 동의안을 처리한 지 열흘 만인 11월 15일 대통령의 재가가 이뤄진 사실이 확인됐다”며 “바로 오늘 오전까지도 산업통상자원부장관이 국회에 출석해 이에 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는데, 또 다시 밀실에서 대통령이 이 중요한 통상협상을 국회 비준동의 없이 재가한 것”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박 의원은 이어, “이제 실무적인 절차로 WTO 사무국에 이 비준동의안을 기탁하기만 하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한국의 공공철도시장은 외국기업들에게 개방이 되는 것”이라며 “명백히 대통령이 헌법과 통상절차법에 명시되어 있는 국회비준동의권을 무시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 의원은 거듭 “이미 국회의원들이 공공연히 거론하고 있고 국회에서 비준동의를 받을 것을 요구하고 있고, 해당 상임위에서 토론까지 이루어질 그런 사안인데 국회와는 아무런 협의 없이 비준동의안 재가를 마쳤다”며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왜 이토록 중요한 사안을 국익과 민생, 우리 산업과 연계된 중대한 사안을 이렇게 졸속으로 밀실에서 통과시키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비난을 이어갔다.
특히 그는 “WTO 정부조달협정 개정이 이대로 계속 진행된다면 대한민국 통상의 역사에 또 한 번 매국적 협상으로 또 한 번 퍼주기 협정으로 기록될 것이 분명하다”며 “기술력과 자본력에 앞선 외국기업들에게 개방되게 되고 이것은 철도 민영화로 연결될 우려가 깊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국민 반대여론이 높고 박근혜 대통령 또한 지난 대선 시기 국민이 반대하는 민영화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얼마 전 국민 100만 명이 서명한 서명용지가 청와대에 전달되기도 했다”며 “이런 중대사안을 헌법과 법률상 권한을 가지고 있는 국회와 협의 없이 정부가 밀실에서 졸속으로 처리하는 것은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는 행위이며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반드시 국회 비준동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민주당 장하나 의원도 같은 날 국회 기자회견에서 “지난 14일 국회 운영위 국감 당시 협정 개정안이 국내산업 영향평가 등을 거치지 않은 채 비공개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데 강하게 문제제기를 했으나, 박 대통령은 바로 다음 날 이를 재가했다”며 “청와대는 서면 답변에서 재가에 관한 이야기 없이 다음 달 3일부터 발리에서 개최되는 9차 WTO 각료회의 전에 협정을 처리하겠다는 의지만 밝혔으나, 이미 재가가 이뤄진 상황”이라고 청와대 은폐 의혹까지 제기했다.
장 의원은 이어, “외국의 철도기술과 관련 자본 유입이 우려되는 등 국내 산업의 피해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국민 모르게 협정 개정안을 재가한다면 더 큰 분란이 있을 것”이라며 “당장 재가를 철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이 국회 운영위 전체회의에서 “법제처의 유권 해석을 받아 국무회의 통과 후 대통령이 제가한 것이다. 밀실이라는 것은 이해를 못하겠다”며 국회 비준동의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을 펼친 것과 관련해서도 “법제처의 유권해석만 믿고 밀실 처리한다면 국회 차원에서 비준동의안 제출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발의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대선 때 사회적 합의 없이 민영화 없다더니…

외교통일위원회 야당 간사인 심재권 의원도 “정부조달협정 비준처리를 받지 않은 것은 불법”이라며 “국회에 비준을 받은 어떤 의안도 개정할 때는 똑같이 국회 비준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법리적으로 해석해 정부를 비판했다.
민주당 당 차원에서도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특히, 전병헌 원내대표는 박 대통령이 밀실 재가를 하기 이틀 전인 지난 13일 의원총회에서 “국회의 동의와 보고절차를 거쳐야 할 사안까지도 슬그머니,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넘어가려 하고 있다”며 “11월 4일 박근혜 대통령이 공공조달시장을 외국기업에 개방하겠다고 밝힌 것과 때맞춰서 11월 5일 국무회의에서는 철도민영화를 위한 정부조달협정 개정안을 처리해 버렸다”고 지적했던 바 있다.
당시, 전 원내대표는 “GPA 개정안은 국가기간산업인 철도민영화를 허용하기 때문에, 이는 철도요금 인상 등으로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며 “따라서 국회 비준동의가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이때 전 원내대표는 “국회 비준동의가 필요 없다고 해석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국회는 서명된 조약이 통상조약에 해당된다고 판단할 경우 정부에 비준동의안의 제출을 요구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며 “따라서 민주당은 해당 상임위에서 1차적으로 정부에 국회 비준동의안을 제출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더불어 통상절차법 9조에는 통상조약 체결의 경제적 타당성 검토 부분과 영양평가에 해당하는 사항을 국민과 국회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고 정부가 반드시 국회에 보고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이 같은 야당의 지적을 묵살한 채 이틀 후 개정안을 재가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26일 오후에서야 알려지자, 민주당은 27일 오전 최고위원회의에서 또 다시 박 대통령에 대한 비난을 쏟아냈다.
전병헌 원내대표는 이와 관련해 “국회 비준 동의권을 완전히 무시한 채 쥐도 새도 모르게 비밀로 처리한 것은 중대한 정치적 오류이고 헌법 위반”이라며 “우리 산업기반 잠식은 물론 요금 인상으로 연결돼 국민 부담을 가중하고 국익에 반하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는 ‘사회적 합의 없이 철도민영화는 없다’는 대선 때의 약속 위반이자, 문제를 지적한 국회를 속이고 국민까지 속이는 행위”라면서 “박 대통령은 매국적 비준 재가를 즉각 철회하고 헌법에 따라 국회 비준 동의안을 제출하라”고 강력히 촉구했다. 특히, 전 원내대표는 “이를 거부하면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 철도 주권을 내어준 잘못된 통치행위자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고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며 초강수를 두기도 했다.
외국과의 통상 문제를 둘러싼 밀실 협정과 국민 무시 행태가 2008년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 국민 공분을 일으켰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파문과 유사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