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집,녹화사업' '실미도 사건'에 대한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발표
지난 80년대 운동권 대학생들의 강제징집은 5공 정권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관계기관을 총 동원해 단행했던 것으로 밝혀졌으며, 실미도 부대는 군 특수부대를 합법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중앙정보부 지시에 따라 68년 1·21 사태 이후 북한을 응징하겠다는 목적으로 창설됐고 총 31명의 부대원 가운데 생존자는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해동)가 19일 학원 강제징집,녹화사업과 실미도사건의 진상조사 중간 발표를 통해 밝힌 사건의 진상들이다.
◇강제징집-녹화사업◇
「강제징집」은 80년 9월계엄하 포고령 위반자 64명을 동시 입영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휴학 및 제적자들을 조기 입영시켜 오다가 81년 12월 '소요관련 대학생 특별조치 방침'으로 제도화되었으며, 80년대 중반부터 84년까지 학원소요 등과 관련돼 제적,정학,지도휴학 처리된 대학생들을 강제 입대시킨 것을 말한다.
강제징집자는 과거 정부 발표인 447명 과는 달리 1,100여명이 넘었다고 과거사 진상위원회는 밝혔다.
81년 4월2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소요관련 학생들을 전방부대에 입영조치하라'는 지시를 국방부장관이 메모하여 국방차관 등을 거쳐 병무청장에게 전달했으며, 같은해 12월1일 국방부가 마련한 '소요관련 대학생 특별조치 방침'으로 강제징집을 제도화했다.
이 과정에서 내무부(경찰)는 학원정보 활동 및 수배자 검거를 통해 징집대상을 선별한 것은 물론 당사자와 그 가족들에게 입대를 강요했다.
문교부는 '학원정책 심의관실'을 확대,개편해 대학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했고, 각 대학은 '지도휴학제'를 통해 강제징집 대상자를 학적변동 처리했다.
당시 국방부(병무청)는 이들에 대한 신체조건 및 신체검사 절차를 무시한 채 징집했다. 군에서는 강제징집자를 '특수학적 변동자'로 분류, 병적기록부 상단에 '특수지원'이나 '특수학변'이란 적색고무인을 날인해 최전방에 우선 배치했고, 신상관리를 했다. 일부는 정상 절차에 따를 경우 징집대상 제외자임에도 입영시킨 사례도 있었다.
「녹화사업」은 기무사의 전신인 보안사가 82년 9월부터 84년 12월까지 강제징집자 900여명과 운동권 출신 정상 입대자 300여명을 대상으로 '좌경오염 방지' 명목 하에 개별심사를 통해 순화하고, 그 일부를 학원첩보 수집에 활용하면서 사용한 위장명칭 사업이다.
보안사는 82년 5월 '좌경 의식화 활동 지침'을 마련했고, 같은해 9월 '전담 공작과'(후에 심사과로 호칭)를 신설했다.
심사과는 82년 9월부터 4개월 동안 병사 32명을 선정, 각 1주일간에 걸쳐 심사하고 그 결과를 평가한 후 계획을 수립한 후 본격화됐으며, 심사결과 순화됐다고 판단된 병사에게는 학원동향 임무, 즉 '프락치 활동' 임무를 부여했다.
이 과정에서 보안사는 고시 출신 및 사회과학 전공 단기장교 23명을 '심사장교'로 활용하기도 했다.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은 시행과정에서 6명의 의문사가 발생하고 정치쟁점화되면서 84년 12월19일 심사과 해체와 함께 폐지됐다.
◇실미도 사건◇
「실미도 사건」은 부대원 모집관들은 '교육수료와 동시에 하사관 또는 소위로 임관시켜 주고 상당액의 특수수당을 지급하겠다'는 등의 조건을 내세워 지원자들을 유인했다.
31명의 부대원 중 7명은 68년부터 70년까지 실미도 탈주 전 훈련과정에서 사망했으며, 나머지 22명은 71년 8월23일 실미도 탈주사건으로 사살(16명)되거나 중상 후 자결(2명), 사형(4명) 등으로 사망했다.
실미도 부대원들은 병적 관리대상자가 아니었고, 체포된 4명도 민간인 신분으로 재판을 받고 사형당했다.
영화로 잘 알려진 실미도부대는 1968년 1.21사태 이후 북한의 특수부대를 능가하는 역량을 양성해 북한을 응징하겠다는 목적으로 박정희 정권 시절 당시 중앙정보부의 지시에 의해 창설됐으며 공군에서 관리한 사실이 확인됐다.
31명의 부대원은 영화에서 특수범으로 그려졌지만, 7명 외에 전과가 전혀 없었고 7명도 가벼운 전과자였다.
탈출 과정에서 숨진 스무명은 유족들에 통보도 없이 벽제 시립묘지에 가매장됐으며, 최근 유해 19구가 발견됐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12.12, 5.18 사건과 삼청교육대 사건 등 2건에 대해서는 내년 상반기에 중간결과를 발표할 예정이지만 이를 바탕으로 향후 추가로 밝혀져야 할 부분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지적된다.
우선 녹화사업을 지시한 주체가 누구이고 어느 선에서 이를 입안했는지 밝혀내야 한다.
강제징집 자체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직접 지시에 의한 것으로 밝혀진 만큼 이와 연관된 녹화사업 역시 당시 청와대 등 최고위층이 연관되어 있을 개연성이 높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또 보안사 심사과가 1984년 12월 해체되어 그 이후에는 녹화사업이 없었다고 했지만, 과연 하나의 담당과가 폐지됐다 해서 당시정권이 이를 일거에 그만뒀겠느냐 하는 의문도 제기된다.
특히 녹화사업은 그 시행과정에서 6명이 의문사하면서 재야 및 야권 등에서 정치쟁점화하자 마지못해 폐지된 것인 만큼 또다른 부서에서 이를 편법으로 진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1980년대 후반까지 각 대학에서 프락치 의혹이 끊이지 않았던 사례를 보면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한편 과거사위는 현재 대략적인 숫자만 거론되고 추정하고 있지만 정확한 명단은 아직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녹화사업 대상자들을 정확히 파악해 진상규명과 함께 이들에 대한 보상작업을 조속히 실시해 이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줘야 하는 책임도 잊어서는 안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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