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지난 1997년 도로명주소 도입 방안을 발표한 후 오랜 기간동안 준비한 끝에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도로명주소가 시행됐다. 정부는 ‘국민들의 편의성 증대’와 ‘경제효과 기대’ 등을 내세우며 야심차게 내놓았지만 일부 전문가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탁상행정의 실패작”이라며 비난하고있다. 국민들 역시 “오히려 헷갈리기만 할 뿐”이라며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정부가 17년이라는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 세상에 내놓은 도로명주소가 국민에게 외면받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아봤다.
전문가 “구획정리 먼저 실시했어야…”
‘세종로’ 전국 43곳…지역특성 사라져
정부 “제도 정착되면 자연히 해결될 것”
도로명주소란 종전 사용되던 지번 주소에서 동·리, 지번, 아파트 이름 대신 도로명과 건물번호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도로에 이름을 붙이고 주택·건물에는 도로를 따라 순차적으로 번호를 붙여 도로명과 건물번호에 의해 표기하는 방식으로, 정부가 약 4600억원의 예산을 들여 도입했다.
그러나 국민 대다수는 ‘우리나라와 맞지 않는 방법’ 이라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후 2년 5개월여 간의 병행사용 기간을 거쳐 올해 첫 전면도입이 실시됐지만 국민들은 여전히 불편을 호소하며 제도 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우리나라 블록간 거리 넓어 도로명주소 부적합
전문가들은 국민들의 이러한 불편 호소에 대해 공감하는 분위기다.
건국대학교 부동산학과 이현석 교수는 22일 <시사포커스>와의 전화에서 “정부가 밝힌 경제효과 기대치나 국민 편의성 증대 등의 취지에 대해서는 좋은 제도라 할지라도 실생활과 연관되지 못하는 제도는 불편함을 야기시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미국 등 이미 도로명주소가 사용되고 있는 국가는 스트리트(St)나 애비뉴(Av)단위로 구획을 나누어 구획과 블록 간 거리가 30~200m로 매우 좁기에 도로명주소 사용에 적합하지만, 우리나라는 블록간 거리가 1~2km로 매우 넓어 다소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어 “정부는 도로명주소가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며 도로명주소 사용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는데 정작 우리가 따라하고자 하는 미국은 그들이 사용해 왔던 관습을 쉽게 바꿀 수 없다는 이유로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m(미터)도량법을 거부하고 ft(피트)도량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정부가 국민들의 혼란을 우려해 2~3년간의 병행기간을 줬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그 짧은 시간으로 100여년이 넘게 사용되어 온 관습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겠느냐”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우리나라 지역 특성 상 골목이 많아 골목의 기준이 되는 도로를 찾기가 모호해 길 찾기에 도리어 혼란을 줄 수 있다”며 “도로명주소 시행을 위해서는 먼저 구획정리가 이루어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평우 문화평론가 또한 지난 1일 자신의 블로그에 “세계화를 추구한다면서 무조건적으로 외국 것을 따라하는 구시대적인 사대주의”라고 지적하며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탁상행정의 대표적 실패작”이라며 비난을 표시하고 있다.

황 평론가는 “제대로 실태 조사를 시행하지 않고 무조건 선진국을 따라가려는데만 급급하다 보니 이같은 상황이 발생한 것”이라면서 정부의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
김영국 도시공학박사 역시 22일 <시사포커스>와의 전화에서 “도로명 작명 당시 지역적 특성등을 고려했다고 하지만 이는 문제점이 많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정부는 일제시대의 잔재를 없애는 취지라고 하지만 우리가 지난 100년의 세월동안 사용해 왔던 지명에는 우리의 역사가 녹아있다”면서 파주의 ‘LG로’ 등을 예로 들어 “한 번 고착되면 계속적으로 쓰여져야 하는 지명에 특정 브랜드명이 들어가는 것이 과연 적합하느냐”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도로 명칭에 지역에 따른 유명인물 등을 사용하다 보니 전국적으로 중복 도로명이 상당히 많은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일례로, 도로명에 ‘세종’이라는 글자가 쓰인 곳은 전국 43곳이다. 세종특별자치시 세종로에 거주한다고 밝힌 오모씨는 17일 안전행정부 홈페이지에 “오히려 도로명주소 사용으로 국제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정부 주장과 달리 전국적으로 똑같은 도로명이 많아 외국인들에게 혼란을 가중시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이와 같이 중복 도로명을 사용하는 지역 주민들을 중심으로 도로명 변경을 위한 서명운동을 실시하는 등의 움직임이 보이고 있으나, 도로명주소 수정을 위해서는 해당 지역 주민 과반수이상의 동의서가 있어야만이 법원의 판결을 통해 수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마저도 사실상 쉽지 않을 것으로 보여진다.
부동산계약서 작성 시는 지번번호 사용… 혼선 야기
부동산업계에서도 도로명주소 사용에 대해 난색을 표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한국부동산투자자문협회 관계자는 22일 <시사포커스>와 통화에서 “도로명주소 전면사용 후 부동산 계약서 작성 시 표지상 주소지에는 기존의 지번주소를, 그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는 도로명 주소를 표기해야 하기 때문에 혼선이 올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한 분쟁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부동산의 경우, 재산권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 요주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뿐만 아니라 “동 이름 자체로 브랜드 네임화 되었던 서울 대치동, 양재동 등은 ‘동’ 개념이 사라지면서 집값 하락 등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지며 계속해서 주민들의 민원이 제기되고 있다”고 밝혔다.
입법조사처는 22일 발표한 ‘도로명주소 전면시행에 따른 향후 과제’ 보고서에서 “혼란의 소지가 있는 유사 도로명과 기존의 지역적 특성과 맞지 않는 생소한 도로명을 발굴해 지속적으로 수정 보완작업을 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이같은 국민들의 불편 호소에도 정부는 여전히 도로명주소 시행에 대해 적극적인 홍보를 해 나갈 방침이다.
안행부 “제도 정착되면 편리성 느낄 것”
한편 정부는 도로명주소 사용 시 ‘연간 3조원대의 경제 효과가 기대될 뿐만 아니라 급속한 도시화로 인한 지번의 연속성 결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며 적극 홍보하고 있다.
안전행정부 주소정책과 관계자는 22일 통화에서 “국민들이 불편을 호소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서도 “이는 아직 제도가 정착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일 뿐 제도가 정착되면 국민들이 도로명주소의 편리성을 몸소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국민들이 도로명주소 체계가 우리나라의 실태와 다소 맞지 않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질문에 대해서는 “향후 자연스럽게 해결 될 문제로 본다”며 “국민들이 갑작스러운 변화로 불편함을 느끼겠지만, 도로명주소 시행에 따른 긍정적 효과를 고려해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