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이 겨레의 얼이다!’ 김해숙 국립국악원장
‘국악이 겨레의 얼이다!’ 김해숙 국립국악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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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여성원장 취임…“우리 소리 숨결 불어넣을 것”

▲ 국립국악원 설립 62년만에 최초의 여성원장이 탄생했다. 그는 다름아닌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가야금 명인’김해숙 원장. / 사진 : 유아름 기자

“국악이요? 그런거 잘 몰라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젊은이들에게 ‘국악’을 물으면 열에 아홉은 “모른다”거나 “관심 없다”는 답이 대부분이었다. 국악(國樂)이란 이름 그대로 ‘나라의 음악’이다. 이미 한국에 뿌리를 내린 음악, 한국적 토양에서 나온 음악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외세에서 들여온 대중음악에 열광하고 또 그것을 우리 것인 마냥 익숙해했다.

짧은 치마와 색색깔로 염색한 머리, 격렬한 춤동작과 함께 어우러지는 빠른 비트의 대중가요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쪽진 머리에 잘 다려진 저고리와 곱게 펴진 풍성한 치맛자락 위로 얹혀지는 곡조는 다소 낯설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을 풍성하게 해 준다는 사실을 과연 이 시대의 젊은 세대들이 알 수 있을까?

각박한 세상 속에서 잠시라도 일상을 잊고 국악에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의 것, 결코 우리에게 낯설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에 <시사포커스>는 김해숙 원장의 일생을 통해 국악의 매력에 대해 알아봤다.

 “국악과 대중 거리감에 한 때 ‘포기’ 생각도”
 “국악, 독특하고 뛰어나 각광받는 날 올 것”
 “국악 부흥 위해서는 국민들 관심 전제돼야”

‘기생음악’…부정적 시선이 불러일으킨 열정

부산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살아왔던 열네살 소녀에게 이 한마디는 평생의 일생을 바꿔놨다. 당시 일반 공립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떨어진 후 진로를 고민하던 김 원장은 가야금을 배우던 바로 위 언니를 통해 처음 가야금을 접하게 됐다.

그저 고민되던 진로를 정하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국립국악중학교에 입학했다. 학교 등교 첫 날, 우리 소리에 낯설었던 김 원장의 눈에 교정 한 켠에 쓰여있던 ‘국악이 겨레의 얼’ 이라는 말이 들어왔다. “당시 뭇 사람들은 국악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편이었어요. 속된 말로 ‘기생 음악’이라는 거지요.” 그러나 당시의 부정적인 시선은 오히려 열 네 살 김 원장의 가슴에 ‘국악’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어린 마음에 이런 부정적인 시선을 내가 바꿔보자는 마음이 들었어요. 국악이 겨레의 얼이라는 말, 우리 소리에 담긴 예술적 힘이 저를 사로잡은 것 같습니다”

사실 그녀는 결코 ‘천재’가 아니었다. 당시 학교에는 어릴 적부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친구들이 숱하게 있었지만 그녀는 친구들이 ‘모범생’, ‘독종’ 이라 부를 정도로 국악에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서도 가족들이 모두 잠자리에 들었을 때 몰래 부엌 한 켠에서 가야금을 뜯었다는 그는 결국 열 여덟살이 되던 1972년, 당시 국내 유일의 콩쿠르였던 5·16 민족상 음악부 가야금 부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노력의 빛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환영받지 못하는 국악…회의감 들기도

남다른 노력과 열정으로 우리 소리에 모든 혼을 쏟아 부은 그녀에게도 고비는 있었다. “중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까지 10년을 오롯이 가야금 연구에 힘을 쏟아 부어 전문가가 되어 사회에 나왔지만 막상 뜨겁게 환영해 주는 곳은 없었습니다. 국악과 대중의 거리감이 너무 컸어요. 그 때 느꼈죠. ‘나는 지난 세월 무엇을 했을까?’”

그 때부터 급격하게 찾아온 슬럼프로 김 원장은 ‘포기’까지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바로 잡았다. “우리 소리를 선보일 무대가 없다면 스스로 그 무대를 만들자는 포부로 직접 대중과 가까이 호흡하는 작업을 차츰차츰 해 나간거에요.”

▲ 국악원 수장이 아닌 ‘가야금 명인’으로서 그녀는 “가야금 연주자로서 손가락이 놓아질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무대 위에서 평생 연주자로 남는 것이 꿈이에요. 나아가서는 우리 소리를 지키는 데 남은 힘을 모두 쏟아 부을 것”이라고 말한다. ⓒ 국립국악원

김 원장은 결심이 굳어지자 최초의 창작 가야금 3중주단인 ‘서울세울 가야금 연주단’을 창단해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국악계에서 음반 취입이 드물었던 탓에 그녀가 발매한 가야금 연주앨범은 관객들을 끌어들였다. “예전에 강단에 섰을 때도 그렇고 최근에도 후배들을 만나면 꼭 해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소리가 지닌 원형 콘텐츠가 출중하기에 언젠가 제대로 각광받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이죠. 이런 희망마저 없었다면 제가 왜 수십 년 동안을 국악 하나만 붙들고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다 지난일이라며 씁쓸히 웃었지만 그녀는 이 시기를 그녀의 국악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때로 기억한다.

남편 배려 덕에 국악 계속해…

열네 살 국악의 길에 접어든 후 오로지 국악만 보고 살았던 그녀에게도 사랑은 찾아왔다. 서울대 국악과 2학년 재학 시절, 그녀는 서울 성북구 돈암동성당에서 야학(夜學) 음악교사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생계 때문에 마땅한 교육 기회를 얻지 못한 이들을 위해 성당이 마련한 ‘배움터’에서 봉사를 하며 그녀는 우리 소리를 알리기 위해 힘썼다. “삶에 지친 그들이 국악을 통해 위안을 얻길 바라는 마음이었죠”.

그 곳에서 김 원장은 평생 함께할 지금의 남편(이종수 도서출판 <어울림> 대표)을 만났다. 이 대표 역시 당시 대학생으로 그 곳에서 교육봉사를 하고 있었다. 김 원장보다 여섯 살 위의 이 대표는 듬직한 남편으로서 손색이 없었고, 무엇보다 국악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김 원장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줬다.

“당시에는 여자가 결혼하면 가사일과 사회활동, 둘 중 하나를 무조건 선택해야만 했어요. 그 당시에는 무슨 배짱이었는지 둘 다 못할 게 뭐가 있나 싶어서 결혼과 동시에 대학원 시험도 치렀고 학업도 계속 이어나갔어요. 어쩌면 그것이 불만이 될 수도 있었는데도 세심하게 배려해주고 챙겨준 덕에 지금껏 제 능력을 조금이나마 국악 발전에 보탤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호랑이 선생님? 마음은 여전히 열네살 소녀

“제가 심심풀이로 인터넷을 통해 사주를 봤는데 전생에 ‘호랑이’였다네요. 사실 가만히 있어도 남들이 꽤 어려워할 인상이라서 개인적으로 표정 관리를 좀 해야한다는 조언까지 나오더군요” 그녀의 인상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똑 부러지는’ 성격 때문에 그녀는 제자들로부터 ‘호랑이 선생님’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낭랑한 목소리와 남다른 카리스마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 앞에서 걱정을 먼저 하지만 사실 그녀는 누구보다도 마음 따뜻하고 국악에 가슴 설레던 열네살 소녀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고 있다.

▲ 김 원장은 국악의 부흥을 위해서는 국민들의 관심과 애정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 국립국악원

“저희가 8남매인데 어머니가 주로 집 안에서 가둬 키운면이 없지 않아 있다보니까 낯선 사람이 집에 찾아오면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숨기 바빴어요. 이 모습만 보면 정말 소극적이구나 하는데 또 막상 고등학교 때는 학생회 부회장을 할 정도로 적극적인 기질도 제 안에 있는 것 같아요. 모든 이들이 다 그렇긴 하지만 제가 양면성이 좀 두드러지는 것 같긴 하군요.”
특히 김 원장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남편과 매 해 겨울 스키장을 찾을 정도로 ‘젊은’ 취미활동을 가지기도 했다.

‘국악’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다소 성숙한 부분이 많지만 그녀를 만난 후에는 이 모든 것이 편견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사실 주택에서 20년 살다가 아파트로 이사가서 제일 먼저 한 것이 인라인 스케이트를 산 것이랍니다. 집 앞 놀이터에서 젊은 친구들과 어울려서 신나게 타기도 하죠. 안 어울리나요?”

“여성이 가진 강점 살려 국악에 숨결 불어넣을 것”

2014년 1월 국립국악원장으로 취임한 그녀는 국립국악원이 창설된 이후 62년만의 첫 여성원장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때로는 날카롭고 묵직하게, 때로는 부드럽고 유쾌하게 여성 리더가 지닌 강점을 살려 우리 소리에 다시금 숨결을 불어넣을 겁니다.”

그렇다면 국립국악원장으로서 그녀가 꼭 이루고 싶은 일은 무엇이 있을까? 그녀는 우리 소리의 원형을 찾고자 그간 국립국악원이 쏟은 열정의 크기는 높이 평하지만 관객과의 친밀한 교감을 제대로 이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뒤따른다고 말했다. “국립국악원이라고 해서 단순히 옛 전통만을 쥐고 있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공연예술 환경이 급격히 변화한 만큼 국악원도 그 흐름에 빨리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원형 보존에 치중하고 거기에 많은 정신을 쏟다 보니 관객의 취향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결국 그 간극은 더욱 커진 것 같네요.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 하루 빨리 거리를 좁히고 관객과 좀 더 친밀하게 호흡할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김 원장은 변화의 속도에만 편승해 성급하게 국악 대중화를 이룬다는 욕심은 경계하겠다는 입장이다.

“우리 소리가 가진 전통성에 대한 고민 없이 그저 대중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가면 쉬운 길이 될 수는 있지만, 대다수가 공감하듯 그 길은 바른 길이 아닐꺼에요. 전통문화를 제대로 회복하기까지 절대적인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듯이 성급하게 서두르기보다는 초석을 탄탄히 다져 나가고 싶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재임 2년 동안 국립국악원 소속 4개 산하 예술단체(정악단·민속악단·무용단·창작악단)만의 고유 레퍼토리 개발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다지고 있다. 또한 국립국악원 최초로 4개 예술단체와 지방 국악원 단원들까지 한데 모아 ‘종합예술극’을 올 하반기에 선보일 예정이다.

또한 그녀는 국악의 부흥을 위해서는 국민들의 관심과 애정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을 계속해서 강조했다.

“국민들이 ‘국악 대중화’가 비단 국립국악원만의 숙원이자 목표 과제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직접 그 원형과 정체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진수를 맛보지도 않고 ‘국악은 재미없어’라고 치부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만 서양 음악과의 단순 비교로 국악은 왜 그만큼의 완제품을 내놓지 못하느냐고 지적하는 분들도 계시구요. 하지만 저는 조심스럽지만 꼭 한번 되묻고 싶습니다. 과연 우리 사회가 지금껏 그만큼 국악 교육에 에너지를 쏟은 적이 있었는지를요.”

그녀는 조심스럽지만 국악 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국 고유의 소리는 세계 일류 유산과 견줘도 손색이 없는 독특한 특징과 빼어난 DNA를 가지고 있지만 정작 대한민국 땅에서는 환영받지 못하고 있어요. 국립국악원이 견인차 역할은 하겠지만 우리 소리가 제대로 꽃피울 수 있도록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열심히 물을 주고 애정으로 가꿔 우리 음악을 가다듬어 나가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렇다면 국립국악원 수장이 아닌 ‘가야금 명인’으로서, ‘국악인’ 으로서 그녀의 바람은 무엇일까? “가야금 연주자로서 손가락이 놓아질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무대 위에서 평생 연주자로 남는 것이 꿈이에요. 나아가서는 우리 소리를 지키는 데 남은 힘을 모두 쏟아 부을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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