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고마워!”…엄홍길 휴먼원정대 대장
“히말라야, 고마워!”…엄홍길 휴먼원정대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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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히말라야 인들의 버팀목 되고파”

▲ 더 이상 산에 오르지는 않지만, 산과 한 ’약속’을 위해 다시 히말라야를 찾고 있다는 엄홍길 휴먼원정대 대장. ⓒ 엄홍길휴먼재단

아시아 최초로 히말라야 고도 8000미터 16좌를 완등한 엄홍길(53) 대장. 단지 ‘산’이 좋아서 산을 오르기 시작한 그에게 있어 산은 평생의 목표가 되었고, 삶의 전부가 되었다. 1985년 9월, 스물여섯 청년 엄홍길은 히말라야 에베레스트(8848m) 남서벽 원정을 시도했다가 좌절을 맛봤다.

높고도 먼 정상을 보면서 그는 한 때 ‘정복’을 꿈꿨다. 그러나 3년 후인 1988년 9월,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하고 난 후 그는 깨달았다. “산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산이 정상을 잠시 빌려줄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마침내 2007년, 히말라야 고도 8000미터 16좌를 완등한 그는 20여년을 품어온 꿈을 이뤘다. 그 시간동안 그는 발가락 몇 개가 썩어 잘려나갔고 수 차례 수술대에 올라 힘든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다. 또한 ‘산’이 그에게 친형제와 다름없던 동료 대원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모습을 직접 봐야 했고 그 자신 역시도 죽음의 고비를 숱하게 넘겨오는 등 우여곡절 끝에 2007년 히말라야 16좌 완등의 꿈을 이뤄냈다.

그 후 더 이상 산에 오르지는 않지만 여전히 그는 히말라야를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 이유를 두고 엄 대장은 “산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란다.

“내가 지금 살아있는 이유…동료들의 희생 덕분”
“16좌 완등? 산이 나를 받아주고 선택해준 것”
“히말라야 청년들, 자립할 토대 만들어주고파”

엄 대장에게 ‘산’이란 이 세상이고 인생의 전부다. 엄 대장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세 가지를 꼽으라고 하면 그는 ‘산’, ‘산’, ‘산’이라고 말한다. 첫 번째 ‘산’은 그의 삶의 전부라는 뜻이고, 두 번째 ‘산’은 그의 평생의 목표이며, 세 번째 ‘산’은 그가 남은 시간동안 갚아 나가야 할 ‘빚’이다.

16번째 고봉을 정복한 2007년 봄 이후, 엄 대장은 더 이상 히말라야에 오르지 않는다. ‘산’이 인생의 전부인 그가 산에 오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가 두 번째 ‘산’의 진정한 의미를 50대 초반이 되어 흰 머리가 희끗하게 난 그 순간 깨달았기 때문이다. 22년간의 도전과 성취의 쾌감.

그리고 그보다 더 소중한 ‘인생의 17좌’를 발견한 그는 ‘산’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닌 다른 일을 택했다. 더 이상 산을 오르며 느끼는 희열과 기쁨을 느낄 수는 없지만, 히말라야 고지의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던 그 순간의 희열보다 더 큰 기쁨을 느끼는 일을 찾았기 때문이다.

“제가 산악인으로서 산을 오르며 살아오면서 수많은 인연을 맺었고 도움을 받았어요. 살면서 갚아 나가야 할 큰 빚이죠. 산들과 신이 저를 이렇게 살려 보내준 이유는 소중한 인연들에게 받은 도움을 되돌려 주라는 뜻이 아닐까요?”

“내 삶의 일부 히말라야…제 2의 고향이자 어머니”

스물여섯 젊은 청춘의 뜨거운 심장을 가진 그가 가슴 깊은 곳에 큰 꿈을 품고 바라본 히말라야처럼 지금도 여전히 그에게 히말라야는 설레고 그의 가슴을 뛰게 한다. 숱한 역경과 고난이 그를 가로막았지만 그는 여전히 히말라야에 대한 애정은 그 누구보다도 크다.

“1985년 히말라야를 오르기 시작해서 두 해 연속으로 실패하고 1987년 처음 성공한 이후 16좌를 오르기까지 꼬박 22년을 바쳤습니다. 히말라야는 22년의 세월 동안 제 젊음을 모두 바친 곳이기도 하죠. 38번 도전해서 16번을 성공했는데 그 과정에서 실패와 사고도 많이 겪었지요.”

히말라야는 그에게 동상에 걸려 발가락을 잘라내는 아픔도, 동고동락하던 친형제와 다름없던 열 명의 동료의 생명을 앗아간 곳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히말라야를 두고 제 2의 고향이자 삶의 일부이며 또 어머니라고 부른다.

“지금 제가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은 결국 동료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고, 또 16좌를 모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산이 저를 받아주고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2007년, 16좌 완등 후 ‘히말라야, 고마워’라고 말하고 나서도 편안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겁니다. 산이 선택해서 살아남고 성공을 맛본 사람으로서 산을 오를 때마다 산에 한 무언의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봤어요.”

‘산’이 준 기회, 이제 되갚아야 할 때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무언의 약속’이란 무엇일까. 히말라야 사람들은 산에 신(神)이 있다고 믿는다. 그 역시도 그 믿음에 따라 히말라야에 오를 때 마다 신에게 빌었다고 한다. “나에게 16좌 모두를 성공하게 해 주면 살아남은 자로서 히말라야와 그 곳의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 꼭 하겠다고…이 히말라야에서 삶의 터전을 잡고 사는 이들에게 내일의 행복을 위한 버팀목이 되겠다”고.

▲ 엄홍길휴먼재단이 네팔 4000m 고지에 세운 ’팡보체초등학교’. 그는 아이들이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 위해 다른 그 무엇보다도 좋은 학교가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 엄홍길휴먼재단

2007년 봄, 네팔 로체샤르를 끝으로 신은 그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줬다. 즉, 그도 이제 약속을 지킬 차례가 된 것이다. 무엇부터 해야 할까 고민하던 그의 머릿속에 히말라야 오지마을 주민들이 떠올랐다.

“신들의 세계인 히말라야의 설산은 장엄하고도 아름다워요. 하지만 그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히말라야 산자락에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죠. 커다란 눈망울에 천진난만한 모습을 한 파상이라는 아이가 있어요. 그 놈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왕복 세 시간이 넘는 험한 산길을 오늘도 오르내리고 있어요. 의료 혜택은 물론이고 삶의 질곡도 벗어나기 어려운 곳에서 살지만 항상 순수한 마음만큼은 잃지 않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 하나 제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하는 사람이 없더군요.”

그는 재단 사람들과 함께 히말라야 고산지대에 학교를 짓기로 결심했다. 모두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심지어 히말라야 현지인들 역시 자동차로도 들어갈 수 없는 4000m 고지대에 학교를 짓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그를 뜯어 말리기까지 했다.

“히말라야 고산지대의 추위 때문에 두 볼이 빨개진 상태에서도 아이들이 얼마나 천진난만한지 몰라요. 제대로 된 교육과 의료시설조차 없는 곳에서 부모가 살던 것처럼 가난을 대물림 받는 거잖아요. 그 아이들에게 일시적인 물질적 지원이 아닌,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고 싶었습니다. 부모들처럼 포터와 셰르파로 사는 것이 아닌 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희망과 꿈을 심어주고 싶었던 거에요. 그게 바로 학교였죠.”

뜻은 컸지만 현실의 장벽은 높고도 힘겨웠다. 하산 중 숨진 동료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한 재단으로부터 받은 4000만원의 후원금을 기본 자금으로 삼고 주변인들의 뜻을 십시일반 모아 ‘팡보체 휴먼학교’를 설립했다.

자동차가 갈 수 없는 탓에 건축 장비 하나 하나를 3박 4일에 걸쳐 소 달구지를 이용해 들어가야 하는 등 힘든 시간의 연속이었다. 엄 대장은 이후에도 꾸준히 학교 설립 공사에 직접 참여하며 열성을 보이고 있다. 그런 그에게 히말라야 현지인들은 ‘엄 사부’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1년에 학교 한 개 꼴로 완공했습니다. 첫 학교인 팡보체 학교를 시작으로 타루투 휴먼학교, 룸비니 학교, 산티푸르 학교 등등 7군데가 완공되거나 개교를 앞두고 있죠. 모두 해발 4000m 이상의 고산지대에요. 말이 쉽지 사실 4000m가 넘는 고산지대에 학교를 세운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죠. 16좌를 완등했던 네팔에 16개의 학교를 짓는 것이 최종 목표에요. 갈 길이 아직 멀죠.”

▲ 엄홍길휴먼재단은 현지에서 제대로 된 의료구호를 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의료단체와 협약해 무료의료봉사 등을 실시하기도 한다. ⓒ 엄홍길휴먼재단

엄홍길은 새로 지어진 학교에서 아이들이 꿈과 희망을 갖고 공부에 열성인 모습을 보면서 조금 더 욕심을 내기로 했다. 학교 주변의 마을 주민을 위해 의료시설을 만들기로 한 것. 이 사업이 바로 ‘히말라야 희망날개’ 사업.

엄 대장과 재단 사람들은 직접 국내외 의료진들을 찾아 무료 의료 봉사를 요청했다. 그들은 엄 대장과 재단의 진심에 감동해 자발적으로 참여해 봉사하고 있다. “의료봉사가 오는 날만 되면 그 앞은 사람들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죠.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더 노력할 생각입니다.”

평생을 ‘산’의 품 안에서 살아왔던 그다. 어느 때는 모든 것을 앗아가기도 했고, 절망과 좌절을 맛보게도 했지만 그에게 여전히 안식처이자 위안처는 ‘산’이다.

“어쩔 때는 너무도 힘들어서 그냥 다 내려놓고 당장 산으로 뛰어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도 있어요.”

그의 히말라야에 대한 애정은 학교를 지어주고, 의료단체를 설립하는 외적인 활동 뿐만이 아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드러난다. “그 동안 히말라야 8000m 고봉 16좌 원정길에서 저는 더없이 아름다운 히말라야의 설산을 수 없이 봐왔습니다. 그 곳에 삶에 터전을 마련하고 사는 사람들은 꽃보다 더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서 한 줄기 빛을 발견했죠. 한국이 전쟁의 폐허 속에서 50여년만에 경제 대국의 꿈을 이뤄냈듯, 이들도 그렇게 해야만 하고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 엄 대장은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게도 직접 ‘산’의 교훈을 알려주고 있다. 그는 “요즘 청소년들에게 도전정신과 기상, 시련을 이기는 정신을 알려주고 싶어요. 실패해도 또 일어서면서 얻는 기쁨과 행복을 등산을 통해 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 엄홍길휴먼재단

나태하고 안일한 요즘 청소년들, 도전정신 알려주고파

그는 히말라야 뿐 아니라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게도 직접 ‘산’의 교훈을 알려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는 서울 강북구청 관내에 있는 16개 중학교 아이들 중 참여 희망자를 선발해 등산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자신이 산에서 배우고 느낀 감동의 아름다움과 겸허한 철학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마냥 편한 것만 좋아하고 나태하고 안일한 것만 찾는 요즘 청소년들에게 도전정신과 기상, 시련을 이기는 정신을 알려주고 싶어요. 목표를 정하고 실패를 해도 또 일어서면서 얻는 기쁨과 행복을 등산을 통해 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면 좋겠어요. 또 숱하게 무너지고 넘어지더라도 이겨내고 난 후 정상에 올랐을 때의 그 기분을 한 번쯤은 꼭 느껴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값진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해 봤다면 그 기분을 다시 느끼기 위해서라도 포기와 좌절에도 금새 일어설 수 있을테니까요.”

‘산이 인생의 모든 것’이라 말하는 그에게 산은 삶의 좌표를 정해준 스승 같은 존재이고, 자신을 항상 받아준 어머니 같은 존재이다.

“젊은 날 품은 16좌 완등의 꿈을 이루고 나니 뿌듯하다기 보다는 허탈하고 허무한 마음이 컸습니다. 내 청춘을 다 바쳤는데 그 것도 옛날 얘기가 되는구나 싶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여전히 히말라야를 보면 가슴이 뛰어요. 언제라도 다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랄까요.”

비록 젊은 날, 패기와 용기를 갖고 가슴에 품었던 20대 청년 엄홍길이 아닌 지금은 희끗한 귀밑머리가 있는 50대 ‘아저씨’가 됐지만 그의 꿈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정상은 진정한 성공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내려가다가 사고를 당하는 일이 많으니까요.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정점에서 유지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첫 출발을 한 곳으로 돌아와 차 한 잔 할 때의 그 만족감이 이루 말할수 없듯 언젠가 내가 지금 품은 이 꿈도 다 이룰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갈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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