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이 사라진 공백에 직급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저마다의 위치에서 맡은 일을 하며 삶을 영위한다. 최근 입장의 차이가 생각의 차이를 만든다고 느낀 계기가 있었다.
중소기업에서 팀장으로 일하는 친구가 있다. 친구는 종종 아래 직원들 험담을 늘어놓곤 하는데 친구의 얘기를 듣자니 영 귀에 거슬리는 것이다.
“애들이 말귀도 못 알아먹고 멍청해. 이래서 전졸하고 일 못하겠어. 힘들다고 징징대는데 나더러 뭘 어쩌라고. 밤 11시 퇴근이 매일도 아니고”
나는 친구에게 전문대 졸업한 팀원들의 월급을 물었다. 친구는 140만원을 받는다고 말하며 “전졸인데 그 정도 받는 게 어디야 지들이 어디서 그 돈을 받아 감지덕지지”하고 덧붙였다.
사원, 그것도 인턴으로 일하는 ‘슈퍼 을’인 나는 친구의 말에 웃으며 이렇게 대꾸했다. “그럼 전졸은 140만원 받으며 야근도 달게 하고, 네가 시키는 대로 일 해야 하는 거네? 너까지 왜 애들한테 갑질 하냐?”
친구는 그것이 어떻게 ‘갑질’인지 되물었다. 나는 “가뜩이나 돈백 받고 힘들게 일하는데 어르고 달래며 으쌰으쌰 해줘도 모자를 판에 매일 보며 의지하는 너까지 팀원을 외면하면 안 된다”고 말해줬다.
그러자 친구는 “너나 잘해” 짧은 한방을 날리곤 전화를 끊었다.
신이 몸이 하나라 인간을 모두 보살필 수 없어 ‘엄마’라는 존재를 만들었듯 몸이 하나인 ‘오너’가 일계 사원들을 잘 보살피라고 뽑은 사람이 ‘상사’이다. 그렇기에 회사 내 직급을 단다는 것은 무거운 훈장과도 같다.
오너 눈치 보랴 아래 사원 눈치 보랴 상사도 죽을 맛이겠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팍팍한 월급으로 ‘슈퍼 을’로 사는 사원보다는 낫지 않으랴. 어디까지나 철저히 ‘슈퍼 을’의 시선으로 보면 그렇다.
MBC 예능 프로인 ‘무한도전’에서 출연자들이 조선시대 계급에 맞는 분장하고 시민과 만나 대화를 하던 중 화이트 컬러 남자에게 계급이 뭔지를 묻자 그가 “나는 노비요.”라고 대꾸해 웃음을 줬던 장면이 있었다.
계급이 사라진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직급’, 직급에 따라 생각이 다르고 저마다의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상사’도 ‘사원’이 존재해야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슈퍼 을’을 거쳐 일계 사원의 고달픈 삶을 지나 ‘직급’을 단 상사가 갑의 횡포를 부리기보단 포용력 있게 사원들의 마음을 헤아려 줘야 하지 않을까.
강제로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려 했던 바람이 아닌 따뜻한 태양이 나그네의 외투를 벗겼듯 온화한 카리스마가 사회에서는 더욱 빛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