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한신(阪神)교육투쟁
424한신(阪神)교육투쟁
  • 현병기
  • 승인 2003.11.24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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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 최대의 대중운동
전후 일본 최대의 대중운동- 4.24한신(阪神)교육투쟁 1945년 8월15일 해방 직후 일본에 거주했던 재일동포 수는 대략 220만 정도였다. 그중 절반 가까이는 해방과 더불어 본국으로 귀국했고, 나머지 약 150만이 저마다의 사정으로 부득히 후일 귀국을 약속하고 일본에 남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가장 큰 문제중 하나는 귀국후 조선땅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자녀들의 교육문제였다. 특히 언어와 민족교육을 위해선 재일동포 아이들에게 한글 깨우치기 운동이 중요했다. 당시 일본내 동포사회는 크게 재일조선거류민단(약칭 민단)과 재일조선인연맹(약칭 조선연맹, 훗날 조총련의 모체)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그 구성비를 보면 2:8정도로 재일조선연맹이 압도적으로 수적 우세를 보이고 있었다. 종전직후 1945년 당시 일본 공산당 위원인 김천해(金天海 재일동포 귀국 및 권익보호 담당)를 중심으로 조선연맹이 결성되고, 같은 해 11월 이념에 차이로 거류민단이 분열되어 나오자 조선연맹은 북조선인민정부 쪽으로 그들의 노선을 확고히 한다. 일본 패망후 이러한 혼란기속에서도 민족교육에 중요성은 일치하여 ‘돈있는자는 돈으로, 힘있는자는 힘으로, 지식이 있는자는 지식으로’라는 슬로건 하에 전국 각지에 600여개의 민족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1948년 1월 일본정부는,아니 엄격히 말해서 GHQ(일본점령미연합군사령부)가 일본내 적화 확산을 두려워 하여 문부성을 통해, 일본교육실정법 위반이라는 명분으로 전국에 있는 민족학교에 대해서 폐쇄 명령을 내린다. 전국각지에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여 민족학교를 강제적으로 폐쇄하려 하자, 이 같은 폭거에 분노한 재일동포는 총력을 집결하여 민족학교를 사수하려는 투쟁으로 전개된다. 특히 고베(神戸)와 오사카(大阪)에서는 일본 패전후 최대의 대중운동으로 기록되어 그 시기와 장소를 상징하여 4.24한신(阪神)교육투쟁이라 하였다. 고베에서는 4월15일 동포측 대표가 효고현 지사와의 교섭에 실패, 전원 체포되고 민족 학교가 강제 폐쇄되자,24일 약 일만명 동포들이 ‘학교폐쇄철회와 대표자 즉각석방등 5가지 요구상황을 들고 효고청사앞에 집결한다. 같은날 심야 고베 군사정권은 돌연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732명을 무차별 강제체포연행했다. 25일에는 당시 조선연맹 효고현 위원장이었던 박주범(朴柱範)씨가 군사법정에서 유죄판결를 받고 고베 형무소에 복역하던중 병의 악화로 가석방후 4시간만에 숨지는 사실상의 옥사를 당한다. 한편 오사카(大阪)에서는 4월23일 오사카부(大阪府) 청사앞에 약 일만 오천명의 집결를 시작으로 26일에는 3만명 가까이 집회에 동포들이 모이자, 이에 당황한 진압경찰은 집결대를 향하여 소방차 물대포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잠시후 2,3발 하늘을 향해 위협사격을 하고는 곧바로 데모대를 향해 총을 발사한다. 이 발포로 집회 선두에 위치한 김태일(金太一)소년이 총탄에 맞고 숨진다. 이에 분노한 동포들은 경찰대와 난투극을 벌여 수백명이 중경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사태를 직시한 일본공산당은 재일조선인의 교육기본권을 일부 수용할 것을 정부당국에 요구하나, 1949년 9월8일 일본정부는 재일조선인연맹과 한국거류민단(宮城본부,塩釜본부)에 동시에 해산할 것을 명령한다. 조선연맹 해산후에도 우리 동포들의 투쟁은 꾸준히 전개되어, 조선인교육대책위원회와 문부성사이에 일정조건하에 민족교육이 인정되기에 이른다. 오사카에서는 민족사립학교인가와, 공립조선인학교설립이 인정되어 일본정규과목외에 조선어(한글)와 역사교육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후 민족학교 설립을 위한 투쟁은 점차로 재일동포 생존권을 위한 대국적 방향으로 발전 계승되어 오늘날 일본사회속에 재일동포뿐만 아니라 기타 소수민족 기반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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