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 합병 추진이 주주들의 반대로 최종 무산됐다. 두 회사는 과도한 주식매수청구 부담을 안고 합병을 진행할 경우, 재무상황을 악화시켜 궁극적으로 주주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고 보고 합병 계획을 해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은 17일까지 신청된 주식매수청구 현황을 확인한 결과 국민연금 등 합병에 반대하는 주주들이 행사한 주식매수청구 규모가 계약상 예정된 한도를 초과한 것으로 집계했다.
삼성엔지니어링 주주 중 주식매수를 청구한 금액은 7063억원으로 당초 정한 매수대금 한도 4100억원을 넘어섰다.
이에 양사가 계획대로 합병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삼성중공업에 대한 주식매수 청구금액 9235억원까지 합쳐 총 1조6299억원의 주식매수대금을 지급해야 하는 상황이다.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주식매수청구 행사 과정에서 드러난 시장과 주주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이를 겸허히 수용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두 회사는 육상과 해상을 아우르는 25조원 규모의 초대형 종합 플랜트 회사로 도약을 추진하며 지난 9월 1일 합병을 전격 결의했다. 악화된 세계 조선·플랜트 시황으로 실적이 부진했고, 경영상황이 나빠져 있었다.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은 각각 해양플랜트와 석유화학플랜트 분야에서 강점을 갖고 있던 만큼 양사 합병을 통해 탈출구를 모색하기로 했고, 그에 따른 시너지 효과를 투자자들에게 적극 설명해왔다. 이 과정에서 두 회사는 플랜트 설계 역량을 한곳에 모으는 한편 관리직 인력의 슬림화, 통합구매를 통한 원가절감 효과도 노렸다.
하지만 주식시장 침체와 전반적인 업황 부진의 여파로 최근 주가가 주식매수청구 행사가보다 하락하자 결국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은 무산됐다. 양사는 업황이 우호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별다른 대책 없이 실적부진을 계속 안고가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됐다. 합병을 전제로 세웠던 내년도 경영계획도 전면 수정해야 할 처지다.
삼성그룹이 지난해 하반기부터 속도를 내기 시작한 사업 구조조정에도 제동이 걸렸다. 삼성은 제일모직의 직물·패션 사업을 떼어내 삼성에버랜드에 넘겼으며, 남은 제일모직의 소재 사업은 삼성SDI와 합병했다.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이 완료되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건설 사업을 재정비하는 등 건설 부문으로 사업재편 범위가 확대될 것으로 예상됐다.
그룹 성장을 이끌어온 전자 계열사들이 최근 부진하면서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한다는 전략적인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됐다.
다만 삼성 오너 일가의 지분 문제에는 일단 직접적인 영향은 없을 것으로 보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은 둘 다 오너 지분이 전혀 없는 계열사이기 때문이다.
결국 시장과 주주들의 반대로 합병이 무산됐지만 삼성이 활로를 찾는 차원에서 중공업과 엔지니어링의 합병을 재추진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삼성중공업은 “향후 합병을 재추진할지 여부는 시장상황과 주주의견 등을 신중히 고려하여 재검토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합병을 다시 추진하더라도 실적 회복 등 주요 주주들을 설득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단시일 내 추진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우선 양사는 합병 무산과 별도로 해양플랜트 분야의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해 시장 지배력을 키우겠다던 당초의 취지를 살려 플랜트 설계의 협업 체제를 강화하기로 했다. 사업 구조조정 본격화 전망이다.
20일 삼성그룹 및 업계에 따르면 두 회사의 합병은 여유를 두고 재추진될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당장은 어렵겠지만 내년이라도 상황이 된다면 (합병)재추진이 필요하다. 엔지니어링과 중공업은 해양플랜트 부문에서 충분히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양사 모두 합병 가치 상승을 위한 구조조정은 피해갈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중공업은 조선업 침체, 삼성엔지니어링의 해외사업 부실로 지난 해와 올해 초 대규모 손실이 발생하며 인력 조정 가능성이 여러차례 제기된 바 있다. 합병에 따른 시너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작업도 필요하다.
양사는 해양플랜트 부문에서의 시너지 효과를 여러 차례 강조해왔지만 최근 업황 침체로 해양플랜트 수주가 예년에 비해 현저히 적었고, 삼성엔지니어링은 육상 플랜트에서의 설계 경험만 있을 뿐 해양플랜트 사업 진출 이후 단 한 건의 실적도 올리지 못했다.
삼성중공업이 부유식 액화천연가스 설비(FLNG) 등에서 수주를 늘리고, 삼성엔지니어링도 LNG액화플랜트 등 신수종 분야에서 성과를 내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전망된다.
재무구조 개선도 필요하다. 삼성중공업은 부채총계가 11조4120억원, 삼성엔지니어링은 5조1800억원 수준이다. 또한 삼성엔지니어링은 지난 해 1조원 이상의 영업손실을 기록하며 전년대비 적자전환했고, 삼성중공업도 예년에 비해 영업이익이 예년에 비해 영업이익이 90% 이상 줄어든 상황이다.
시장에서도 양사 간 합병 재추진을 긍정적으로 전망하고 있다.
전재천 대신증권 연구원은 “재추진 시 실적 우려가 현재보다는 완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 기간 동안 삼성엔지니어링의 손실이 실현 되며 합병에 따른 실적 부담도 크게 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합병 실패…사장단·임원 문책 인사 불가피
12월에 예정된 삼성그룹 사장단·임원 인사에 한바탕 한파가 불어닥칠 조짐이 조심스럽게 전망되고 있다.
계열사 간 사업 구조 재편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 승계와 맞물려 추잔해 왔던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이 무산되면서, 두 회사는 물론 컨트롤 타워인 미래전략실의 관련 임직원까지 문책성 인사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합병이 무산되면서 박대영 삼성중공업 사장과 박중흠 삼성엔지니어링 사장의 위상이 크게 흔들리게 됐다는 예측이 우세하다.
삼성의 인사 원칙 중 하나가 신상필벌(信賞必罰)이다. 삼성은 탁월한 업무 성과를 나타낸 구성원에게는 연한에 관계 없이 승진시키고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부여해 왔지만, 성과가 미진하거나 사건·사고와 관련이 있는 임직원에게는 단호히 책임을 물어 왔다.
두 회사가 실적 악화로 지난해와 올해 각각 그룹 차원의 경영 진단을 받으면서 두 사람은 사실상 ‘경고장’을 받은 상태다.
두 계열사는 각각 지난해와 올해 그룹 차원의 강도 높은 경영진단을 받았다. 이 같은 위기 상황에서 합병은 두 회사, 두 사장에게는 ‘역전’의 기회였다.
주식매수청구 시한을 앞두고 삼성중공업은 주가를 띄우기 위해 직접 자사주매입에 나서 2800억원을 쏟아부었다. 최지성 미래전략실장(부회장)이 두 회사의 경영진을 긴급 소집해 진행 상황을 보고받고 차질이 없도록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을 정도로 그룹 차원에서 신경쓴 사안이 이번 합병이었다.
◆ 국민연금 매수청구권 행사로 백지화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 무산에는 양사의 주요 주주인 국민연금의 주식매수청구권 행사가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19일 금융업계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지난 14일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과 관련해 양사에 대해 주식매수선택권을 행사했다.
앞서 국민연금은 이들 회사의 임시 주주총회 이전에 합병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이에 따라 시장에서는 국민연금이 주식매수청구권을 확보하려는 포석을 깐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 바 있다.
실제로 국민연금은 지난달 27일 양사가 각각 연 임시 주총에서 합병안에 대해 찬성이나 반대표를 던지지 않고 기권했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양사의 합병 자체를 반대하려던 것이 아니라 현재 주가가 주식매수청구권 행사 가격과 워낙 차이가 났기 때문에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했다”고 말했다.
양사 주가는 17일 종가 기준으로 각각 2만5천750원, 6만800원으로 주식매수청구권 행사 가격인 2만7천3원, 6만5천439원을 크게 밑돌았다.
지난 14일 공시된 분기보고서 기준으로 국민연금은 삼성엔지니어링 주식 209만5399주(5.24%)를 보유하고 있으며 주식매수청구권 행사로 국민연금이 삼성엔지니어링에서 받아야 할 금액은 1274억원을 넘는다.
허문욱 KB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투자자 입장에서는 주식매수청구권 가격과 현재 주가간 괴리가 너무 컸던 게 문제였다”며 “투자자들이 합병에 따른 불확실성을 감당하기 꺼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 “재추진시 시장 상황에 따라 청구권 행사”
홍완선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기금이사·CIO)은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 무산과 관련해 매수청구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배임이나 마찬가지라며 합병이 재추진된다면 그때의 가격에 따라 결정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홍 CIO는 19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63빌딩에서 연합인포맥스와 기획재정부 등의 주최로 열린 ‘제1회 Korea Treasury Bond 국제컨퍼런스’에서 “(만일 합병이 채추진된다면)그때의 매수청구권 가격과 시가에 따라 다르게 행동할 것”이라며 “그때는 또 매수청구권 금액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국민연금이 매수청구권 가격과 시가가 5% 이상 나는데 행사를 안 하면 배임이나 마찬가지다”며 “가격 부분이 매수청구권 가격 근처에 붙으면 우리가 행사를 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이어 홍 CIO는 “정확하게 매수청구 금액은 알 수가 없다”며 “국내주식 운용은 직접투자와 위탁운용으로 나뉘는데 의결권을 행사할때는 국민연금측이 모아서 하지만 매수청구권을 행사할때는 위탁운용사도 따로 하기 때문”이라고 합병 반대 입장을 설명했다. [시사포커스 / 유명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