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 부자의 현대글로비스 지분 매각이 불발된 가운데 현대차그룹의 신뢰도가 또 한 번 도마위에 오르고 있다.
13일 국내 투자은행 업계에 따르면 정 회장 부자는 지난 12일 장 마감 직후 지분 매각사인 씨티글로벌마켓증권을 통해 다음날 현대글로비스 주식 502만2170주(13.39%)를 블록딜(기관 투자자에 대량으로 매각하는 방식) 방식으로 매각하겠다고 통보했다.
현재 정 회장 부자는 현대글로비스 주식의 43.39%인 1627만1460주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번 블록딜에 정의선 부회장은 322만2170주, 정몽구 회장은 180만주를 내놨다.
정 회장 부자는 매각 희망 가격으로 현대글로비스의 12일 종가인 30만원보다 7.5~12% 할인된 26만4000~27만7500원을 제시했지만, 총 1조5000억원에 달하는 방대한 물량 등과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 등 때문에 인수자를 찾지 못하고 거래가 불발됐다.
◆글로비스, 왜 외면당했나
정 회장 부자가 제시한 할인율이 7.5~12%로 꽤 괜찮은 편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매각이 불발된 이유는 현대글로비스가 그룹 내에서 가지는 위상 때문이다.
현대글로비스는 그간 지배구조 개편 프리미엄에 얽혀 고평가를 받는 대표적인 종목으로 꼽혀 왔다. 현대글로비스의 주가는 현재 주가수익비율(PER)의 20배에 달해 6~7배 정도인 현대차나 기아차에 비해 훨씬 높다. PER은 주가를 주당순이익으로 나눈 것으로 회사의 주가가 주식 1주당 수익의 몇 배가 되는지를 나타내주며 대표적인 주가의 수익성 척도로 꼽힌다. PER이 높을수록 기업의 이익에 비해 주가가 높게 평가돼 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이처럼 현대글로비스의 주가가 높게 평가돼 온 건 그간 주로 제기돼 온 지배구조 개편 시나리오가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의 합병이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정의선 부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하는 방법으로 현대글로비스를 현대모비스와 합병하거나 현대글로비스 지분으로 현대모비스의 지분을 확보한다는 2가지 방안을 예측해 왔는데 주로 합병설에 무게를 더 싣는 분위기였다. 특히 합병은 세 부담을 최소화한다는 점에서도 유력한 방안으로 여겨져 왔다. 이번 지분 매각시도는 22.5%의 세 부담이 동반되는 방안이었다.
현대모비스 지분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정의선 부회장으로서는 지배구조의 핵심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현대모비스 지분을 반드시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정의선 부회장이 31.88%를 보유한 현대글로비스의 가치를 키우고 현대모비스의 가치를 억눌러 시총을 비슷하게 맞춘 다음 합병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정 회장 부자가 현대글로비스의 지분을 매각하려 했다는 사실은 이같은 합병설의 폐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투자자 입장에서 현대글로비스가 이미 고평가된 상태인데다가 오너 일가가 지분을 대거 정리한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주가가 추락할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에 굳이 블록딜을 통해 대량 인수할 필요가 없는 셈이다. 이런 점 때문에 블록딜이 무산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현대차그룹 신뢰 ‘도로아미타불’
한편 블록딜이 무산되면서 한전부지 고가 인수 문제에 이어 현대차그룹의 투자자와의 신뢰도 문제가 재차 거론되고 있다. 현대차그룹 오너 일가가 투자자들에게 신뢰를 잃게 만드는 또 하나의 사례라는 평가도 나온다. 이날 현대차그룹은 지분 매각 시도에 대해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피하기 위한 내부거래 비중 축소 차원이라는 취지로 설명했고, 미국 디트로이트 모터쇼에 참석하고 있는 정의선 부회장도 지분 매각이 경영권 승계 차원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물론 일감몰아주기 규제 회피 차원의 시도라는 설명도 일리는 있다. 현재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는 자산총액 5조원 이상 대기업그룹 중 대주주 일가 지분이 상장 30%를 초과하는 계열사와의 내부거래 금액이 200억 원 또는 연간 매출의 12% 이상일 경우에 이를 규제하고 있다.
그간 그룹 내 물류 일감을 몰아주는 등의 ‘일감 몰아주기’ 의혹이 숱하게 제기돼 온 바 있는 현대글로비스의 정 회장 부자 지분을 30% 이하로 낮춤으로써 공정위의 규제를 피하려는 시도가 아니냐는 분석이다. 물류 기업인 현대글로비스는 광고 기획의 이노션과 함께 현대차그룹의 ‘일감 몰아주기’로 성장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번 블록딜이 성사됐더라면 정 회장 부자의 현대글로비스 지분은 29.99%로 낮아져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피할 수 있게 될 뻔 했다. 이 경우 연간 100억여억원의 공정과세를 축소할 수 있게 될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할인율이 상대적으로 높았고 규모도 1조5000여억원에 달하는 방대한 규모였다는 점에서 강력한 매각 의지가 읽히는 만큼 일감 몰아주기 규제 회피는 부수적인 목적이라는 설명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처럼 경영권 승계를 위해 현대글로비스 지분 매각을 추진했다는 시각에서 바라보면 현대글로비스 주주 입장에서는 난데 없이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합병을 위한 기업가치 상승을 예상하고 프리미엄을 얹으면서까지 주식을 보유했는데 오너 일가가 별다른 설명도 없이 돌연 전체 물량의 13.39%를 대주주 일가가 내놓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매각 시도가 현실화된 만큼 언제든지 재차 지분 매각을 시도할 수 있다는 불확실성이 상승하면서 현대글로비스 지분 가치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하락할 것으로 예측된다.
현재 대부분의 증권가 전문가들은 합병설의 폐기로 앞으로 그간 프리미엄을 누려온 현대글로비스 주가의 거품이 빠지고 억눌려져 온 현대모비스의 주가가 회복될 것으로 보고 있다. 양희준 BS투자증권 연구원은 “확실한 것은 세부담 최소화 관점에 입각한 합병, 현물출자, 분할 후 합병 등 기존에 시장에서 거론되던 시나리오로는 오너 일가가 모비스 지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없다는 점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이날 현대모비스는 10% 이상 급등했고 현대글로비스는 하한가로 직행했다.
특히 현대차그룹이 투자자와 시장의 신뢰를 무너뜨린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번 ‘기습’ 매각 시도가 소통 문제까지 거론되며 번지며 의사결정 구조까지 비판받는 등 신뢰도 문제가 또 한번 도마에 오르고 있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이처럼 대규모 물량을 팔면서 별다른 설명도 없이 기관투자자들에게 넘기려고 한 것 자체가 매각이 성사되지 않은 이유”라며 “작년 9월 한국전력 삼성동 부지를 10조5000억원에 낙찰받았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현대차그룹은 한전 부지 고가 인수 논란으로 그룹 전체의 시총이 20%이 급락하고 정몽구 회장이 배임 혐의로 고발당하는 등의 홍역을 앓기도 했고, 주가가 낮을수록 정의선 부회장의 지분 확보가 용이한 현대모비스는 현대차·기아차와 함께 한전 부지 매입에 참여했음에도 자사주 매입 계획에서 제외돼 일부 주주들이 반발하기도 했다. 자사주매입, 배당 확대 등으로 어느 정도 주주들의 반발을 잠재웠지만 이날 매각 시도로 인해 다시 한 번 현대차그룹에 대한 불안감이 재확인됐다는 평가다.
◆지분 매각 재추진 ‘무게’ 쏠려

향후 정 회장 부자의 행보도 미궁 속으로 빠져 들게 됐다. 대체적으로 정의선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를 위한 움직임을 본격화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는 상태다.
현대차그룹은 삼성그룹과 마찬가지로 순환출자구조로 돼 있으며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고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정 부회장은 현대모비스 주식을 한 주도 보유하고 있지 않으며 현대차와 기아차 지분을 약간씩 보유하고 있는 정도다.
따라서 정 부회장은 장기적으로 현대모비스의 지분을 반드시 유의미할 정도로 확보해야 한다. 이에 따라 이번 현대글로비스 지분 매각 시도는 현대모비스 지분을 확보할 ‘실탄’을 마련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중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현대글로비스 지분을 매각한 대금으로 현대모비스 지분을 확보한다는 예측인 셈이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블록딜을 재추진하기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입장을 밝혔지만 블록딜을 재추진 하는 쪽에 가장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는 이번 블록딜에서 강한 매각 의지가 읽히고 있고 또한 블록딜이 ‘1타 3피’ 격의 묘안이기 때문이다.
어짜피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피하기 위해서는 정 회장 부자는 현대글로비스 지분율을 낮춰야 한다. 또한 블록딜을 통해 경영권 승계를 위한 자금도 마련할 수 있으며, 매각 대금으로 현대제철이나 기아차의 현대모비스 지분을 확보한다면 순환출자구조까지 일정 부분 해소할 수도 있다. 현재 현대모비스 지분은 기아차가 16.88%를 보유하고 있고 정몽구 회장이 6.965, 현대제철이 5.66%, 현대글로비스가 0.67%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최대 12%대에 달하는 할인율을 제시했음에도 블록딜이 무산된 것에 비춰볼 때 아예 현대글로비스와 현대모비스를 합병할 것이라는 합병설도 다시 제기되고 있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현대글로비스의 시총을 끌어올리고 현대모비스의 시총을 끌어내려 비슷한 수준으로 맞춰야 하는데 현재 현대글로비스의 시총은 현대모비스의 50% 정도에 불과해 격차가 큰 상태라는 문제가 있다.
여기에 블록딜이 무산되면서 현대글로비스 주가가 하한가로 직행하고 현대모비스 주가가 급등하는 등 이같은 격차가 더욱 벌어지면서 합병설은 이날 블록딜 시도를 기점으로 용도폐기됐다는 것이 중론이다. 지분 매각 시도만으로도 정 회장 일가가 합병 등으로는 현대모비스 지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라는 평가도 제기된다.
새로운 지주회사를 설립해 현대모비스를 흡수합병할 것이라는 시나리오도 급부상하고 있다. 이 시나리오는 정 회장 부자가 100% 출자해 지주사를 신설하고, 이 지주사가 차입을 통해 현대모비스 지분을 충분히 확보해 궁극적으로 흡수합병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자사주 매입에 현대모비스가 제외됐을 때도 이 시나리오가 거론된 적이 있다.
역시 일감 몰아주기나 순환출자 해소 등 현재 상황을 봤을 때 다른 방법으로 여러모로 지분 매각을 재추진할 것이라는 예상에 무게가 실린다. 블록딜을 재추진한다면 향후 할인율을 더욱 낮추거나 매각 규모를 줄이는 등 시장 충격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고려해볼 수 있고, 우호주주 또는 계열사와의 주식 스왑 등의 방법도 가능하다.
다만 이날 매각 시도로 시장이 현대모비스 매입에 나설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현대모비스 지분 확보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해진 만큼 정 회장 부자의 고민도 깊어지게 됐다.
◆관련주들 주가 급변…혼선 가중
한편 블록딜 성사 여부와 관계 없이 정 회장 부자의 현대글로비스 지분 매각 시도가 현실화됨에 따라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기업들의 주가가 요동치는 등 시장에서는 혼선이 거듭되고 있다.
현대모비스 지분 5%대를 가지고 있는 현대제철은 지분 보유 분량이 블록딜 규모와 비슷한 1조3000억원대인 것에 비춰 향후 현금 유입 기대감에 상승세를 기록하고 있다. 현대모비스 지분을 16% 이상 보유한 기아차 역시 마찬가지다. 지배구조 개편 움직임이 본격화되면 추가 지분 매입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이는 현대차도 상승세를 타고 있다. 현대차 역시 대주주 지분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반면 현대글로비스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삼성그룹의 삼성SDS나 SK그룹의 SK C&C 등 주요 지배구조 관련주들로 불똥이 튀면서 나란히 7~8% 이상 급락하는 등 해당 종목들은 날벼락을 맞았다. 이는 현대글로비스 블록딜이 무산되면서 지배구조 관련주에 대한 투자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지배구조 관련주들은 현대글로비스처럼 모기업의 지원 아래 기업가치가 상승할 것으로 예상돼 프리미엄을 누려 왔지만 현대글로비스처럼 언제든 대주주가 발을 뺄 수 있다는 불안감이 확산돼 투자자들이 매물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삼성 지배구조 최상단에 위치한 제일모직도 아직 기업 가치를 키우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예상돼 온 만큼 이날 6% 이상 급락했다. [ 시사포커스 / 김종백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