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같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이지만,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일본과 전혀 다른 독일의 메르켈 총리 행보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가 외교 관례상 이례적으로 일본 방문 중에 일본의 역사 인식에 대해 작심 비판을 쏟아낸 이유에서다. 이로 인해 일본 정부는 지금 발칵 뒤집혔고, 한국과 중국은 메르켈 총리 행보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환영하는 분위기다. 독일은 지금 세계시장에서 뒤쳐진 산업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일본과 협력관계를 구축하려는 등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메르켈 총리는 역사 문제에 대해 할 말은 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일본을 방문 중인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10일 “군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는 것이 좋다”는 뜻을 밝혔다. 교도통신 등 일본 언론들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메르켈 총리는 이날 도쿄 도내에서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민주당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 “일본과 한국은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어 화해가 중요하다”며 이 같이 말했다.
메르켈 총리의 이 같은 발언은 오카다 대표의 전언으로 알려졌고, 오카다 대표는 이 자리에서 ‘종전 70년을 맞이하지만 중국, 한국과의 화해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에, 메르켈 총리는 “과거를 완전히 정리할 수는 없다”며 “시대가 변하면 새로운 시각이 나오기 때문에 항상 과거와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메르켈 총리의 이 같은 발언에 오카다 대표는 “고통을 준 쪽은 빨리 잊고 싶지만, 고통을 받은 쪽은 쉽게 잊을 수가 없다”며 “그런 것들을 바탕으로 화해의 문제에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호응했다.
메르켈 총리의 이 같은 발언은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군 위안부 문제는 법적으로 종결됐다”는 아베 정권에 대한 반박성격의 비판으로 해석되고 있다. 특히, 아베 총리가 최근 국회 시정연설에서 한국과 관련해 기존의 ‘가치를 공유한다’는 표현을 삭제한 것을 겨냥한 듯 “일본과 한국은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한 점도 주목된다.
◆韓‧中‧獨 일제히 높이 평가
메르켈 총리가 이 같이 일본의 역사인식에 대해 작심한 듯 비판하고 나서자, 독일 언론들도 일제히 메르켈 총리를 거들며 일본 비판에 가세했다. 중도성향의 독일 일간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FAZ)은 현지시간으로 9일 ‘정상화로 가는 험로’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아베 신조 총리가 일본의 전쟁범죄 책임을 세탁하려 하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특히, FAZ는 “일본에선 아베 총리의 비호 아래 수만 명의 군 위안부들이 일본군 전선으로 끌려간데 대한 일본 군부의 책임이 부정되고 있다”고 위안부 문제를 대하는 일본의 태도에 심각한 문제인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 “아베 총리의 심복들이 미·일 동맹 뒤에 숨어서 일삼는 공격적 국가주의적 언행들이 일본 경제의 회복을 막는 심각한 위험요소가 되고 있다”며 “주변국들에 공포감을 심어주고 과거에 대한 복수심을 끌어올리게 하는 행동은 일본기업들의 이해관계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덧붙여 “일본의 힘은 전혀 영광스럽지 않은 과거를 영광스럽게 만들려는 시도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기업과 노동자들의 혁신으로부터 나온다”고 일침을 놓기도 했다.
진보성향의 쥐트도이체차이퉁은 ‘화해의 교훈’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메르켈 총리가 연설장소로 일본 정부의 압력을 받는 아사히신문을 선택한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암묵적 신호”라며 “메르켈 총리는 일본 정부를 비판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으면서도 영토와 과거사 문제를 지적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했을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이 문제를 아주 노련하게 해결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우리 정부는 “독일이 역사를 직시하는 가운데 일관되게 보여준 참회와 반성이 유럽지역의 화해, 협력, 통일의 토대가 됐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이라고 다시 한 번 일본의 전향적 자세를 촉구했다.
노광일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이 같이 말하며 “우리 정부는 일본이 역사를 직시하는 용기와 과거사의 상처를 치유하는 노력을 통해 주변국과 국제사회에 신뢰를 쌓아 나가길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노 대변인은 아울러, 메르켈 총리가 ‘이웃국가들의 관용적인 제스처가 없었다면 (화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언급한데 대해 “우리나라 속담에 ‘말 한마디로 천냥 빚 갚는다’는 표현이 있다”면서 “그런 정도로 우리 민족은 관용적이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진정성 있는 과거사에 대한 진정성 있는 반성이 선행돼야 거기에 따른 관용도 베풀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고 덧붙여 말했다.
일본과의 관계가 우리와 같은 입장인 중국도 환호의 목소리를 냈다. 홍레이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인 올해와 같은 중요한 해에 일본 당국자가 정확한 선택을 할 수 있길 희망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중국 주요 신문들과 네티즌들도 메르켈 총리 발언에 큰 관심을 보였다.
특히, 환구시보는 네티즌들을 대상으로 긴급 설문조사를 실시해 응답자 중 무려 97%가 ‘메르켈 총리의 발언을 지지한다’는 결과를 얻어 보도하기도 했다.
◆당혹스런 일본, 불편한 기색
그런 반면, 일본은 당혹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무상은 10일 기자회견에서 “사정이 다른 일본과 독일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며 불편한 기색을 내보였다.
대부분의 일본 언론들도 메르켈 총리의 ‘역사’ 발언에 대해 축소하거나 아예 언급하지 않고 넘겨버리는 모습을 보였다. 보수성향의 요미우리신문은 양국정상회담에서 나눈 대화들만을 중심으로 “(아베 정권의 안전보장법 제정에) 독일이 다시 지지 의사를 표명한 것은 큰 원군이 된다”고 전했다.
역사 문제와 관련해서는 “메르켈은 ‘나치가 행한 홀로코스트라고 하는 우리가 떠안아야 하는 죄에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 것인지, 즉 과거사 정리가 화해의 전제가 된다’고 말했지만 직접적 언급은 피했다”는 수준에서 전하는데 그쳤다.
산케이신문 역시 “그동안 독일 외교가 중국에 치우쳐 있었으나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일본과의 거리를 좁혔다”고 전했다. 특히, 산케이는 메르켈 총리의 역사 관련 발언에 대해서는 “한국-중국과 대립하는 일본을 빗대어 빈정댔다”며 부정적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반면, 진보성향의 아사히신문은 무려 7개 면이나 할애하면서 메르켈 총리 발언을 상세하게 전했다. 아사히신문은 “메르켈 총리가 역사 인식과 관련해 여기까지 언급할 줄은 사전에 예상을 못했다”며 “굳이 깊숙이 파고든 것은 한중일의 긴장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독일에도 간과할 수 없는 현실적 위험이 됐다는 걸 상징한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