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예산’으로 이어진 與野 대치, 靑 ‘대화제의’로 풀릴까

지난 17일 ‘역사전쟁 선포’를 기점으로 야권과 대척점에 선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대한민국 국사학자 90%가 좌파”라며 연일 수위 높은 발언으로 보수층 결집을 호소하고 나섰고 그 결과는 국민공천제 논란으로 떨어졌던 대선후보 지지율을 완전히 회복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또 ‘국정교과서 문제’를 범야권 결속의 계기로 삼게 된 새정치민주연합은 현재 진행 중인 국회 예산 심사 과정에서 국정교과서 편찬 예산을 통과시키지 않겠다고 벼르고 있었으나 지난 13일 예비비를 통해 관련 예산이 이미 의결된 것으로 뒤늦게 알려지며 크게 반발하고 있는 모양새다.
이런 와중에 장기화되어가는 국정교과서 논란이 정부가 추진 중인 4대 개혁 진행까지 가로막아 총체적 난국으로 작용할까 우려한 청와대측에서 여야 지도부(대표 및 원내대표)와의 회동을 전격적으로 제의하고 나서면서 성사 여부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 野 역사교과서 예산 두고 한 목소리 성토
뜨거운 감자인 ‘교과서 국정화’를 두고 여야의 여론전이 한창인 가운데 지난 13일 국무회의에서 국정교과서 편찬 예산 44억 원 전액을 올해 예비비에서 지출키로 비공개 의결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난 데 대해 새정치민주연합은 정부여당을 한 목소리로 성토하며 압박에 나섰다.
이 44억 원에는 인건비와 개발비, 운영비, 심사비 등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데 필요한 비용과 교육부에 배정된 예산까지 포함됐는데, 야당의 반대로 국정 교과서 예산 확보가 어려울 것으로 본 교육부가 ‘예비비’를 통해 해결하려는 방법을 쓴 것으로 보인다.
본래 정부는 예측할 수 없는 예산 외 지출이 필요할 땐 예비비로 먼저 예산을 편성한 뒤 국회에 사용 명세를 제출해 승인을 얻으면 되나 과연 국정교과서 편찬이 예비비로 지출해야 될 만큼 시급하고 예측 불가능한 사안인지, 또 국가재정법상 보충성의 원칙과 이제 행정예고된 사안에 대해 사전 예산배정이 가능한지 등의 법리적 부분을 비롯해 앞서 ‘결정된 게 없다’던 국감에서의 정부 답변과 달리 예비비로 편성돼 국감에서의 ‘위증’문제까지 쟁점이 되고 있다.
이춘석 원내수석부대표는 20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당 원내대책회의에서 “박근혜 정부가 국회법 파동으로 국회의 입법권을 무력화했고 예비비 절차로 국회의 심의결정권을 짓밟았다”며 “이런 식이면 국회가 존재할 필요가 없다. 해산시켜야 한다. 무슨 일을 하란 말인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원내수석은 “국무회의에서 예비비가 의결된 13일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며 “이날은 국정교과서 부활을 이슈로 대정부질문이 시작된 날이고, 박근혜 대통령이 친일독재미화 교과서를 잘하라고 독려하고 미국으로 출국한 날”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그는 “예비비는 예측할 수 없는 홍수나 자연재해 등에 사용하라고 국회가 재량권을 준 예산”이라며 “(국정교과서 개발)이것이 예비비 지출 사안이라면 검정교과서를 쓰는 학생들이 천재지변을 당해 시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원내수석은 “(국정교과서 개발을) 당당하게 국회 본예산으로 할 수 없으니 꼼수를 써서 예비비를 편성하고 군사작전 하듯 1년 내에 완성하겠다는 것”이라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비비를 엄격히 통제해야 할 대통령, 국무총리, 경제부총리, 사회부총리가 자신들의 손으로 국가 예산질서를 무너뜨렸다”고 날을 세웠다.
그는 여당에 대해서도 “국회가 이 지경이 됐는데도 국회의 한 축인 새누리당은 대통령이 잘한다고 용비어천가를 불러대고 있는데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비판한 뒤 청와대를 향해 “이제라도 국가 예산회계질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독재로 기록된다는 점을 똑똑히 기억하라”라고 경고했다.
같은 당 최재천 정책위의장도 국정교과서 편찬 예산을 올해 예비비로 편성한 것과 관련, “법에 따르면 예비비는 예산의 초과 지출 때 사용하게 돼 있다. 보충성을 전제로 한다”며 “따라서 (국정교과서 편찬에) 국민 세금을 사용해선 안 된다. 이는 국가재정법 위반”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그러면서 최 정책위의장은 “교과서 국정화는 이제 행정예고 중이다. 설사 국민이 동의를 해도, (관련 예산은) 내년에 써야 한다”며 “미리 돈을 빼돌려놓고 쓰겠단 것은 국회의 예산심사권을 무시하고 우회하려는 불법”이라고 질타했다.
또 그는 “행정절차법 제46에 따르면 정책‧제도 및 계획을 수립, 시행하거나 변경하려는 경우 행정예고를 통해 국민의견을 수렴하게끔 돼 있다”며 “국민 의견수렴을 하는 이유는 국민이 반대하면 거둬들이겠단 국민주권의 법률적 표현”이라고 정부의 일방적 강행조치를 비판했다.
앞서 야당 예산결산특위 간사인 안민석 의원도 이날 오전 KBS라디오 ‘안녕하십니까 홍지명입니다’에 출연해 국정교과서 편찬 예산을 이미 예비비를 통해 마련한 데 대해 “지난주에도 정부가 국회에 와서 교육부의 예산 설명회를 했는데 정부에서 나온 국장과 과장이 ‘아직 결정된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했다”며 정부가 거짓말을 했다고 맹비난했다.
이는 지난 8일 확인국감에서 교육부가 국정 역사교과서에 대해 결정된 바 없다고 답변했음에도 12일 국정교과서에 대한 행정예고를 하고, 다음날 국무회의에서 예비비로 국정교과서 편찬 예산을 의결했단 점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또 안 의원은 “장관 역시 지난 9일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국정교과서 할 것이냐, 안 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 하루 종일 ‘결정된 게 없고 국정감사 끝나고 난 다음에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며 “이미 예비비로 예산을 한다는 것까지도 진행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국회에서 공식적인 위증을 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그는 “장관이 몇 차례 국회에서 위증한 부분을 넘어가고 다음 페이지인 예산을 할 수 없다”며 “정상적인 예산 국회일정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돼 안타깝다”고 예산 심사 거부 가능성까지 시사했다.
하지만 이종걸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당 원내대책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예산 심의 일정 전체를 보이콧하는지에 대해선 “민생, 국정교과서 반대활동, 예산심의를 동시에 추진한다. 연계활동은 교문위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기조를 다음 주까지 이어가겠다”고 밝혀 당장 전체 예산 심사 일정이 차질을 빚을 가능성은 적은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이 원내대표는 예비비를 통해 지출키로 한 국정교과서 예산에 대해 “요건에도 맞지 않고 국회 예산심의권을 박탈해 버린 것”이라며 22일 당 의원총회에서 이에 대한 대책도 세우기로 예고해 앞으로도 국정교과서 예산을 둘러싼 파장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임을 암시했다.
◆ 정부 “국정교과서 예비비 편성 문제없어” 반격
20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한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교과서 예산을 예비비로 편성하는 것이 적절했냐고 추궁하는 야당 의원들을 향해 “기재부는 예비비 신청이 들어오면 국가재정법상 예비비 요건에 맞는지 예측가능성, 시급성, 보충성을 따져본다”며 “교과서 관련해선 올해 10월 결정돼 예산 편성할 때 도저히 예측 불가능했고, 2017년 3월에 보급해야 하기 때문에 시급했다”고 시기상 불가피했음을 내세웠다.
그러면서 최 부총리는 국정교과서 개발에 예비비를 편성한 이유에 대해 “새로 집필, 감수, 인쇄, 보급 등에 15개월 정도 걸린다고 한다”며 “2017년 3월에 교육현장에 보급되려면 금년 11월 개발에 착수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또 최 부총리는 보충성 문제와 관련해서도 “교육부의 내년 예산에도 (국정교과서 예산이) 전혀 반영돼 있지 않아 보충성의 요건도 충족했다”고 반박했다.
이에 새정치연합 김현미 의원은 “교과서 국정화를 발표한 것은 12일인데 20일 간의 의견수렴 기간을 거쳐 11월2일이 돼야 (고시가) 확정되는 것인데, 확정되기도 전에 예산부터 편성했다”며 “지금 (예비비 편성)하나 연말에 예산 확정됐을 때 하나 1달 차이 뿐인데 정부가 국민 의견을 무시하고 요식행위로 행정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러나 최 부총리는 확고부동하게 예비비 편성이 문제가 없음을 거듭 강조하며, 예비비를 철회할 용의가 있느냐는 새정치연합 김영록 의원의 지적에도 “철회할 수 있는 권한이 없고 철회할 생각도 전혀 없다”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최 부총리는 ‘정부가 친일·독재 교과서를 추진하고 있다’고 김 의원의 발언에 대해 “누가 친일·독재 교과서를 만든다고 했냐. 동의할 수 없다”며 “지금 교과서가 너무 사실 관계가 혼란스럽게 기술돼 있어 미래 세대들이 혼란스러워 한다.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만들자는 것”이라고 적극 맞받아치고 나섰다.
◆ 靑, ‘대화 제의’로 ‘국정화’ 정국 강행돌파?
‘국정교과서’를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지난 19일 현기환 청와대 정무수석은 국회를 찾아 여야 대표 및 원내대표에게 박 대통령이 방미 성과를 설명하는 한편 예산 심사 등에서 국회의 협조를 당부하기 위해 조속한 시일 내에 회동하길 희망하고 있다고 전했다.
청와대 측에선 일자리 창출과 노동개혁 등 경제활성화 법안 및 예산안 처리를 당부하는 차원에서 제안했다고 하면서도 이밖의 다른 사안도 토론할 수 있다고 전해 국정교과서 문제도 다뤄질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 같은 청와대의 전격적인 제안에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원유철 원내대표는 적극 환영의 뜻을 표했으나 새정치연합은 여야 원내대표를 배제한 채 대표만 참여한 ‘3자 회동’을 청와대에 역제안했다.
이는 청와대 측의 갑작스런 대화 제의로 인해 정국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야당이 고심한 끝에 내놓은 방편이기도 하지만 원내대표가 참석함으로써 오히려 교과서 문제 외에 민생과 경제 문제 등으로 주제가 분산될 가능성을 일찌감치 배제하고 오직 국정교과서에만 의제를 집중시키겠단 의도에서 나온 제안으로 풀이된다.
반면 청와대는 미국 순방을 위한 출국 직전인 지난 13일 임시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박 대통령이 국정교과서에 대한 입장을 드러내며 교육부에 힘을 실어줬음에도 쉽게 진척되지 못하는 ‘국정교과서’ 정국을 타개하는 것은 물론 이번 방미 때조차 거부돼 개각에까지 영향을 미친 한국형전투기 사업 기술이전 문제 등 다양한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고 한중FTA 비준 등 경제 활성화 법안 통과를 국회에 당부하기 위해 회동을 제안했다는 해석이 일각에서 나오고 있어 3자회동을 역제안한 야당과 회동 형식에 합의할 수 있을지 세인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시사포커스 / 김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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