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 배상하도록 “금융당국의 역할과 세밀한 관심 필요”

[시사포커스 / 김은지 기자] 키코 사태와 관련해 금융당국에 분쟁조정을 신청한 4개 기업에 대해 다소 아쉬운 결과가 나왔다. 100% 가까운 배상을 요구해왔던 피해기업의 기대엔 한참 못 미쳤지만 배상 과정의 첫 단추를 꿴 데에는 의미가 있다. 비로소 분쟁조정에 참여하지 못 한 다른 키코 피해 기업들도 은행들과 배상 협상을 진행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13일 조봉구 키코공동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오전 12시 30분 금융감독원 현관 앞에서 “1년 6개월 동안 끌어온 4개 키코(KIKO) 피해기업 분쟁조정안이 드디어 발표됐다”며 공식 입장을 밝혔다. 금감원은 키코 상품을 판매한 신한·산업·우리·하나·씨티·대구은행 등에 키코로 인한 피해 손실액을 15%에서 최대 41%로 배상하도록 발표했다.
키코공대위는 입장문을 통해 “결과는 좀 아쉽지만 금융당국의 진정성 있는 노력에 감사한다”면서도 “키코 피해기업들은 지난 10년 동안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고 1000개 가까운 수출기업들이 키코 피해로 풍비박산이 나게 돼 절반 정도는 부도가 났고 나머지 기업들도 타격을 받아 크게 위축돼 있어 그 많던 해외 거래 선을 잃고 규모가 축소돼 있다”며 현실을 전했다.
이어 “이 기업들은 우리나라 수출의 허리를 떠받치던 중견 기업과 중소기업들이었으며 많은 기업인들과 근로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피땀으로 일군 기업들”이었다며 “수많은 가장들의 일터였고, 수많은 협력업체들의 버팀목이었는데 이런 기업들이 은행들의 탐욕으로 인한 불법 탈법 행위에 타격을 받아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고 수출 경쟁력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고 덧붙였다.
키코공대위 측은 10여년에 걸쳐 분쟁조정에 이르기까지 그간 키코 피해자들을 보는 사회의 시선은 녹록치 않았음을 설명했다. 지난 2013년 대법원은 ‘기업에도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내리며 은행에 불완전판매 책임이 있음을 완전히 인정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간 기업 측의 잘못을 강조하는 논리가 부각돼왔고 상대적으로 은행의 불완전판매 문제는 가려지는 듯 했다. 그러나 올 상반기 우리·하나은행이 해외금리가 연동된 파생금융상품 DLF를 판매하면서 가입 당사자인 고객도 모르게 ‘공격투자형’ 지위를 매기고 ‘위험등급 초과 가입 확인서’ 등에 충분한 설명 없이 가입시키는 등 불완전판매 문제가 다시 대두됐다. 이를 두고 ‘제2의 키코사태’가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등 대규모 원금손실 피해 사태로 번지면서 키코 사태도 새삼 다시 주목을 받게 됐다.
키코공대위는 “10년 동안 키코 피해기업들은 사회를 향해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달라고 호소를 했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거치며 정치권이나 사법부 그리고 정부 모두 우리의 호소를 외면해 왔으며 검찰은 검찰대로 법원은 법원대로 국정농단 사건에 키코 사태가 얽혀 아무도 그 호소를 들어주지 않았고 외면해 왔다”며 그간 설움을 토로했다.
이어 “주류 언론들도 은행들 편에 서서 우리의 호소를 귀담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며 “자기 책임으로 했으니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사건 정도로만 치부했고 돈이나 몇 푼 뜯어내려는 무리들로 취급해 왔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설움이 있었기에 이번 분조위 배상 결정은 비록 기대에는 못 미침에도 이들에게 유의미했던 걸로 보인다.
“이번 정권 들어 금융당국의 진정성 있는 노력 덕분에 키코 사태의 해결을 위한 단초를 마련할 수 있게 됐다”고 밝힌 키코공대위는 “대표 4개 기업이 분쟁조정을 하게 됨에 따라 나머지 피해기업들이 은행들과 협상을 하게 됐다”며 “이 협상에 은행들은 진정성을 갖고 임해주길 기대하고 또 이번 분쟁조정이 키코 피해기업들에게 희망고문이지 않기를, 또 우리 사회가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들은 금융당국에도 관련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과 함께 본연의 역할을 다해주도록 당부했다. 키코공대위는 “금융당국은 기업인들의 감당 안 되는 보증채무 면제를 위해 캠코나 유암코 등이 갖고 있는 개인 보증 채권들을 매입 소각해 피해 기업인들이 재기할 수 있도록 신용을 회복시켜주길 바란다”며 구체적으로 구제금융 등을 통한 재기 자금 지원 방안, 해외시장개척자금, 저금리대출 지원 등을 언급했다.
이어 “10년이 지난 만큼 피해기업들의 상황도 많이 변했는데 자금 지원과 피해배상은 당시 피해 당사자에게 돌아가야 한다”며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은행들이 갖고 있는 보증 채권들을 소각해 분쟁 조정을 통해 받게 되는 배상금이 다시 그대로 은행에 돌아가게 되는 결과가 발생하지 않도록 금융당국의 역할과 세밀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키코공대위 관계자는 “은행이 수락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 배상은 금감원에서 할 수 없는 만큼 4개 기업과 은행권이 우선적으로 합의에 들어가게 된다”며 “생각보다 배상비율이 적긴 하지만 이번 조정을 가이드라인으로 해서 4개 기업의 사례를 가지고 은행들과 협상해 다른 기업들도 협상을 진행할 수 있도록 되길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키코는 녹인(Knock-In; KI)옵션과 녹아웃(Knock-Out; KO)옵션을 결합(KIKO)해 만든 구조화파생금융상품으로 환율 안정 구간에서는 기업에 유리하지만 환율의 등락폭이 큰 시기에는 손실의 위험도가 올라가는 상품이다.
은행권이 2005년부터 수출을 주력으로 하는 중소기업을 상대로 대거 판매한 키코 상품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발발 직후 환율이 올라가면서 기업들을 파산지경에 이르게 해 일명 10년에 걸친 ‘키코 사태’를 야기했다.
해당 사태로 피해를 입은 기업은 최소 738개, 피해 규모는 3조 2247억원에 달하는 걸로 전해진다. 다만 금감원은 앞서 지난해 6월부터 일성하이스코, 재영솔루텍, 남화통상, 원글로벌 등 4개사만을 대상으로 키코 분쟁조정 신청을 받았다.
이밖에 아직 조정이나 소송을 진행한 적 없으나 피해 구제를 희망하는 기업은 150여개에 달하는 걸로 전해진다. 경기도 지역만 해도 68개 기업이 1600억원에 달하는 손실을 입어 피해 조정을 기대하고 있으며 서울은 64개, 인천은 22개 등이 있다.